본문: 창 14: 17-20
본문 요약: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하여 돌아왔을 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그가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하나님을 찬송할 지로다 하매 아브라함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주제: 십일조
테마: 십일조 정신
5. 명제: 십일조 정신은 예수 님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선언적 명제)
6. 목적: 십일조 정신을 바로 소개하여 은혜를 쫓아 사는 천국 백성의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서…….
7. 질문제기: 십일조 정신은 무엇입니까?
8. 전환 문장: 십일조 정신은 예수 님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십일조 정신은 무엇입니까?
9. 대지
10. 제목: 십일조 정신
1. 갈등
율법이 폐지된 신약 시대는, 십일조를 더 행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생각이 과연 성경적 타당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구약의 십일조에 대한 율법적인 가르침은 십일조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유임을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레 27:30절 “그리고 그 땅의 십 분의 일 곧 그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열매는 그 십 분의 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의 성물이라. ”그래서 구약 백성들은 농사의 소산물과 가축의 소산을 십일조로 드렸습니다. 십일조의 개념은 십 분의 일만 하나님의 소유가 아니라, 내 모든 소유의 주인은 여호와 하나님이시다. 라는 신앙고백이 깔려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십입 조의 기원은 모세의 율법이 선포되기 전,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창 14:18-20“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의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바울 사도는 이 멜기세덱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7:1-3절에서 “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왕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자라. 아브라함이 모든 것의 십 분의 일을 그에게 나누어 주니라 그 이름을 해석하면 먼저는 의의 왕이요 그다음은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의 아들과 닮아서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바울 사도는 이 멜기세덱이 얼마나 신비로우신 분인가를 생각해 보라며,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십분의 일을 그에게 주었느니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세 율법이 아직 세우지기 전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이기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 때문임을 신앙 고백하면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림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도 십일조 드림을 서원했습니다. 율법이 세우지기 전에, 야곱은 아브라함의 신앙을 따라 시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창 28-22절“ 야곱이 서원하여 이르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떡과 입을 옷을 주시어 내가 평안히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 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야곱은 자신을 지켜 주시면 그 보답으로 일종의 서원의 뜻으로 십일조를 시행한 것 같습니다. 이 십일조 정신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에게도 이어가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아직 율법 제도와는 상관이 없이, 십일조가 믿음의 조상들로부터 시작되었고, 그 정신은 자신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깊은 감사의 표시로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단순히 의무감이나, 구원을 얻기 위한 인간의 행위 차원에서 드린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2. 갈등 심화
그러다가 모세 시대 때, 이스라엘 백성이 본격적으로 가나안 땅에 들어가 나라를 세운 이후, 이 십일조는 모든 구약 이스라엘 백성이라면 반드시 감당해야 할 의무로서 율법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일종의 종교 세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전 곡간에 두었습니다. 느 10:38-39절“ 우리 하나님의 전 곳간의 여러 방에 두되 곧 이스라엘 자손과 레위 자손이 거제로 드린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을 가져다가 성소의 그릇들을 두는 골방 곧 섬기는 제사장들과 문지기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있는 골방에 둘 것이라 그리하여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전을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그렇다면 십일조의 용도가 무엇이었습니까? 먼저 기업이 없이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인의 생활비로 사용되었습니다. 이스라엘 12 지파가 가나안 전쟁에서 정복한 땅을 분배할 때, 레위 지파는 땅을 분배받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소에서 일하는 직분을 받았기에, 다른 11 지파가 드리는 십일조로 생활을 하게 했습니다. 민 18:21절“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이 하는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신 12:12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신 12:19절“ 너는 삼가 네 땅에 거주하는 동안에 레위인을 저버리지 말지니라 ”그리고 삼 년에 한 번씩 구제비로 사용되었습니다. 가난한 자를 위한 십일조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신 14:28-29절“ 고아, 과부, 나그네, 매 삼 년 끝에 그해 소산의 십분의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거류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이 와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그러니까, 십일조는 구약 하나님의 교회 공동체의 운영과, 구제, 사랑의 나눔(교제)의 비용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쇠퇴와 함께 십일조에 대한 이행도 쇠퇴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타락은 자연적으로 십일조 생활에 태만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타락은 하나님 우선에서 자신의 우선 즉 이기적인 삶의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습니까? 그 결과 구약 교회에 재정의 궁핍이 일어났고, 그 여파는 성막을 섬기는 레위인들에게 생활비를 줄 수 없었고, 레위인들은 하나님의 성전 일을 중단하고, 먹고 살기 위해 전리로 도망을 가게 되었습니다. 느 13:10절 ”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이 받을 몫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자기 밭으로 도망하였기로 ”그래서 느헤미아는 신앙의 부흥 운동을 통해 무너진 십일조를 회복시켰습니다. “ 느 13:12절에 ” 그 결과 온 유다가 곡식과 새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가져다가 곳간에 들이므로 ”말라기 선지자도 타락한 신앙 회복을 개혁하면서 십일조의 의무를 강조했습니다. 말 3:8-10절 “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하였나이까 하는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신앙의 타락은 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은혜와, 또 한 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라는 하나님의 주 되심(주재권)에 대한 믿음의 쇠퇴로 이어져, 십일조 시행이 태만하게 되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는 이런 불 신앙을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행위라고 책망했습니다. 예수 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 이스라엘 구약 백성들의 신앙은 타락하였고, 십일조의 참 정신은 사라졌으며, 형식적인 율법의 껍데기만 남았습니다.
3. 전환
마침내 예수 님이 오셨을 때, 바리새인을 중심으로 하는 형식적인 율법 신앙은 극에 달했고, 십일조 정신은 껍데기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정신을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근본 목적은 율법을 지켜야 구원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생은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는 죄인임을 깨달아, 구세주를 의지하도록 돕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모르고, 자신들은 모든 율법을 다 지킬 수 있고, 그러니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습니다. 예수 님은 이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책망하셨습니다. 예수 님은 율법을 폐지하시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성 시키려고 오셨음을 선포하셨습니다. 마 5:17-18에서 은혜받은 천국 백성들에게,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 얻을 수 있다고 자부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 보다, 너의 의가 더 낫지 아니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한 마 5:20 절에서 예수 님은 형식적인 십일조만을 집착하며, 율법의 더욱 큰 부분을 간과하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마 23:23절“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 박 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율법의 정신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기초로 시행되어야 마땅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정신은 사라졌고, 다만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형식적인 율법주의 의식으로 변절 되었고, 하나님 사랑이 아닌 인간의 자기 행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닌 인간의 자기 의를, 자랑하는 형식적인 껍데기 신앙으로 변절 되고 말았습니다. 예수 님은 율법을 폐지하시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다고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십일조의 정신은 의와, 인과, 신이 병행되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율법 문제로 모인, 초대 교회 최초의 예루살렘 회의에서, 최종 결정된 내용은 행 15:20 절“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여기서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율법의 잔재이니 폐지해야 한다. 라는 내용이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시는 도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롬 6:13-14절에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은 우리는 이제 너의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이 십일조를 처음 받은 이 신비로운 멜기세댁이란 인물은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멜기세덱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고 히브리에서 증거 하고 있습니다. 히 5:10절에서 “ 예수님은 멜기세댁의 반차를 따른 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히 7:1절에서 “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25절에서 예수님은 항상 살아 계셔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구원하실 분이십니다. 히 8:6에서 “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 ”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죄인을 연결하는 언약의 중보자이십니다. 이 멜기세댁은 바로 우리의 영원하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모형 즉 그림자이시며, 마침내 때가 됨에 실체이신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 님은 우리의 영원한 제사장으로서 아브라함으로부터 십일조를 받으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십일조 정신은 율법을 넘어,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에 대한 신앙고백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전쟁에서 아브라함을 구원하시고 이기게 하신 멜기세댁은 바로 우리를 원수 마귀와 싸움에서 구원하여 주신 우리 구주 예수 님으로서, 그분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표현과, 나의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신앙고백 차원에서 드려졌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유언인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어라는 주의 뜻을 이루는데, 은혜받은 천국 백성들은 실제적으로 동참하는 것이 천국 백성의 도리가 아니겠느냐?고 반문하고 있습니다. 십일조가 쇠퇴한 구약 교회는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었습니다. 신약 교회도 바르게 운영될 수 없고, 구제와 선교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약 시대는 율법이 폐지 되었음으로, 십일조도 폐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은 성경적이지 못합니다. 물론 구약의 의식법은 주님이 지신 십자가를 통해 완성되었고, 여러 음식에 대한 규례들도 더 신약 시대 성도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지만, 거룩한 하나님의 의의 법인 십계명은 폐지 된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은 예수 님을 통하여 더 완성되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4. 대단원
십일조는 은혜받은 사람들에게는 작은 헌신에 불과합니다.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라는 신앙고백은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있는 거듭난 천국 백성들에게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분명 주의 사랑과 은혜는 율법보다 강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자신의 생명을 순교로써 전부 드렸습니다. 스데반 집사님은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도 저들의 죄를 용서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자기의 아들을 죽인 공산주의자를 양아들로 삼았습니다. 주님의 은혜가 율법보다 더 크고 능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예들입니다. 이것이 천국 백성이 드릴 영적 예배입니다. 분명 구원을 얻기 위해서 지켜야 한다는 율법적인 십일조 개념은, 더 이상 신약 교회에서는 합당치 않습니다. 십입조 안 드리는 사람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는 말을 전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또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망하게 될 것이라는 구약 선지자의 저주의 말씀도, 점진적 구속사적 측면에서 볼 때 은혜의 시대에는 적용하기 어렵습니다. 예수 믿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사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살고 있습니다. 은혜가 왕 노릇하는 신분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헌신은 기쁨으로, 자원해서, 감사함으로, 믿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강제적으로, 억지로, 의무감으로 드리는 헌신과 봉사는, 주님의 은혜를 바로 만난 사람들의 자세는 아닙니다. 주의 은혜와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임을 고백하는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찌 내 모든 것이 내 것이니, 나 혼자 잘 먹고 잘살자는 이기적인 불신자처럼 살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 주님은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여 주시리라 ” 그리고 “ 주는 자가 복되도다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