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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위험성

wordlove 2020. 11. 12. 13:49

1. 본문: 14:1-7

2. 명제: 무신론은 여러 위험성을 가진 거짓 이론이다.

3. 제목: 무신론의 정체

 

 

여러분 가운데 이런 분은 안 계십니까? 하나님이 어디 있어. 천국 가봤어.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야. 하나님을 믿으니 차라리 내 주먹을 믿겠다. 이런 분에게 오늘 하나님의 말씀 1절에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고 하면서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을 어리석다고 말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고 하는데 이 말속에는 죄를 행하는 사람이라는 의미가 포함되어있습니다.. 무신론은 단순히 어리석은 사상 일뿐만 아니라 죄악입니다. 모든 죄악은 무신론에서 파생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유명한 작가 토스토예프시키는하나님이 없다는 인간은 무슨 짓을 다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선언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무신론 앞에서는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모두 사라집니다. 하나님이 없다 이것은 모든 질서와 가치를 부정하는 선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무신론은 여러 위험성을 가진 거짓 이론이다.라고. 말씀합니다. 도대체 무신론이 무슨 죄일까요?

 

1. 양심의 증거를 거 스리는 죄악입니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한 어리석은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마음에 이렇게 말합니다. 1절에 하나님은 없어 하나님은 없어!” 그는 하나님이 정말 없다고 한다면 그 냥 그렇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그에게 자신의 마음에 설득하려고 하는 의도가 무엇일까요? 어쩌면 자기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음성을 듣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의도적으로 자기 마음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안 들으려고 거부하는 사람입니다. 한 기독교 심리학자는 무신론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무신론자는 하나님이 없다고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기 안에 각인되어 있는 하나님의 의식을 지워 보려고 몸부림치는 사람이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에 대한 의식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지워 보려고 애쓰는 사람 그것이 무신론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무신론 철학자 니체가 신은 죽었다고.외쳤습니다. 말년에 그는 정신병자가 되어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정신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 그는 이런 낙서를 남겼다고 합니다. “오신이여! 당신은 살아 있소. 그리고 내가 죽었소. 니체 씀.” 니체의 한평생은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 의식과 더불어 싸웠던 생애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 무신론협회 회장을 지낸 머들린 오 훼어라는 사람이 반기독교 운동에 앞장을 섰습니다. 공립학교기도 금지 운동을 벌였습니다. 미국 중서부의 어는 작은 도시 법정에서 이 문제를 가지고 싸워다가 승소를 했습니다. 정말 예상치 못한 놀라운 판결을 듣고 서는 자기도 모르게 내뱉은 일성이 오 마이 갓!” 오 나의 하나님 이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 소리를 들은 기자들이 무신론자가 오 마이 갓 함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입방아를 찍었다고 합니다. 한 스님이 겨울날 얼음 위를 지나다가 얼음이 깨져 물에 빠졌다고 합니다. 그 스님이 자신도 모르게 뱉은 말이 아이고 하나님! 이었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마음속에는 이런 하나님의 의식이 깔려있습니다. 1:20“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2:15절 이하에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의 속에는 하나님의 율법이 새겨져 있다고 합니다. 그것이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하지 마라. 하면 안 되지. 너 어디가?’ 이렇게 우리의 마음속에서 들려오는 양심의 목소리가 있습니다. 양심의 법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양심이 하나님을 알만한 또 다른 증거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은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려고 합니다. 무신론의 정체는 무엇입니까? 양심 불랑 자입니다. 내 양심의 소리를 묵살하고 살려는 범죄가 바로 무신론의 죄 악성입니다.. 무신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2. 자기 죄를 합리화시키려는 죄입니다.

시편 기자는 무신론은 반드시 부도덕으로 나타난다고 지적합니다. 1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무신론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지적 딜레마는 도덕을 어떻게 할 것이냐 라는 숙제입니다. 하나님을 포기한 사람은 절대 가치를 포기한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포기하고 도덕을 포기한 사람이 어떻게 윤리를 말할 수 있을까요? 따라서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는 도덕적으로 건강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는 수많은 죄악들이 난무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에 대한 탄압입니다. 4죄악을 행하는 자는 다 무지하뇨 저희가 떡 먹듯이 내 백성을 먹으면서 여호와를 부르지 아니하는 도다 무신론자에게는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옆에 있는 것이 매워 거추장스럽습니다. 유대인을 6백만을 죽인 휘틀러가 존경한 사림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신은 죽었다고 외친 니체였습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을 믿은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무신론이 가장 크게 지배하는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 사회입니다. 히틀러보다 사람을 더 많이 죽인 자가 공산주의자 스탈린과 모택동입니다. 김일성이는 북한의 교회를 초토화 시켰습니다. 김정일은 40억 달러를 스위스 비자금 계좌에 놔두고도 1년에 3억 달러를 쓰지 않아 300만 명을 굶겨 죽인 자입니다. 시체가 산을 이루기 시작한 1994년 북한의 3년 치 식량 값 8억 달러를 들여 김일성 궁전을 리모델링한 악한자입니다. 지금도 북한에 기독교인이 발각되면 아오지 탄광으로 쫓겨 가든지 총살당합니다. 대한민국을 장악하고 주사파 정권(김일성주의자)의 불의, 부정, 거짓을 보십시오. 무신론은 인간의 생명의 존엄성을 개만치도 취급하지 않습니다. 무신론이 지배하는 사회가 낙태를 합법화하자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자들이 동성연애를 합법하자고 주장합니다. 무신론은 양심이 죽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없는 이 세상을 온갖 죄악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 못할 짓이 없는 것입니다. 무신론의 정체는 부도덕입니다. 무신론의 정체는 무엇일까요?

 

3. 심판의 두려움에서 도피하게 하는 죄악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인간이 죄를 범하자 하나님의 눈이 무서워 숨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죄를 범한 인간을 향해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찾으시자 이때 아담이 무엇이라고 대답합니까? 주여 내가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마음속에 두려움이 있어요. 그런데 이 두려움에 대해 해석이 재미있습니다. 무신론 철학자인 포에르 바흐는사람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다. 그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거기에서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신이 있었으면 좋겠다.” 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투사 심리 곧 무엇을 소원하는 마음 때문에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합니다. 신이 사람을 만든 것이 아니라 사람이 신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무신론의 허구가 오히려 신앙의 정당성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마음속에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특별이 죄인들의 마음속에는 그들이 범한 죄 때문에 더욱 두려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심판의 두려움이라고 부릅니다. 죄를 두려워하고 벌 받을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들 그들에게 가장 거추장스러운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신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도둑놈에게 가장 거추장스러운 것이 무엇일까요? 경찰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자의 마음속에는 아 신이 없으면 좋겠다. 천국과 지옥도 없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생깁니다. 그들이 범한 죄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신이 없으며 좋겠고 자신을 벌할 수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무신론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을 인정하지 않고 두려움에서 도망가기 위해 마련한 이론적인 도피처가 바로 무신론입니다. 한 기독교 철학자는 무신론을 가리켜 죄인들의 자기 방어 이론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죄에 대한 그 두려움을 완화하기 위해 숨어 들어가는 것이 무신론입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생각할는지 모릅니다. 그건 나와는 상관이 없이 그래도 나는 교회를 나가고 기도도 하니까 말이야. 그러나 저는 이 시대의 진짜 문제는 교회 밖에 있는 무신론자가 아니라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라고 생각합니다. 무신론 가운데는 실천적인 무신론자가 있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자는 교회도 나오고 찬양도 하고 기도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아가는 것을 보면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삽니다. 교회에 와서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사는데 삶의 현장에서는 하나님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직장에서는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살아갑니다. 사기치고 탈세하고 이혼하고 자기 멋대로 삽니다. 자신의 죄를 무마시키는 보험 수단으로 또 하나님을 복 받는 수단으로 교회를 택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며 순종하지 않습니다. 실천적 무신론자가 더 큰 문제입니다. 무신론은 심판의 두려움에서 도피하게 하는 죄악입니다.

 

4,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무신론이라는 죄악을 극복할 수 있을까요?

그 답은 하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주님 앞에 돌아와야 합니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두려움은 하나님도 이용할 수 있고 마귀도 이용할 수 있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이용합니다. ‘너 하나님 두렵지? 그러니까? 하나님 보지 마 도망가’. 교회에 나가도 예수는 믿지 마. 하나님을 등지고 살아가라고 부추기는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너 하나님 앞에 가면 너희 집안이 망할 거야. 교회 나가니까? 병드는 거야.’ 이런 거짓 생각을 주는 것이 마귀입니다. 그러나 정말 자기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오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6절에 너희가 가난한자의 경영을 부끄럽게 하나 오직 여호와는 그 피난처가 되시도다.하나님은 우리를 심판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구약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은 각 지역에 총 6개의 도피성을 세웠습니다. 이스라엘 최고의 극형은 법정에서 선고하는 것이 아니라 복수 자들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사람을 죽였다면 죽은 그 가족은 그 살인자를 언제든지 살해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습니다. 이렇게 되면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사람보다 더 불안합니다. 언제 복수자로부터 죽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고의가 아닌 과실치사로 즉 실수로 사람을 죽인 경우도 허다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유일한 희망은 도피처로 도망을 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도피성 성주는 그 사람을 정당한 재판을 받을 때 까지 받아주고 의식주를 제공하여 새 삶의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그런데 지금도 그런 도피처가 있음을 아십니까? 구약 시대의 도피처는 예수님의 그림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그 도피처입니다. 예수님 안으로 들어오면 그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새로운 삶의 에너지를 제공합니다. 하나님 떠나 사는 것이 가장 큰 원죄입니다. 모든 죄의 뿌리가 무신론입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피할 곳은 두 곳밖에 없습니다. 죄를 범한 사실을 잊어버리기 위해서 무신론이라는 이론으로 도망을 가든지 그렇지 않으면 예수님께로 가든지 이 둘 중의 하나입니다. 어디로 도망을 가시렵니까? 무신론이라는 우상으로 가든지 예수님께도 가든지 여러분이 선택을 해야 합니다. 예수님 앞으로 오면 그분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원을 거절하면 어느 날 여러분은 심판자이신 하나님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때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진노를 피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한국의 사법제도는 미국과 좀 다르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검사나 판사를 하다가 옷을 벗으면 변호사가 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다르다고 합니다. 변호사를 먼저하고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에 판사가 된다고 합니다. 어느 변호사 한분이 미성년 범죄자를 위해 무료로 변호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한 젊은이를 무료 변호를 해 주었고 석방되었습니다. 그러데 또 범죄를 저지르고 들어 왔습니다. 그 변호사는 또 무료 변호를 열심히 해 주었습니다. 나갔다가 또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하 기를 세 번이나 무료 변호를 해주면서 설득하고 타일렀습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이 변호사가 판사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판결을 하게 되었는데 변호사 시절 자기가 변호했던 그 청년이 또 들어왔습니다. 법대로 하면 그 사람은 사형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 피의자는 이 판사를 알아보고 판사님 면목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번만 도와주십시오. 한번만 기회를 더 주십시오.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판사님이 어떻게 말했을까요? 이보게 나는 이제 더 이상 변호사가 아니야. 이제는 판사라네. 변호사 시절 나는 자네를 돕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 무료 변호도 해 주었고 내가 그렇게 타일러지 않았는가? 내가 자네에게 얼마나 정신 차리라고 타일렀는지 자네가 알지 않나. 그러나 자네는 변호사 시절의 내 은혜와 사랑을 저 버렸어. 나는 지금 판사야 나는 법을 기초로 하여 공정하게 판단을 내릴 수밖에 없네. 그대는 사형이야 똑 같은 질문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음을 아십니까? 지금 예수님 앞에 나오면 예수님이 우리를 변호하십니다. 1:18“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지금 우리의 변호사가 되셔서 우리를 받아 주시고 새롭게 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그분을 거절하면 어느 날 심판자이신 그분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 때 영원하신 진노를 받게 될 것입니다. 지금은 기회가 있습니다. 지금은 은혜 받을 때입니다. 고후 6:2“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우리가 지금 만약 우리의 죄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나아와 무릎을 꿇고 하나님의 용서를 구하며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면 여러분의 생애는 바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며 영생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이 은혜와 구원이 지금 여러분의 생애 속에 임하기를 축원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고 계신 여러분 감사하십시오. 예수 믿은 것 얼마나 감사합니까?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하시면 예수님을 자랑하십시오, 아직도 이 예수님을 몰라 방황하고 있는 우리 주변의 이웃들에게 예수님을 자랑하십시오. 그들도 예수 믿으면 우리와 떡같이 하나님께 감사하면 기쁨 가운데 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과 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하나님을 떠나 살고 있는 우리 인생을 구원 하시려 오셨습니다. 이 분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예수님이 오늘 아직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지 않는 인생들에게 두 손을 벌리고 돌아 오도록 기다리고 계십니다. 찬송 527 장 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오 우리 주의 넓으신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내일은 아무도 모릅니다. 지금 예수님의 부르시는 손길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오늘이 여러분의 마지막 선택이 될 런지 모릅니다. 지금 예수님 앞으로 돌아오기를 원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제가 여러분이 구세주 예수님을 영접하실 수 있도록 대신 기도 인도해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