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갈 2:20
2. 제목: 자유의 삶
1. 은혜의 삶이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은혜는 구원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 많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우리에게 값없이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이 바로 은혜입니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값없이 주어진다는 말을 합니다. 불행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 믿지 않는 자들에게 임한 은혜에 대해서는 알면서도 정작 믿는 자들에게 임한 은혜에 대해서는 잘 모릅니다. 은혜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덧입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분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자신을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기독교란 예수님과의 친밀함과 하나 됨에 관한 믿음의 종교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예수님이란 인격 속에 하나님이 어떻게 그분의 의로움을 부여하셨는지를 말씀을 통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거듭날 때 우리의 본질은 변합니다. 구원받기 전에 우리는 죄의 본성을 지녔습니다. 죄가 우리의 영에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본성이었으므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 안에 있는 우리의 죄악 된 본성을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으셨고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우리의 옛사람은 더 이상 살아있지 않습니다. 갈 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 물론 이 말은 우리가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게 되었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이 롬 7장에서 말씀한 것처럼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의 몸에는 두 소욕이 있습니다. 죄를 쫓아가는 육신의 소욕과 하나님을 쫓아가는 성령의 소욕입니다. 그리스도와 분리되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을 선택하면 우리는 그 즉시 육신의 소욕을 따라 죄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죄를 이기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다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승리를 위해 애쓰는 가장 흔한 방법은 하나님의 명령을 자기 힘으로 지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씁니다.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얻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가지는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거하고 예수님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면 우리는 의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믿음으로 은혜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에스겔은 겔 36:26-27 “ 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27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에스겔은 하나님이 새로운 언약을 주시는 날이 도래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은혜의 언약입니다. 새 언약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을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율법적인 삶은 내 힘으로 율법을 지키겠다는 것입니다. 은혜의 삶이란 내 안에 오신 새신 즉 성령의 힘으로 율례를 지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은혜로 사는지 율법으로 사는지를 확실하게 알려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동기를 살펴보십시오. 의무감으로 합니까? 사랑 때문에 하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실 때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다는 소망이 우리를 움직이는 원동력이 됩니다. 의무감으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는지 자신에게 질문을 해 보십시오. 믿는 자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진정으로 의로운 삶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은혜를 깨달으면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는도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사랑이 운전수가 되셔서 바울 자신을 움직이게 했다. 는. 고백합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로 갈 수 있도록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은혜의 삶을 살 때 인생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2. 율법의 신부 은혜의 신부?
롬 7장은 율법과 믿는 자와 관계를 결혼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롬 7:1-2“ 형제들아 내가 법 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 라 ”우리 인생은 율법 아래에서 태어났습니다. 언제 우리 인생이 율법과 결혼하게 되었습니까? 이것은 우리 인간 조상 아담이 이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희는 하나님같이 될 것이다.라는 마귀의 말에 속아 불순종의 죄를 지었을 때부터 인간은 율법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인간은 이것저것을 행하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율법주의자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제외한 모든 세상 종교는 행위 종교 즉 율법 종교입니다.. 이것저것을 행하면 거룩해지고, 도를 닦으면 해탈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다 마귀의 말에 속고 있는 것입니다. 결과적으로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생은 율법과 혼인하는 상태로 이 세상을 사는 것입니다. 율법과의 결혼 생활은 어떤 것일까요? 율법은 하나님의 의로운 법입니다. 이 의로운 율법이 우리 인생의 남편이 되었습니다. 이 남편은 의로워서 나에게 요구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완전한 것을 요구합니다. 남편 되신 율법은 완벽주의자입니다. 사람 가운데 완백 주의 성향이 있습니다. 완벽주의 남편과 살고 계신 분 계십니까? 완벽주의 남편은 항상 나의 잘못을 지적하고 비판합니다. 그 밑에서 사는 것은 정말 짜증이 나고 피곤합니다. 아무리 그 남편을 기쁘게 하려고 노력해도 남편은 만족하지 못합니다. 최선을 다해 남편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지만 아직도 부족해 좀 더 해야지 이것은 했는데 저것은 안 했잖아 이렇게 지적합니다. 완벽주의 남편을 결코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이처럼 남편 되신 율법도 완벽합니다. 그는 항상 명령합니다. 이것은 하고 저것을 하지 말라! 완벽주의 남편인 율법과 오래 살다 보면 이제 지쳐 더 이상 이대로 살 수가 없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죽음이 서로를 갈라놓기 전까지는 우리 인생은 율법과 혼인한 상태를 벗어 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더 불행한 소식은 율법은 죽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 인생에게는 소망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율법에서 자유 할 수 있는 길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천국에서 우리를 내려다보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나는 너희를 사랑하고 너희가 내 신부가 되기를 원하다. 나는 너희가 율법의 신부가 아니라 내 신부가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결국 아담 안에서 율법과 결혼한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율법이 결코 죽지 않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죽이셨습니다. 나는 죽었기 때문에 더 이상 옛 남편인 율법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처럼 십자가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는데 구원받기 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어 이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이 우리의 새 남편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물입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을 때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내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가 거듭나게 됩니다. 다시 태어났다는 말입니다. 이제 아담 안에서의 옛사람은 죽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 예수님과 결혼한 신부가 되신 것입니다. 은혜와의 결혼은 율법과의 결혼과 차원이 다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명령하지만 은혜는 우리를 보면서 기뻐하고 우리에게 사랑을 쏟아붓습니다.. 그는 우리를 바라보면서 감탄하십니다. 무언가를 할 때도 은혜는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는 우리를 통해 그 일을 할 것입니다. 그는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보면 번쩍 들어 올려 안아 주실 것입니다. 은혜는 우리에게 딱 한가를 원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남편의 사랑을 받으면 자연스럽게 그를 섬기게 됩니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면 우리는 그분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것으로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싶어 집니다.. 그렇게 무겁게 보였던 율법도 주님이 나를 통해 일하실 때 가볍게 지고 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의로움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해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음으로 주님에게서 받은 선물입니다. 우리는 은혜와 결혼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진리를 모르면 율법을 다시 찾게 됩니다. 그에게 할 일을 말해 달라고 하며 다시 옛 남편인 율법과의 관계를 그리워하게 됩니다. 그러다가 그를 찾아갑니다.. 이것을 간음이라고 합니다. 믿는 자가 이처럼 규칙에 얽매여 사는 삶으로 돌아가는 것을 영적인 간음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제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은혜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이것을 깨달은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삶은 규칙이나 의무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에 의해 이루어집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무엇을 행할 것인지 보다는 먼저 예수님과 나의 관계가 어떠한지에 초점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과 자유의 삶의 출발점인 것입니다.
3. 영적인 세계에서의 법
전철을 타면 기차가 오기 전 방송이 들립니다. 안전선 바깥으로 물러나서 너무 가까이 다가서지 말라는 방송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조심합니다. 왜 사람들이 이렇게 행동합니까? 우리 사회가 무정부 상태로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법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영적인 세계는 법에 따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규칙과 법에 따라 우리가 삶을 끌고 가려한다면 반드시 실패할 것입니다. 존 번연의 천로 역정을 보면 그리스도인이 인간의 마음을 상징하는 큰방에 들어갑니다. 그 방은 죄를 나타내는 먼지로 덮어 있습니다. 그가 법을 상징하는 큰 빗자루로 쓸어내려고 비질을 합니다. 그런데 먼지를 쓸어내기는 커녕 오히려 더 먼지를 일으킵니다. 이것은 우리가 법에 따라 살려고 할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율법에 따라 사려고 하는 것은 죄를 쓸어 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죄를 자극합니다. 죄 안 지어야지 결심을 하면 어느 순간 그 죄를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경험이 있지 않습니까? 거짓말 안 해야지 맹세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하는 자신을 본 적이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려고 하는 순간 죄를 짓는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율법은 죄를 자극하는 것입니다. 먼지를 어떻게 잠잠하게 할 수 있습니까? 빗자루를 가지고 쓸지 마시고 먼저 물을 뿌리면 됩니다. 이처럼 죄를 이기는 자유의 삶은 율법을 지킴으로서가 아니라 은혜의 삶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은혜의 단비를 뿌리면 됩니다. 은혜의 단비가 죄를 이기게 하는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거룩한 법으로 두 가지 일을 합니다. 먼저 우리 인생이 죄인임을 깨닫게 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해 보세요. 결코 지킬 수 없는 죄인 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둘째는 율법은 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인도합니다. 율법을 지키려고 해 보니 지킬 수 없는 자신을 모습을 보고 내가 죄인이구나. 그렇다고 한다면 나는 나를 죄에서 구원하실 구세주가 필요 하구나. 이렇게 구세주에게로 인도하는 가정교사 즉 몽학 선생 역할을 합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법으로서 의롭지만 율법 자체가 죄인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율법 자체가 사람을 변화시킬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이 처음 율법을 주신 목적도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어 라고 주신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 사탄은 이 은혜의 도를 망각하게 만들어 율법을 지켜 구원을 얻어 라고 가르치는데 이것을 율법주의라고 부릅니다. 이 율법주의는 아주 교묘해서 교회에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우리는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살라는 부르심을 받았음을 믿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그분의 생명이 우리를 통해 나타납니다. 매 수간 그분을 의지하고자 할 때 우리는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을 의지하지 않을 때 내가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해도 죄를 짓게 됩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의로운 자입니다. 우리는 이제 법 아래 살고 있지 않습니다. 은혜의 삶은 법과 규칙에 얽매이는 삶의 방식을 끊고 예수님과의 관계를 누리면서 사는 삶인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통하여 우리는 경건한 생활의 동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법아래 있지 않는다고 해서 마음 내키는 대로 죄를 지을 수 있을까요? 바울은 롬 6장에서 이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올바로 알고 그분 안에서의 의로움을 이해한다면 굳이 죄를 지으려고 하겠는가? 그럴 수 없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롬 6:15, 17-18 “ 15 그런즉 어찌하리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오 그럴 수 없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 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사탄은 우리가 은혜의 삶을 살지 못하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방해합니다. 사탄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기를 원합니다. 사탄은 아주 교묘하게 접근하여 속삭입니다. 네가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면 그분의 모든 계명을 지키도록 애쓰라고 촉구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속지 마십시오. 옳은 말처럼 들리지만 옳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고 그분이 나를 통해 사실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분 안에 거할 때 그분을 향한 사랑으로 인해 의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그분 안에 거할 때 그분은 말씀도 행하실 수 있게 하십니다. 그분 안에 거할 때 그분의 힘으로 능히 이기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입니다. 어떤 국가든지 형법을 보면 자녀를 돌보는 부모의 책임에 대한 법률이 있습니다. 부모라도 이 법을 지키지 않으면 자녀를 빼앗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부모들은 이 법률을 읽지 않는다고 해서 자녀를 빼앗길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법률을 지키려고 애쓰지 안 해도 부모의 자녀에 대한 사랑이 자연스럽게 그 법을 지키면서 살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면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분의 법을 지킬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것도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을 영화롭게 할 때 은혜는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할 뿐만 아니라 더욱 거룩한 삶을 살 수 있게 합니다. 우리의 옛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제 예수님께 초점을 맞추십시오. 예수님이 나를 통해 사신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거룩한 삶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주님의 법도 이루게 됩니다. 내 힘으로 율법을 주님의 말씀을 지키려고 애쓰지 마십시오. 도리어 주님 안에 거하십시오. 주님의 은혜에 강하십시오. 예수님의 사랑 안에 거하겠다고 결단하십시오. 그리고 이제 세상 밖으로 나가 예수님이 우리를 통해 나타나도록 순복 하십시오.. 이것이 은혜의 삶이요. 자유의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