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 행 20:31-35
2. 명제: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됩니다.
3. 제목: 주는 자의 복
바울 사도는 약 3년간의 에베소 교회 개척 사명을 마치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쫓아 당시 세계 최고의 도시인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하신 바울 사도의 마지막 고별 설교의 일부입니다. 24“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에서 보는 것처럼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 오직 주와 그 복음을 위해서 달려왔습니다. 앞에 놓여 있는 로마로 가는 길은 자신의 마지막 생명을 거는 위험한 길임을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 어림 풋이 짐작을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위험이 오더라도 피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하면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그 부탁하는 말씀 가운데 35절에서 바울 사도는 “ 범사에 너희에게 모본을 보였노니 곧 이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의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이것은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것이라고 강 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난 시대의 설교자들은 산상수훈의 팔복에 이어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는 주님의 말씀을 아홉 번째 복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이 말씀은 받는 것의 가치를 부인하신 것은 아닙니다. 받는 것도 귀한 축복입니다. 사랑을 받은 자만이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 받지 못한 자는 주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받는 것과 주는 것을 비교할 때 우리가 받고 소유하는 소유의 가치보다는 주는 것의 가치가 훨씬 더 소중한 것입니다. 그래서 주께서 “ 주는 것은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고 말씀합니다.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됩니다. 왜 주는 자의 삶이 복됩니까?
1. 주는 삶은 하나님의 성품에 동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품은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까지 우리 인생을 위해 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롬 8: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것이 우리 인생임을 아십니까? 우리의 모든 은사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약 1: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 바울 사도는 고후 8: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원래 부유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의 만물을 주관하시는 만물의 주인이십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우리 인생에게 내어 주셨습니다. 우리를 부유케 하기 위해서 주님은 스스로 가난을 취하셨습니다. 그분은 진실로 부유한 분이셨습니다. 예수님이야 말로 줄 수 있었기 때문에 진실로 부유하신 분이십니다. 많이 가진 자가 부자가 아니라 줄 수 있는 자가 진정 부자라는 것입니다. 주는 삶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사람이기에 복된 것입니다. 주는 것을 배우지 못한 인간의 불행을 신랄하게 꾸짖는 메시지가 담긴 실버스타인의 주는 나무라는 책의 이야깁니다. 한 나무가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자기에게 늘 놀러 와서 쉬고 있는 한 소년을 위해서 계속해서 무엇인가 축복을 제공했습니다. 나뭇잎을 주기도 하고 열매를 주기도 하고 놀이터를 제공하기도 하고 휴식을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나무도 행복했고 소년도 행복했습니다. 그러나 소년은 커 가면서 좀 더 다른 것을 요구하기 시작합니다. 어느 날 소년은 나무에게 와서 자기가 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생각하다가 자기는 돈이 없으니까 자기가 만든 열매를 시장에 내다 팔면 돈이 되지 않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얼마 후에 소년은 다시 찾아왔습니다. 자기가 바다 여행을 위해서는 배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나무는 생각하다가 그러면 자기를 베어가라고 말합니다. 그래도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월이 흘렀습니다. 얼마동안 소식이 없었던 이 소년은 늙은 소년이 되어서 다시 그 나무 곁으로 옵니다. 그러나 나무는 늙은 소년이 된 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것을 별로 갖지 못했습니다. 나무는 슬펐습니다. 늙은 소년은 이제 피곤해졌다고 말합니다. 아직도 자기에게는 나무 밑동이 남아 있으므로 자기 곁에 걸터앉으라고 말합니다. 늙은 소년은 그 나무 밑동에 걸터앉았습니다. 나무는 행복했습니다. 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가는 소년의 행복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습니다. 소년은 주는 것의 행복을 배우지 못한 인간의 어리석은 불행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주는 것을 배울 때 우리가 하나님의 성품을 닮은 것이 됩니다. 그해서 주는 자가 복된 것입니다.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됩니다. 왜 주는 자의 삶이 복됩니까?
2. 주는 삶은 믿음의 진실성을 반영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는 크게 두 가지 종류의 사람으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과 불신자입니다. 믿는 사람은 나의 주인은 예수님이시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불신자는 자신이 주인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은 어디에서 그 차이를 찾을 수가 있을까요? 믿는 자는 주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합니다. 불신자는 모으는 것에만 기쁨을 두는 사람입니다. 주는 것은 내 모든 것의 주권은 주님이시다 라는 믿음의 고백에서 나옵니다. 십일조의 기원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고백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잡혀간 조카 롯을 구출하고 많은 전리품을 얻어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이때 창 17장에 보면 하나님의 종 멜기세덱이 그를 축복했습니다. 천지의 주재시오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했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창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 십일조 정신은 내 모든 축복은 주님이 주심을 믿는 신앙 고백의 표현인 것입니다. 내 모든 것은 주님의 것입니다. 이 믿음이 십일조 정신입니다. 내 모든 소유의 주재 권은 주님이시다.라는. 것을 믿는 믿음의 진실성의 증거인 것입니다. 여러분이여! 천국과 지옥의 차이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어떤 분이 꿈에 천국과 지옥을 구경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천국이나 지옥에 가보니 밥을 먹는 식탁에서 두 사람씩 마주 보고 밥을 먹는데 수저와 젓가락이 매우 길더라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긴 숟가락을 가지고 밥을 떠서 모두가 먼저 자기 입으로만 넣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숟가락이 너무 길어서 밥을 먹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지옥에서는 밥이 앞에 있어도 먹지 못하고 고통스러워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천국에 가보니 긴 숟가락으로 밥을 떠서 앞사람에게 먼저 떠먹여 주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다들 기쁨으로 즐겁게 먹더라는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곳이 지옥입니다. 부자 되기만을 소원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는 어리석은 짓입니다. 어떤 부자가 있었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노력해서 가을에 큰 수확을 올렸습니다. 창고에 양식이 가득 찼습니다. 그 부자는 그 모습을 보고 흡족했습니다. 이제 평생 떵떵거리면 살게 되었다고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날 밤 그 사람을 만든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자 가자라고 그 영혼을 데려갔습니다. 주님이 데려가면서 그 많이 쌍아 놓았던 그 재물은 뉘 것이 되겠느냐고 반문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이렇게 말합니다. 눅 12:21“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주는 삶은 하늘나라 은행에 예금해 두는 것과 같습니다. 쌓아 두기만 하는 곳에는 언제 도둑이 와서 빼앗아 갈지 모릅니다. 사고가 나서 또는 몸이 병들이 다 날아 가버리는 수도 있습니다. 주는 삶은 내 모든 것은 주님이시다.라는. 믿음의 진실성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복된 것입니다. 주는 자는 받는 자보다 복됩니다. 왜 주는 자의 삶이 복됩니까?
3. 주는 삶은 복의 근원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으로 부르셨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전 세 세상을 구원하는 복의 근원으로 불렀습니다. 창 12:2-3 “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다.라는. 말이 바로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라는. 말씀입니다. 복의 근원이란 복의 통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흘러 보내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축복의 도구라는 뜻입니다. 주는 삶은 복의 근원이 되기 때문에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무엇을 주어야 할까요? 많은 것이 있겠지만 복음 즉 예수님을 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복중의 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이 땅에 주님의 몸인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교회의 머리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예수 믿은 천국 백성들은 주님의 몸을 이루는 지체들입니다. 각 지체들은 각자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가지고 믿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때 각 지체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충성입니다. 성경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고 말씀합니다. 충성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믿음과 책임감입니다. 봉사는 나는 복의 근원이다.라는. 믿음으로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는 삶이 복되도다.라는. 것은 바울 자신의 말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이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서 믿음으로 내 은사를 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 생활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고 내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의 말씀이니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충성심에는 책임감이 요구됩니다.. 책임감이란 주인의식입니다. 주님의 나라 건설은 내 책임입니다. 나를 통해서 주님의 축복을 흘러 보내어 주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것은 내 책임이다.라는. 이 믿음이 충성입니다. 이런 각 지체들의 주는 봉사의 삶이 모여 하나님의 뜻이 교회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는 삶은 강한 자를 통해 약한 자를 세우는 것이기도 합니다. 35절에 “ 바울 사도는 범사에 여러분에게 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을 돕고 ”그래서 주님은 많이 받은 자에게 많은 것을 요구할 것이며 적게 받은 자에게는 적은 것을 요구하십니다. 일반 은총 가운데서도 주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룹니다. “ KAIST에 가난 때문에 못 이룬 내 학업에의 꿈을 이뤄주길 바랍니다 ”라는 한 농장 대표가 자신이 평생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을 KAIST에 기부키로 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화제의 주인공은 김병호(68) 서전농원(경기도 용인시) 대표입니다. 김 대표는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자신의 논밭 등 부동산 300300억 원 상당의 사재를 KAIST 발전기금으로 기부키로 약정했습니다. 김 대표는 “ 처음 기부 의사를 밝혔을 때 아내가 나를 자랑스러워하며 적극적으로 격려해줬다 ”면서 “ 아들도 매달 일정금액을 유니세프에 후원금으로 기부하고 있다 ””라고 밝혔습니다. 이어 그는 ’’ 버는 것은 기술, 쓰는 것은 예술’이라는 말을 가장 좋아한다. 한다면서 “ 17살에 76원을 들고 상경해 남들이 다 사 먹는 사카린 음료수조차 사 먹지 못했지만 후학을 위해 쓰는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다 ”라고 덧붙였다 고합니다. 이런 복의 근원들을 통해서 이 세상은 발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탄절이 오면 동방 박사에 대해 자주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그들이 세 명이라고 알고 있지만 전설에 따르면 네 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함께 출발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자신의 가방에 의약품을 가득 집어넣었습니다. 사막을 지나다가 어떤 병자를 만났습니다. 그는 거의 죽기 직전에 있었습니다. 네 번째 박사는 그를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쉽게 나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며칠을 씨름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네 번째 박사는 세 박사에게 먼저 길을 출발하라고 말합니다. 며칠을 씨름하니까 열이 사그라지면서 이 환자는 소생하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의약품을 사용했습니다. 그에게 양식을 나누어 주기도 했습니다. 여러 날이 지나자 아무래도 친구인 동방 박사를 따라 잡기가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탄생한 메시야를 만날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그는 주저앉아 이런 슬픈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나는 당신이 이 땅에 오신 그 놀라운 모습을 함께 축하할 수가 없습니다. 그가 이 기도를 끝냈을 때 갑자기 자기가 치료하고 섬기고 있던 그 사람이 메시아의 모습으로 그 앞에 다가와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가 바로 구주 예수님이었습니다. 성경은 마 25:45에서 예수님은 이름 모를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이 바로 나에게 한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주는 것이 왜 복됩니까? 바로 그것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주는 자의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딤 후 4:7“ 경건에 이르도록 너 자신을 연단하라 ”경건은 연습함으로써 더 발전합니다. 경건한 삶과 습관을 연습하십시오. 작은 것에서부터 내 재물의 소유권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으로 먼저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는 것을 습관화하십시오.. 시간의 소유권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으로 주일 성수를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습관화하십시오. 주일 성수는 내 모든 시간은 주님의 것이다.라는. 고백으로 사사로운 개인의 일보다 먼저 주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일날에는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심방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일에 주님의 시간을 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습관화하십시오.. 내 은사의 소유권자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으로 한 가지 이상 은사를 가지고 봉사함으로써 주는 삶의 경건을 습관화하십시오.. 그럴 때 진정드리기를 잘하는 복된 인생이 될 것입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웨슬레 목사님은 늘 성도들에게 이런 부탁을 했다고 합니다. 소처럼 부지런 하십시오. 그리고 개미처럼 모으십시오. 그리고 천사처럼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사용하십시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