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8:15
2. 명제: 양자의 영을 받은 자는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짖는다.
3. 제목: 우리가 양자라는 의식
1. 갈등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더 이상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즉시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게 되는 양자의 영을 받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게 되는 적극적인 축복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증거는 첫째 성령께서 친히 우리로 아빠 아버지로 부르짖게 하는 양자라는 지식을 깨닫게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서 그것을 깨닫게 하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우리 자신이 나를 스스로 설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느낌의 문제입니다. 이것은 논리의 차원보다 훨씬 높은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를 보여주십니다. 이 증거의 본질은 철저하게 주관적이고 성령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것을 ‘ 양자의 영 ’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느끼는 것이지 사실을 믿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듭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졌다는 것입니다. 양자의 개념은 법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분과 위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당시 로마 사람들은 이 개념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만일 당시 한 사람을 자기 가정의 양자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그는 반드시 법적인 문서를 통해서 그 절차를 받아 밟아야 됩니다. 그 신분 이양이 법적으로 이행되어 양자로 받아들인 사람은 자기가 진정한 자녀의 위치를 가지고 있음을 알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는 당시 로마 사람들의 용어를 사용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2. 갈등 심화
사도는 우리가 새로운 성품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우리는 진리 안에서 진실로 양자로 말미암아 하나님 가정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사도의 강조는 우리는 그것을 교리로 믿을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으로 받아 들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을 느껴야 하고 그것을 의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양자의 영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 4:6절“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여기서 사도는 ‘ 성령 ’이라고 말하지 아니하고 “ 그 아들의 영 ”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와 비교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입니다. 요 17:23절“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자기 제자들을 그렇게 대접해 주실 것을 바라는 중보 기도입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이신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한 것처럼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 양자의 영이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 옆에 우리를 두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함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히 2장에서도 동일한 내용이 나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 2:11-13절” 히 2:11 거룩하게 하시는 이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한 근원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히 2:12 이르시되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 하셨으며 히 2:13 또 다시또다시 내가 그를 의지하리라 하시고 또다시 볼지어다 나와 및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자녀라 하셨으니 “ 그런 다음 14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형제입니다. 주님은 스스로 우리의 형제가 되셨습니다. 롬 8:29절”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은 많은 형제들 중에 맏아들이십니다. 우리가 구원 받은 축복 중에 가장 놀라운 사실은 우리가 ’ 하나님의 자녀 ‘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의 가족의 일원이 되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 형제들 ‘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계신 성령 곧 양자의 영은 ’ 하나님 자신의 영 ‘입니다. 우리 주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느끼는 것을 모든 신자들도 느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에 주신 것은 ’ 하나님의 아들의 영 ‘이며 ’ 양자의 영 ‘입니다. 우리 주님은 유일한 독생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양자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가 양자로 받아들여질 때 주님이 중보자로서의 위치에서 가졌던 아들 됨의 느낌을 우리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셨듯이 우리도 역시 하나님 아버지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요 우리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합니다. 또한 ’ 양자의 영 ‘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느낌의 문제임을 강조합니다. 우리는 진실로 그것을 알고 느낍니다. 물론 느낌의 정도는 사람마다 차이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다면 이 느낌이 어느 정도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사실로 믿어야 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그것을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반응에 대한 하나의 정의입니다. 요한은 요일 4: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우리가 의식해야 할 사실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우리를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그 축복을 깨닫고 우리의 반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 반응은 우리의 느낌과 주관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있는 양자의 영이 어떻게 스스로 드러내 보이는가를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자녀로서 가진 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성경을 읽을 때와 말씀을 들을 때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통해서 일어납니다. 양자의 영이 말하는 의미는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 우리의 마음을 촉발시키고 마음을 감동시키며 심정을 따뜻하게 합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부모가 자기를 사랑하는 것을 깨닫고 감동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 성경을 믿고 마음으로 기뻐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어떤 효능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설교를 단순히 지적인 입장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서만 머물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듣고 있는 진리 앞에 그 진리가 여러분에게 인격적으로 와 닿고 여러분을 감동시키고 있다면 그 반응은 얼마나 다르겠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을 흐느끼게 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을 감동시킬 수도 있습니다. 어째서 입니까? 그것이 진리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단순히 지적인 차원에서 머문다면 아무런 감동은 없습니다. 이 사실이 나를 감동 시킨다면 나는 그 진리로 인하여 기뻐하며 겸손해지며 감사하며 감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에 대해서 우리 안에서 가진 하나의 보편적인 느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식이라는 어떤 느낌을 소유하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이상입니다. 이것은 모든 성령의 역사를 받고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 양자의 영 ‘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을 기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단순히 믿을 뿐만 아니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을 기뻐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합니다. 그는 하나님을 갈망하고 영원토록 그를 더 깊이 알기를 원합니다. 그는 성경을 읽고 들을 때 이것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조용히 묵상 기도할 때도 이것을 의식합니다. 그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의식하며 안식과 평안을 느끼며 또한 아버지의 보호 가운데서 아무것도 자신을 해치지 못함을 느낍니다. 그는 아버지의 ’ 영원하신 팔 ‘아래에 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체험적인 의미에서 이 모든 것을 느낍니다. 그는 안식과 화평 속에 평안과 진정한 기쁨을 느낍니다. 사도는 여기서 특별히 안식과 기쁨의 감정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로 부르짖느니라. “ 여기서 ’ 양자의 영 ‘은 우리로 하여금 ’ 아빠 아버지로 부르짖게‘하는 어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 전환
“ 아빠 아버지 ”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람어인 아바 즉 우리말로 아빠는 주님이 땅에 계실 때 팔레스타인 지역에 통용되는 말입니다. 또 “ 아버지 ”는 헬라어에서 나온 말입니다. 사도는 아람어와 헬라어를 병행하여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은 유대인의 아버지일 뿐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방인들의 아버지라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민족의 사람이든지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만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여기 ‘ 아빠 ’라는 말은 특별히 어린 아이가 자기 아버지를 부를 때 사용하는 친근한 용어입니다. 어린 아이가 아버지를 흔히 ‘ 아빠 ’라고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유대인 가운데 있는 노예들은 이러한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구별이 엄격히 지켜졌습니다. 다만 자유인들의 자녀만이 ‘ 아버지 ’라는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허락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이 용어를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더 이상 노예들이 아니며 “ 두려워하는 종의 영 ”을 가지고 있지 않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노예의 관계를 끊어버리고 이제 ’ 아빠 ‘라는 칭호를 사용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두려워하는 종의 영 아래에 있지 않습니다. 막 14:36절” 이르시되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주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 아빠 아버지여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직전 가장 고뇌의 순간에 사용한 용어입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면서 “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양자로 받아들여졌음을 깨닫는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부르짖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 그를 통해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게 됩니다. 이 말은 큰 소리로 부르짖는 부르짖음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 부르짖느니라 ‘ ’ 아빠 ‘ ’ 아버지 ‘라는 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분에 대해 말하고 있는 표현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적인 앎이 아니라 교리적으로 믿는다는 말이 아니라 지적인 동조는 하나님 자녀가 아닌 자에게도 가능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지식적 믿음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을 더 이상 멀리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럴 때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가졌을 때는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두려워하는 종의 영에서 해방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증거가 하나님이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엡 2장에서 그는 우리와 가까이 계신 하나님입니다. 13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누구에게 가까워졌습니까? 하나님은 더 이상 멀리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는 하늘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자녀와 가까이 계신 분이십니다.
4. 대단원
동시에 이 용어는 자녀가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방식으로 말하는 가를 알려 줍니다. 그는 형식적인 방식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이고 형식적인 냉 냉한 방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예배는 ’ 아름답고 ‘ ’ 품위 있는 예배 ‘라는 것은 없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의 어린아이로 보고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품위가 없습니다. ’ 아빠 ‘라는 말에는 품위가 없습니다. 품위보다 오히려 친근감입니다. 영적인 예배를 상실할수록 그 예배가 더 형식적이고 품위 있게 변모한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의 의식적인 요소를 강조할수록 영성이 저하된다는 증거가 기독교 역사가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하여 살아 있는 체험을 하게 될 때 그들은 형식을 더 적게 의지하게 됩니다. 이것은 로마 가톨릭에서도 발견됩니다. 은혜와 구원에 관한 복음적인 체험을 한 사람일수록 형식에 덜 관심을 가졌습니다. 파스칼이 그랬습니다. 그 이유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의 신앙이 형식화 될 때 영성이 점점 빈약해지는 것입니다. ’ 양자의 영 ‘을 가진 사람은 형식적이고 기계적이고 냉 냉한 방식으로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의 기도나 예배는 자발적입니다. 아버지를 보고 ’ 아빠 ‘라고 말하는 어린 아이의 자발성입니다. 그 어린 아이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것을 분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어린 아이는 ’ 아빠 ’가 자기 아버지인 것을 압니다. 다 자란 사람은 멀리 뒤로 물러가서 점잖을 빼며 매우 형식적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 아이는 뛰어들고 아버지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집니다. 그는 아무도 가지지 않는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논리와 이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은 본능이며 확신입니다. 파스칼은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 마음은 이유를 가지고 있지만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확신과 더불어 따스함과 애정과 즐거움과 행복이 있습니다. ” 양자의 영을 받았음으로 아빠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 여러분은 아버지 앞에 있는 자녀로서 바로 이 말씀 속에서 따스함과 즐거움을 듣고 느낍니까? 위기의 순간에 못된 자가 쫓아옵니다. 어린 아이는 소리칩니다. ” 아빠!“병이 들고 사고를 당할 때 그 어린아이는 아버지를 부르짖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 부르짖음 ”입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고뇌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를 지셔야만 했습니다.. 주님은 깊은 곳에서 “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빠 아버지로 부르짖느니라. ”는 말의 의미입니다. 이것은 조금도 “ 경건함과 두려움 “의 의미를 감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그의 아버지의 거룩하심과 전능하심을 압니다. 두 가지 요소가 완벽히 공존할 수 있습니다. ”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자 “와 ”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니라 “는 두 말씀에서 나타나는 요소들입니다. 양자의 영이 그렇게 합니다. 이것은 내 자신을 설득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자녀들만이 ”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짖으며 자녀만이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신합니다. 요 14:6절”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사람이 이성으로서 창조주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는 ” 아버지 하나님 ““께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은 결코 양자의 영을 보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영을 보내실 때 여러분의 깊은 곳에서 ”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짖게 됩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행동과 문제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실패의 원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영광스러운 진리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입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를 지옥에 가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만이 아닙니다.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은 양자 즉 자녀의 특권을 누리며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의 후사 즉 상속자가 되는 것입니다. 최고의 축복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아는 것 또한 ‘ 아빠 아버지 ’로 부르짖는 것이 최고의 축복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복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 구원 받았다 “는 것으로 만족해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인생의 여러 문제 에서 벗어나기만을 소원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 아빠 아버지 “라고 부르짖는 것은 어떤 것보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증거 하는 가장 영광스럽고 높은 증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