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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의 소망(수정본)

wordlove 2021. 3. 18. 05:45

1. 본문: 12:11-12

2. 명제: 그리스도인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한다.

3. 제목: 부르심의 소망

 

그리스도인은 게으르지 말고 심령에 있어 열심을 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을 깨우쳐야 하며 성령의 불길이 항상 타오르도록 하라고 말합니다. 이어 그리스도인들이 나태에 빠지지 말아야 할 궁극적인 해법을 제시합니다. 그 세 번째 요소는 주를 섬기라입니다. 주를 섬기라이 말은 게으르지 않기 위한 다른 모든 것의 열쇠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섬김의 의미와 어떻게 섬길 수 있을까요?

 

첫 번째 원리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종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 된 바울,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바울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도는 자신을 평생 예수의 종이라고 정의합니다. 예수의 피 값으로 산바 되었습니다. 구속 받았고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는 어느 것도 받을 만한 자격이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가운데 자신이 복음의 사역자가 되었다는 사실에 너무나 놀랐다고 말합니다. 그는 딤 전 1:13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이것이 바울 사도의 태도입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평생 종으로 생각했습니다. 종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어느 것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오직 자신의 상전을 위해서 행합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생각할 아무런 권한이 없습니다. 이처럼 우리도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내 교회에 대해 말합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범하기 쉬운 죄가 이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태도와 싸워야 합니다. 내 교회라는 생각을 불식시켜야 합니다. 이러한 개념은 교단 주의적 정신에도 있습니다. 내 교단. 내 교파 모든 유의 다툼과 갈등과 분쟁의 원인은 교회를 마치 자기 것인 냥 생각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교회들이 서로 경쟁합니다. 선교사를 파송하는 대도 경쟁을 합니다. 자신들이 선교사를 파송했다고 이름을 놓고 서로 경쟁을 합니다. 이러한 일의 동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기적이고 순전히 개인적인 것입니다. 초대 교회가 핍박을 받았을 때 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그들은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자신들을 대적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은 교회를 대적하고 있었습니다. 교회가 하나님의 교회였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사람들은 잊고 있습니다. 교회는 온전히 주님의 것이지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교회를 핍박하는 자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주를 섬기라고 말합니다. 교회의 모든 것이 다 주님께 속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우리를 진실로 사로잡아 우리를 열심 내게 하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참여하는 특권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항상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자들임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와 같은 사람들을 택하시어 역사하시기를 결정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예를 주셨습니다. 바울은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신 이 신비로운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몸의 지체가 되었다는 것을 아는 것보다 더 영예로운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며 그리스도의 위대한 일의 어떤 부분을 함께 나누게 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만큼 큰 영예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종입니다. 이것을 알 때 게으를 수가 없습니다. 아멘!

 

두 번째 원리는 우리는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하신 일을 생각해 보십시오. 또 하나님께서 어떤 분인지 숙고해 보십시오. 그런 다음에 하나님께서는 나로부터 최고의 것을 받으실 만한 자격이 있으신 분임을 생각해 보십시오. 왜냐하면 우리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지불하신 그 희생을 되돌아보기 때문입니다. 진센돌프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그린 그림을 바라보았을 때 마치 그 그림이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고 간증했습니다. 내가 너를 위해서 그 일을 했다. 너는 나를 위해 무얼 하였느냐?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식하면 모든 게으름과 나태함을 불식시키고 모든 무기력을 건성으로 하는 일을 불식시킬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시고 우리를 위해서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그 자신을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보답하는 양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보여 주기 위해서 주님을 섬기기를 원합니다. 또 하나님의 명예가 이 모든 일에서 수반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강력한 동기가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교회의 지체에 속하고 그분께 연합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몸의 지체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생활 활동 교회에 일어나는 모든 일에 다 관계하십니다. 고전 6:19-20“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고전 6:20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개인으로 행동할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떼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소속되어 있습니다. 여러분은 교회의 일부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이 관계하시고 여러분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하나님께서 수반되시는 것입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우리는 항상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합니다. 교인이 어떤 사건에 연루되면 신문은 그것을 대서특필합니다. 어째서 입니까? 그리스도와 그의 명예를 공격하는 방식이 그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수반되어 계십니다. 그의 이름과 그의 대의가 우리를 통해서 나쁜 평판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교회를 연약하고 경멸할 어떤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교회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게으르고 세상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더 이상 게으를 수 없습니다. 내 행동이 나에게만 영향을 줄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또한 진리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자신을 깨우쳐야 하고 성령께서 내 삶 속에 자유롭게 역사할 수 있도록 해 드려야 합니다. 주님도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우리 자신에게 우리가 주님을 섬기고 있는 것이지 우리 자신을 섬기고 있지 않음을 상기시킴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구약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실패의 요인을 알려 주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자기들이 누구인지를 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여러 민족 중에 한 민족 정도로만 보았습니다. 사실은 그들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임을 상기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 그래서 하나님의 명예가 자기가 행하는 모든 일에 수반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했습니다. 또한 우리는 주님을 섬기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항상 우리를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상전이 자기의 하는 일을 돌아보면 그는 매우 열심히 일합니다. 아주 민첩하게 열광적으로 일합니다. 그러나 주인이 밖에 나가버리면 그는 게을러집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이 항상 그 모든 것을 보십니다. 히 4:13“ 지으신 것이 하나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앞에 만물이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렇다. 나는 지금 그 같은 느낌이 없다. 그러니 내가 오늘 이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나는 주일날 교회도 가지 않겠다. 성경을 읽지 않겠다. 라고 말할 수 있죠. 그것이 순전히 개인적인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주님이 그 모든 것을 보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라 지금도 교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모든 것을 감찰하시는 분의 눈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의 대장 되신 분의 눈 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최종적인 원리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일깨워야 하고 게으르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님이 보실 때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자신도 서야 할 것을 알았습니다. 자기가 행한 모든 일을 그분 앞에 고백해야 합니다. 우리는 곧 그리스도의 보좌 앞에 설 것이며 여러분 자신에 대해 직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을 듣게 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에 있을 때 세상이 어떤 상태라는 것을 보았는가? 그 세상의 불경건함과 사악함과 만연된 악을 보았다. 너희는 그것에 대해서 무엇을 말하였는가? 중보기도 했는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 ”우리 모두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직고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상전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에게 우리의 계산서를 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든 방면에서 주님을 섬기고 있음을 항상 상기시켜야 합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여러분이 하는 모든 일에서 자신이 주님의 종임을 인식하여 지금 주님을 섬기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십시오. 이어서 바울이 우리에게 말하는 요점은 이것입니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이 모든 것을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앞에서 우리는 주님 앞에 서는 날 주님의 보좌 앞에 서는 날에 대해 상기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5장까지 돌아보면 우리는 이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5:1-2”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5: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8장에서는 이 주제를 더욱 분명하게 선포하고 있습니다.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사도는 여기서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라고 말할 때 우리로 하여금 미소 띤 얼굴을 가진 자라고 단순하게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낙천적인 기질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라는 말도 아닙니다. 또 세상이 훨씬 지금보다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낙천적인 이상주의를 가지라는 말도 아닙니다. 바울이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는 말속에는 소망 에 대한 위대한 교리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라는 것은 우리는 세상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져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을 악한 세상이라고 정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구원받은 사람이요 이 악한 세대로부터 건짐 받은 사람들 입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습니다. 망할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악하고 죄악 적이고 그릇된 세상입니다. 성경은 더 나아가 말하기를 이 세대는 결코 소망이 없다고 말합니다. 전혀 없습니다. 결코 이 세상은 개선될 수 없습니다. 인간의 이상주의적 인간주의적인 모든 사상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19세기 사람들은 낙관주의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지식과 과학의 진보로 세상은 선한 세상이 될 것이라는 꿈을 꾸었습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12차 대전을 통해 그 꿈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옳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21세기 인간은 또 헛된 꿈을 꾸고 있습니다. 120세까지 살게 될 것이라고 들떠있습니다. 비록 그런 세상이 와도 거듭 말하지만 이 세상은 정죄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은 개선될 가망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이 세상은 더 악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한 바른 관점을 가질 때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인식하게 될 것입니다. 왜 주님이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오셔서 죽으시고 그 모든 일을 왜 하셨습니까? 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구원 방식은 점진적인 개선의 방식이 아니라 현세대에서 사람들을 불러 모아 그 세대에서 구원받게 하되 개인적으로 그 세대에서 건짐 받게 하고 그 모든 자들로 이 새로운 나라로 영입되게 하는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나라의 형태로 존재했고 신약 시대에는 교회의 형태로 존재합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현재 형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그곳으로 모입니다. 이 불러내심은 어떤 정해진 시점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돌아오실 것이고 그의 오심은 눈에 보이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가 오셔서 세상을 의로 판단할 것입니다. 또한 원수들을 멸하실 것입니다. 그런 다음 영광의 영원한 주님의 나라를 세우실 것입니다. 사도는 여기에서 바로 그 소망 안에서 즐거워하라 항상 여러분의 시선을 바로 그 소망에 고정시켜야 합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바로 그 안에서 즐거워해야 합니다. 세상을 바로 보십시오.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무엇인지를 인식해야 합니다. 초대 교인들은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들 앞에 놓여 있는 이 소망 때문이었습니다. 그 소망 때문에 순교 당하더러도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영광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일 3:3”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세상은 우리를 알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취함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마지막 구절이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는 말로 끝마치고 있습니다. 그것만이 우리를 위한 유일한 소망입니다. 우리가 항상 고대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토록 그분의 영광에 함께 참여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게으름과 나태와 건성으로 살려는 것과 냉소주의와 불신앙과 두려움을 벗어나게 하는 해독제들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하십시오.. 우리의 대장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을 항상 주목하십시오. 그분이 무엇을 하셨고 무엇을 하고 계시고 앞으로 어떠한 일을 하실 것인지를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결코 나태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