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14:5-6
2. 명제: 중립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데 있어서 피해야 할 것은 극단적인 태도이다.
3. 제목: 안식일과 주의 날
1. 갈등
중립적인 문제를 다루면서 바울 사도는 고기 먹은 예를 통해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5절에서 두 번째 예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5절“ 어떤 사람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두 예에는 어떤 상관 관계가 있을까요? 날과 절기를 지키는 것과 관련해서 보편적으로 그런 절기에 무엇을 먹어야 할지를 지시하는 의식적 가르침이 레위기에 나와 있습니다. 이런 특별한 날에는 어떤 특별한 음식을 못 먹게 했습니다. 사도는 “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라고 말할 때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첫 번째 문제는 그가 쓰고 있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에 대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의도는 안식일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의식법과 구별된 도덕법의 일부입니다. 도덕법 특히 십계명은 어느 때나 지켜야 하는 계명입니다. 그러나 의식 법은 구약 시대의 유대인에게만 해당된 것입니다. 의식 법은 주님이 오심으로 완성되었습니다. 그러나 도덕법은 영구적으로 지켜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도덕법을 지키는 문제로 결코 토론해서는 안 됩니다. 그 법은 순종할 법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도덕법의 일부이므로 여기서 다루는 문제가 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두 번째 문제가 있습니다. 안식을 어느 날로 지켜야 하는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는지에 관한 것입니다.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켜야 하는지 주간의 첫날을 안식일로 지켜야 합니까? 행 20:7 ” 그 주간의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 바울이 이튿날 떠나고자 하여 그들에게 강론할 새 말을 밤중까지 계속하매 “초대 교회 교인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우리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상기하되 제7일에7 그리하지 않고 첫째 날에 그리하였음을 시사하는 증거입니다. 고전 16:1-2” 고전 16:1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 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고전 16:2 매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수입에 따라 모아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 “계시록에도 그런 증거가 있습니다. 계 1:9-10” 계 1:9 나 요한은 너희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였음으로 말미암아 밧모라 하는 섬에 있었더니 계 1:10 주의 날에 내가 성령에 감동되어 내 뒤에서 나는 나팔 소리 같은 큰 음성을 들으니 “다른 말로 해서 사도 요한에게 주어진 계시가 주의 날 주간의 첫날에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1세기부터 33세기까지 어떤 그리스도인은 제7일을 지켰고 어떤 이들은 첫째 날을 지켜나갔습니다. 제 7일 안식일 교인들은 첫날로 변한 것은 4세기의 교황이 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역사적으로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어찌되었던 주간의 첫째 날로 지키는 것을 교황이 의무조항으로 만들었고 4세기에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가 그렇게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일이 시작된 것은 아니고 그 관습을 규례 화 시킨 것에 불과합니다.. 처음 3세기 기간 동안에는 이 문제에 관해서 자유로웠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함께 모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유대인 출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변화를 수용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해서 그리스도인들이 주간의 첫날에 안식을 지키는 것을 어떤 초자연적인 조명 또는 어떤 인도하심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 경우가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 변화는 정말 온전히 자연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첫날은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은 날 가운데 다시 살아나신 날입니다. 첫 창조 때 제7일은7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마치고 쉬셨습니다. 지금은 우리 주님께서 말하자면 새로운 창조 사역을 마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 새 창조 ’를 하셨습니다. 그의 부활하심은 새 창조를 마치신 것을 보여주는 표증이었습니다. 그러니 주간의 첫날 우리 주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그 날이야 말로 처음 창조의 제7일에7 부응하는 날입니다. 이러한 변화가 초대 교회에 의해서 즉시 이루어졌고 그 때문에 첫째 날을 지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고 생각됩니다. 로마 교회에 이런 문제로 갈등이 있었다는 증거들을 볼 수 없습니다. 실제로 로마 교회는 둘 다 허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여기서 언제 안식일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서 다루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사실은 교회가 이런 문제로 나뉘어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이런 문제로 나뉘어졌습니다. 제 7제7일 안식일 교회가 그것입니다.. 그들은 침례교인으로만 있는 것은 충분치 못하다고 생각하여 제7일7 안식일 침례교단을 만든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논점은 이런 문제로 교회를 분열시키는 것은 롬 14장의 가르침을 범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씀드립니다. 사도는 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나 어느 날을 안식일로 지켜야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 계명이 우리에게 하라고 지시하는 바는 주간의 어떤 날을 한 거룩한 날로 지키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친히 일곱째 날에서 첫째 날로 바꾸는 일을 정하셨다고 생각할 이유가 있다 해도 중요한 요점은 그 날을 지키는 데 있습니다. 일곱째 날을 지키거나 첫째 날을 지키거나 심각한 죄는 아닙니다.
2. 갈등 심화
그러나 심각한 죄는 이 문제에 대한 어떤 한 사람의 관점을 시금석 삼아 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니 아닌지 하는 여부를 판가름하는 일입니다. 여기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한 가지 원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극단적 안식일주의로 부릅니다. 일곱째 날이든 첫째 날이든 안식일을 지키는 일에 있어서 성경이 가르치는 것보다 더 나아가 극단에 치우친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바리새인들을 질책한 이유입니다. 너무 지나치게 엄격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안식일을 지킬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흔히 안식일을 그리스도인들의 어깨에 메인 짐과 멍에로 만들었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영국 웨일즈 장로교인들은 누구든지 주일에 거리를 산책하면 권징 당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14세기에 아빌론의 한 감독은 주일에 몇 야드만 걸어도 큰 죄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세의 가톨릭 교인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원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제정된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자신을 드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가 따로 떼어 놓은 날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 양편이 다 오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문제를 지나치게 크게 만들고 또 어떤 사람들은 너무 약화시킵니다. 어떤 이들은 안식일을 정말 무거운 짐으로 만들어 난제가 되고 말았습니다. 안식일은 그런 날이 되게 하기 위해 만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돕도록 주어진 것입니다. 안식일은 우리의 영혼의 상태를 숙고할 기회를 주고 예배와 찬양 속에서 함께 만날 기회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여러분에게 하나의 법의 문제나 고통의 원천이 된다면 우리 주님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바울 사도의 가르침도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친 극단이 있습니다. 주일날에 사사로운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도 좋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한다면 주님께 드려야 할 시간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 쓰고 있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3. 전환
그렇다면 여기에서 사도가 안식일을 생각하지 않고 있다면 무엇을 생각하고 있겠습니까? 갈 4장과 골 2장이 이 문제에 대해 상당한 빛을 던져 줍니다. 갈 4: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 골 2: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유대인들은 스스로 많은 안식일을 만들었습니다. 레위기와 민수기를 읽어 보면 의식 법에서 거룩한 날을 절기 명절로 지키도록 어떤 특별한 날들과 기간이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러나 수세기에 걸쳐 유대인들은 스스로 또 다른 날들을 첨가 시켰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사월의 금식 칠월의 금식 등이 언제 들어왔는지 찾아보십시오. 그 금식 날들은 의식법의 한 부분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역사 속에서 일어나 사건들 여러 계승들 전투에서의 승리 등등 때문에 또 다른 날을 정했고 금식일로 정했습니다. 사도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의식 법은 잠정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규례도 폐해졌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떤 특별한 명절이 올 때 사람들이 그 절기 이전 날을 준비하기 위한 날로 정했습니다. 그래서 문자 그대로 그들의 입장에서 안식일 ’ 날들 ‘을 정한 것입니다. 매주 일곱째 날뿐 아니라 그들 자신들이 들어온 다른 거룩한 날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명절이나 절기를 지키는 것을 더 효과 있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사도가 “ 혹은 이 날을 저 날보다 낫게 여기고 ”라고 말할 때 다루고 있는 문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날들은 유대인의 삶의 한 부분이 되어 왔습니다. 동시에 이교의 신비주의 신봉자들도 유사한 방식의 지키는 날들을 정하여 지켜왔습니다. ’ 거룩한 날들 ‘을 특별하게 정하여 기념하는 것은 오늘 날에도 있습니다. 어떤 교파에서는 성자들의 날을 지키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식하는 날들이 교회 안에서 지정된 일도 자주 있습니다. 금요일에는 고기를 먹지 않는 날도 정해서 지키고 있습니다. 성탄절 부활 주일을 지키는 것도 포함할 수 있습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날 중 한 날도 지키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볼 때 이러한 날들은 로마 가톨릭의 한 부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미사와의 완전한 단절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확실하고 일관성을 갖기 위해 “ 크리스마스(이 단어는 그리스도 미사라는 말임) ”와 관계를 끊었습니다. 성경에는 이러한 날들을 지키는 것에 관한 규례가 없는 것이 분명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날들과 절기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또 그런 것들을 별 중요성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문제를 다룰 때 분명한 관점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은 크리스마스를 지키는 것을 믿습니까? 종교적인 의미에서 말입니다. 부활 주일에 대해서는 어떠합니까? 청교도들이 옳습니까? 그들이 그릇되었습니까? 이 날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도는 이 문제를 다룰 때 고기를 먹거나 채소를 먹는 문제를 다룰 때와 똑같은 방식으로 계속 다루어 나간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도의 원칙은 위험은 항상 이런 문제들로 극단적으로 나가는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날들이 본질적이기 때문에 그날들을 지키지 않으면 죄를 짓는 것이라고 느낍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극단에 치우쳐서 그날들을 지키는 것을 거의 죄악으로 여깁니다. 크리스마스라는 날은 인간이 만든 날입니다. 그 날에는 특별한 것이 없으며 주님의 탄생의 정확한 날짜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부활주일도 마찬가집니다. 우리는 이 날이 본질적인 것이라고 말하거나 특별한 날로 구분하지 말고 이런 날을 이용해서 복음을 전할 기회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탄생이나 십자가에 못 박히심 또는 부활하심은 특별히 상기시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날을 이용해서 덕을 세우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날들을 숭배하다시피 하여 본질적인 것으로 삼는 사람들이나 그러한 것들을 과격하게 반대하면서 이러한 날을 지키는 것을 거부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어떤 공로가 더 축척된다고 생각하는 자들 모두가 다 잘못입니다. 둘 다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그 원칙이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첫째로 그는 우리에게 “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중요합니다. 사도는 “ 혹은 이 날을 저 날 보다 낫게 여기고 ”라고 말합니다. “ 낫게 여기다 ”라는 말은 그 말을 판단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 어떤 날들 절기나 금식 일들 안식일이나 특별한 날로 간주합니다. 그런 다음에 “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니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어떤 사람은 모든 날을 성경적인 지각을 가지고 판단해 보고 이 특별한 날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에 이른다는 뜻입니다. 이 사람들은 고기를 먹을 자유를 가진 사람들에 부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자기 믿음을 구체적으로 적용했습니다. 또 복음에 대한 이해를 가지고 이 특별한 규례들은 이제 끝나버린 의식법의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어떤 날이 다른 날보다 더 특별하다고 말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물론 안식일은 예외입니다.
4 대단원
바울은 자신의 의견을 우리에게 제시하지 않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단순하게 “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고만 말합니다. 이것이 바울의 원칙입니다. 우리도 바울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이런 문제들에 대하여 기계적으로 또는 무지하게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선고하는 위치에서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생각 없이 행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우리의 행동에 대한 이유들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마다 ’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 ‘해야 합니다. 자기들의 양식을 갖고 자기를 방어하거나 싸우려고 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대지 못합니다. 바울을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 나는 이것을 믿습니다.” 라고만 말하는 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각 그리스도인마다 ’’ 자기 마음에 충분히 확신해야 ’합니다. 성경의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숙고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듣고 읽고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 각자 자기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도록 하라 “ 이것을 바울 사도가 강조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우리 각자는 항상 우리 자신의 양심에 복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양심에 ‘ 온전히 확신한다. ’는 것은 항상 자기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고 그 양심을 결코 거스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 양심은 교육과 조명을 받을 필요가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양심도 그릇될 수 있습니다. 양심이 온전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양심이 성경으로 계속 교육 받아야 합니다. 또한 더 약한 형제도 가르침에 개방적이야 합니다. 만일 약한 형제가 ” 이 날을 계속 지킬 것입니다. “라고 고집합니다. ” 당신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나는 그것을 믿습니다. “라고 공언하고 그렇게 한다면 그는 사도의 가르침을 거스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고집쟁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고집부리는 것은 항상 나쁩니다. 그것은 보편적으로 두려움의 정신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런 태도를 정죄합니다. 바로 그런 것에서 분열과 싸움이 일어납니다. 성경을 통해서 자신이 그릇되었다는 것이 자신에게 분명히 입증되기까지는 자기 양심을 따라 행동하십시오. 선한 양심을 따라서 이 특별한 날들은 지키는 사람도 계속 그 일을 해야겠죠. 채소만 먹는 사람에 대해서도 같이 그 사람을 정죄하지 말고 참으십시오. 사도의 첫 번째 원칙은 자신이 어째서 이렇게 행동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하되 그 이유들을 성경을 가지고 보여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의 의무입니다. 여러분은 게으른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만들어진 자신의 견해와 전통을 들고 나오지 마십시오. 마치 계속적으로 나아가는 기차 같이 해서는 안 됩니다. 여러분은 거듭났고 총명을 가지고 있고 성령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 마음으로 온전하게 확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