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일 1:3
2. 명제: 인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다.
3. 제목: 그리스도만을 통한 회복
세상이 돌아가는 것에 대해 관심을 가진 사람은 다음과 같은 질문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도대체 이 세상이 왜 이런 모습일까? 무슨 문제가 이렇게도 많은가? 그러나 바로 이런 시점이 우리 그리스도인이 복음을 선포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문제투성이의 삶의 현장에 있는 사람에게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말씀 즉 복음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대해 놀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요일 5: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죄와 타락의 결과로써 이 세상의 삶에 근본적인 악이 있다는 것과 이러한 악이 있는 한 이 세상에서 우리가 현재 경험하는 것 이상의 다른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소망처럼 보이지만 소망이 아닌 것을 바라보면서 흥분하거나 이 세상을 바라보면서 빈정거리거나 하는 일에 말려들지 않아야 합니다. 19세기 사람들은 곧 지상에 낙원이 올 것이라고 낙관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1차 2차 대전을 겪으면서 염세주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아예 이 세상에 관심을 갖지 않고 사는 사람이 있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그저 케세라 세라의 인생을 살자라는 분류도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왜 이 세상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그 이유를 명쾌하게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복음은 현재의 모든 문제가 사람이 하나님을 거슬러 반역한 사실에 기인한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근본 이유를 압니다. 다른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표면적 이유일 뿐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인간이 어리석게도 하나님을 대항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완벽한 낙원 에덴동산에서 살 수 있도록 허락받았던 인간 조상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께 순종해야 된다는 사실에 오히려 모욕감을 느꼈습니다. 이런 불순종의 생각과 행위가 오늘날 모든 문제를 초래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반역 행위는 두려움을 창출했고 이 두려움은 서로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빼앗고 싸우는 상황으로 이끌어 갔습니다. 그 후 태어난 자녀들은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는 등 슬픔과 안타까움이 유전자처럼 이어졌습니다. 따라서 인간이 참으로 행복을 누리려면 하나님과의 연합된 삶을 누리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이 하고 싶은 대로 계획하고 조직할 수 있지만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한 모든 것이 쓸모가 없으며 결국 후회하는 인생이 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 주께서 주를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니 우리의 영혼은 주님 안에 있는 안식을 찾기까지는 언제나 쉬지 못할 것이다 ”라는 고백이 이것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해 이 세상이 이렇게 되었으며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습니까? 성경은 분명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악한 권세 아래에 살고 있는 이 세상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악한 일들과 갈등과 분쟁과 전쟁뿐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낙심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사실대로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경은 현실적입니다. 하지만 그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 이런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입니다. 대답은 간단합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합니다. 앞에서 말했듯이 인간이 가진 모든 문제의 원인은 하나님을 대항해 반역하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맺어왔고 더 이상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교제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문제이며 하나님과 인간이 바른 교제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우리 안에서 쉼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인생이 하나님을 알기 전까지는 항상 무엇인가 부족한 것을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개인이나 국가나 온갖 갈등과 분쟁과 전쟁이 새긴 것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이나 개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말씀하는 핵심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르게 맺을 때까지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참된 연합을 이룰 수가 없습니다. 엡 2:11-22에서 바울 사도는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리키며 ” 너희가 하나가 되었다 “라고 말하면서 그렇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 전에 멀리 있었던 너희가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다 “개인과 개인 나라와 나라가 서로 싸우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라는 것입니다. 결국 사람과 사람이 화목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하나님과 화목하는 길뿐입니다. 우리 인생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분과 교제하기 위해서 돌아오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 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는 내용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은 ”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영원한 것들의 본질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그분이 오셔서 하신 모든 일을 근거로 할 때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교제는 “ 하나님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의 교제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위대한 메시지는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가 그분의 아들이시고 우리의 주님이시며 구원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으며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과 화평을 가질 수 있을까요? 사도 요한은 이 질문에 답은 오직 예수 그리스에 근거해서만 가능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실 수 있는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습니다. 참된 사귐이 있기 전에 전제되어야 할 몇 가지 요소들이 무엇입니까?
먼저 당사자 간에 장애나 장벽이 없어야 합니다.
피차간에 사귐의 동기에서나 상호 간에 신뢰할 것인지에 대해 의심이나 불신이 있다면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또 한 유감이나 원한이 있다면 어느 한쪽이 상처를 입었을 때는 상호 간에 사귐은 불가능합니다. 교제는 모든 장벽과 장애 요소 모든 의심이나 서로 간에 불확실한 것들이 제거되기를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교제가 있기 전에 우선 되어야 할 내용입니다. 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까? 성경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큰 장벽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 커다란 장벽이란 바로 죄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죄의 본질은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입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들어왔습니다. 사람이 하나님 얼굴을 뵙기 전에 죄악의 구름이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와서 머물러 있었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머물러 있는데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에 그 죄를 반드시 심판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범하면 반드시 징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물론 그 징벌이란 다름 아닌 육적 죽음과 영적 죽음인 것입니다. 영적 죽음이란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기는 것입니다. 인간은 죄를 지었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장벽이 놓이게 된 것입니다.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사람의 죄로 인해 장벽이 생기자 죄의식에 사로잡힌 인간은 하나님은 불공평하시다는 감정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말 안 듣는 아이는 부모를 싫어하듯이 죄의식은 이런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죄의식은 자신을 정당화시키며 오히려 상대방을 비난합니다. 죄의식 가운데 있는 삶은 하나님을 불공평하고 합당하지 않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이 금지하는 법을 주시지 말았어야 했고 또한 그러한 법을 어긴 것에 대한 징벌도 없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죄는 하나님을 불의하다고 오해합니다. 이것이 마귀가 심어 놓은 죄의 결과입니다. 이렇게 우리 인간과 하나님 간에 놓인 잘못된 불신 때문에 하나님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와 신뢰가 없으면 하나님과 사람 간에 놓여 있는 장벽은 언제까지나 남아 있게 마련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 인생에게 요한 사도는 ” 여러분에게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결과로 하나님과 연합할 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우리가 상상했던 바로 그 사귐이 회복되었습니다 “어떻게 회복되었다는 것입니까? 예수 님은 십자가를 통해 죄라는 방해 요소를 해결하셨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 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으심이 선포되고 전파될 것이며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인생은 십자가를 떠나서는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분이시기에 죄에 대한 징벌을 말라고 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은 죄인은 벌을 받아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과 말씀은 절대적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결코 그 징벌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가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무한한 순종과 십자가 죽음을 통해 자신의 거룩한 생명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과 저의 죄악을 징벌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의 죄악이 씻어졌고 아울러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가로막았던 죄의 장벽은 제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죄 없으신 독생자의 머리 위에 드러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받으심으로 장벽이 제거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만족 되었습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으로 징계를 거두어 주신 참으로 놀라우신 사랑의 하나님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죄 없이 돌아가신 예수 님을 바로 보게 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 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불신의 장벽도 제거되고 친밀한 사귐의 관계도 회복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원한과 적의의 감정은 사라지고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참된 사귐을 위한 두 번째 요소는 동일화 즉 근본적으로 같아지는 것입니다. 이웃 사이에 사귐이 어려운 사람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과 유사한 부분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취미나 흥미에서 별로 공통부분이 없으며 근본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과 사귐을 갖고 연합된 관계를 유지하려면 비슷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후 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예수 믿는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과 함께 섞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원리는 하나님과의 교제에도 적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 알기 전에 하나님과 진정한 의미의 교제를 가지기 위해서는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성경은 사람이 하나님의 속성을 소유하기 전에는 하나님을 결코 알 수 없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지에 대해 베드로가 벧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나타났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과 참된 교제를 나누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해야 하고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 모든 것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단지 용서의 교리에만 머물러서는 안 됩니다. 물론 감사하는 것은 예수 님을 통해서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생명 새로운 성품을 유업으로 받기 전에는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는 “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예수 믿는 우리는 성령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났으며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우리는 바울 사도가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이라고 한 것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요? 성령님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사귐을 위한 세 번째 조건은 그리스도가 본을 보여 주신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해야 합니다. 사랑에는 의심이 있을 수 없으며 온전한 이해와 신뢰와 믿음만이 있을 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로서의 하나님을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철학적 견해를 가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없이는 하나님과의 교제는 불가능합니다. 이 사랑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며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진정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는 독생자 되시는 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보기 전까지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을 살리시기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의 교제가 없기 때문에 인생이 이렇게 불행해졌다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불행한 세상에 살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의 하나님과의 연합으로 되돌아갈 수만 있으면 우리의 죄는 사함 받을 수 있으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할 수 있으며 하나님을 향한 사랑을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십자가라는 고난을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의지하여 이겼습니다. 히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예수 믿는 우리의 삶에도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때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할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사는 모든 세상에 악한 자 안에 있다 할지라도 그리고 내 앞에 수많은 십자가가 놓여 있다 하더라도 나를 사랑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힘입어 소망 가운데 우리는 웃을 수 있고 온전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님을 믿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과의 교제의 선물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어진 이런 선물을 소유하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