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일 1:7
2. 명제: 우리 신앙의 중심이신 그 아들 예수는 역사며 사실에 기초한 분이시다.
3. 제목: 그 아들 예수
갈등
설교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설교입니다. 7절 말씀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피’라는 위대하고 중요한 주제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요한 일서를 기록한 이유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위해 기록한 것입니다. 교회에서 조차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으로부터 멀어지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반복적으로 계속해서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면 진정한 가르침은 있을 수 없습니다. 기독교 진리는 하나의 관념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적인 제안이 아닙니다. 또 한 고상한 도덕적 가르침도 아닙니다. 사회생활에 관한 원리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은 기독교 진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그분에 대해 분명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좋은 소식도 없고 복음도 없을 것이며 기뻐할 것도 없을 것이며 소망도 없을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어두운 세계에서 살면서 이 세상 사람보다 좀 더 괜찮은 삶을 누린다고 스스로 자위하는 어리석은 자들인 것입니다. 기독교는 기분이나 정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의 메시지에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해야만 하며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들에 대해 분명하게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전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것의 중심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진리는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첫 세 구절도 그리스도로부터 시작합니다. 요일 1:1-3“ 요일 1:1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요일 1:2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 요일 1:3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이 전하고자 하는 모든 말씀은 하나님과 사귐과 연합을 가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는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사귐을 줄 수 있게 해 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딤전 2: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본질적 연결점이고 하나님과의 교제에서 유일한 길이라면 우리가 그분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미 초대 교회 당시에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잘못된 인성에 대한 가르침을 교정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자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잘못된 이단 교리를 교정하고 있습니다. 요한 일서를 읽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에 관한 교리가 언제나 교회 안에 큰 문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예수 님의 인성에 대해 명확하지 않으면 우리의 믿음은 아무것도 아닐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7절 말씀이 그리스도에 관한 모든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우리의 믿음은 예수 님에 관계하고 있습니다. 그분을 고려할 때 우리는 즉시 역사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헬라철학자들은 ‘관념’에 대해 말을 했습니다. 과념은 사색과 관계를 갖고 있습니다. 이들의 영향으로 기독교도 사색과 관련된 관념으로 생각하는 오류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런 잘못을 본문은 교정하고 있습니다. ‘그 아들 예수’에 대해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에서 대단히 귀한 것으로 역사적 사실과 사건들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바로 예수라는 이름 자체가 이 중요한 사실을 상기시켜주고 있습니다. ‘예수 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났으며 말구유에 누워 계셨습니다. 예수 님은 실제 하는 아이로서 이 땅에 태어났습니다. 어린 소년 예수 님은 성전에서 논쟁을 하였습니다. 역사와 사실이라는 영역에서 젊은 예수 님은 목수로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3년간의 공생애 기간이 있었습니다. 역사상 가장 놀라운 3년간의 기간이었습니다. 이 기간 중에 팔레스타인 지방의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설교하셨고 가르쳤고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 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 가운데 몸부림치면서 기도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심과 땅에 장사됨과 부활해 승천하신 것 등 우리가 사람이신 예수 님에 대해 아는 모든 것이 사실에 기인한 것입니다. 그것은 사실이며 실제 있었던 일이었습니다. 바로 이 사실에 대해 우리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서 우리의 믿음을 부정할 때 우리가 줄 수 있는 답변은 “ 당신이 좋게 생각하는 대로 말하라. 하지만 나는 어떤 것인가를 경험했고 느끼고 있다고 ”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답변은 역사입니다. 구유에 누워셨던 예수 그 역사적 사실로 답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경험은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믿음의 실재에 대해 궁극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가 가진 경험을 감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더욱 감사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경험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경험과 느낌은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하는 것입니다. 쉽게 변화는 것이 경험이요 느낌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경험 느낌 이상에 기초합니다. 바울 사도가 고전 15장에서 예수 님이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예수 믿는 우리는 가장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 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사실에 기초한 우리의 믿음은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우며 복된 것입니다. 역사 가운데로 들어오셨든 예수 님 역사적 믿음을 소유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며 사실에 근거를 둔 복음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요일 1장 첫 세 구절이 제시하는 첫 번째 내용입니다.
3. 전환
이어서 성육신의 경이로움에 대해 이야기해 봅시다. 성육신이란 하나님이 인간이 되시기 위해서 오신 사건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의미를 살펴봅시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있었습니다. 성전에 있던 12살 소년이 예루살렘에서 모든 행사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부모와 함께 동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꾸지람을 들었습니다. 이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입니다. 그는 외관상으로 보면 다른 모든 사람과 같았습니다. 그분은 목공소에서 매일 일하는 목수였습니다. 하지만 본질 적으로 사람과는 다른분이었습니다. 그를 나사렛 목수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그분을 ‘그 아들 예수’라고 부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대면하는 예수 님의 인성이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것입니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성육신의 실제성을 확증시켜줍니다. 요한 사도는 여기에서 주님의 인성에 대해 잘못 가르치는 이단에 대한 주장을 바로 교정합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환영 혹은 유령 같은 것을 걸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육신의 형태를 가진 가면이나 망토를 걸치고 나타난 것이 성육신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말합니다. 예수 님은 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었으며 하나님이 현현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성육신하신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 님이 제자들에게 눅 24:39“ 내 손과 발을 보고 나인 줄 알라 또 나를 만져 보라 영은 살과 뼈가 없으되 너희 보는 바와 같이 나는 있느니라. ”에서 주님은 영은 살과 뼈가 없으돼 라고 하셨습니다. 영은 피가 없다, 하지만 말씀은 그 아들 예수의 피라고 했습니다. 성육신은 실제이며 사실입니다. 초대교회에 이단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진짜로 육신을 입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 하나님이 이 땅에서 죄된 육신을 갖춘 사람으로서 계실 수 있었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아들이 이 땅에 내려오셔서 사람과 비슷한 환영을 취하신 것이지 사실상 인간이 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그 아들 예수’라고 말하면서 그들의 주장을 부인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참된 성육신을 의미하는 것이지 단순한 현현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님이 진짜 사람이었다고 말합니다. 구유에 누워있던 아기 예수를 믿는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가 인간 예수에게 들어갔다는 주장입니다. 그들은 동정녀 탄생 같은 것은 없으며 하나님이 실제로 동정녀의 자궁으로부터 태어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단지 예수가 세례받을 때 영원하신 그리스도가 예수에게 들어가 삼 년 동안 그 안에서 일하시다가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으실 때 그리스도는 다시 나오셨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은 돌아가신 적이 없으며 죽은 자는 인간 예수일 뿐이다 ‘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이단 사상이 초대 교회에 있었습니다. 이단의 역사는 복음의 역사와 동등합니다. 이런 이단에 대해 요한 사도는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 아들 예수의 피’라고 증거 합니다. 인간의 피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소나 염소의 피도 역시 죄를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은 이 땅에서 태어나시고 자신을 거스른 죄인들의 반박을 참으시며 십자가에서 죽음을 당하신 하나님의 아들뿐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그분의 피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 피만이 우리를 사면해 줄 수 있고 용서해 줄 수 있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해 주실 수 있으며 하늘의 문을 열고 우리로 하여금 들어가게 하실 수 있습니다. 이 피는 사실이며 진짜이며 그저 환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진리는 예수 님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과 같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분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심지어 죽으실 때도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며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신 피도 하나님의 아들의 피입니다. 이 구절은 성육신의 교리를 분명하고 완벽하게 설명해 줍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죽기 위해서 베들레헴에서 예수로 태어났습니다. 그분은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우리는 성육신을 죽음이라는 범위를 벗어나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그분은 죽음만이 우리를 살릴 수 있는 것임을 알고 계셨기 때문에 죽으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육신의 교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아들 예수의 피“에 대해 생각할 때 우리는 예수의 피 외에 다른 어느 것도 우리에게 구원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족장들과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분은 위대한 사람을 일으켜 그들에게 복을 주셨지만 참된 구원은 없었습니다. 가장 훌륭했던 사람들도 구원을 얻지 못했습니다. 아무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지 못했습니다. 롬 3:19, 23” 롬 3:19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롬 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모든 인간이 모든 노력을 기울여도 충분하지 못했습니다. 사람이 구원받고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과 완전한 제사의 희생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닌 사람 이상의 어떤 자가 있어야 했습니다. 그는 완전하고 흠 없고 온전한 자라야 했습니다.. 본질상 그분은 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인간의 인성을 취했으며 죄 없으신 인성 가운데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리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이 만족하셨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희생과 제사가 완전했기 때문입니다. 죄인의 희생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 아들 예수이 피‘를 통해 하나님이 용서하시고 사면해 주셨습니다. 성육신의 목적은 죽으심과 속죄이며 화목과 부활이었습니다.
4. 대단원
마지막으로 성육신의 사역으로까지 갈 수 있었던 사랑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분이셨습니까? 그분을 통해서 만물이 지음 받았고 그분이 바로 아버지 품속에 계신 말씀 자체이시며 이 말씀은 창조로부터 계신 하나님이시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모든 신적 특권을 누릴 수 있는 영원하신 아들이 아니십니까? 그분이 구유에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누워 계셨던 것입니다. 왜 그러했습니까? 우리를 구원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즉 주님의 겸손입니다. 얼마나 놀라운 겸손입니까? 성경을 보십시오. 모욕과 멸시를 학대와 질시와 미움과 악독과 채찍 아래 고통을 겪으시는 그분을 바라보십시오. 거룩한 어깨에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계신 예수 님을 바로 보십시오.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 바로 ‘그 아들 예수님’이 아닙니까? 왜 그분이 이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입니까? 바로 여러분과 저를 속죄하시기 위함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님을 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고통 중에 계신 그분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그 모습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왜 그분이 이 같은 어려움을 겪어야만 하십니까? 왜 그분이 죽어서야만 했습니까? 왜 그분이 무덤에 묻히기까지 고통을 겪어서야만 했습니까? 무엇이 이런 일을 하게 하셨습니까? 여기에 오직 한 가지 답이 있습니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아들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그분은 굴욕과 고난과 죄인들의 항거와 고통과 부끄러움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며 영원한 영광중에 하나님과 함께 지낼 수 있게 하기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그 모든 것을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베푸시고자 지극히 낮은 곳으로까지 낮추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입니까?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 그 아들 예수의 피. 십자가 이것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영원하신 사랑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여러분과 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 하나님을 사랑을 믿고 의지하십시오. 그리고 감사 찬양드리십시다..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사랑을 거절하다가 어떻게 주님을 만날 수가 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