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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의 탕 자"수정본"

wordlove 2021. 6. 15. 06:07

1. 본문 눅: 15:25-32

2. 명제: 아버지의 마음을 모르는 것이 탕 자이다.

3. 제목: 집안의 탕 자

 

1. 갈등

지난주일 이야기가 기억납니까? 아버지의 재산을 억지로 미리 받아 집 나갔던 둘째 아들이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결국 거지 신세가 되어 아버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무 조건적으로 아들을 용서하며 받아주었습니다. 아버지의 크신 사랑 앞에 둘째 아들은 진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기뻐서 살진 송아지를 잡아 이웃 동네 사람들을 초청하여 돌아온 아들을 위해 축하 잔치를 벌였습니다. 얼씨구나, 좋다! 절씨구나 좋다! 아버지는 신이 나서 평소 잘 잡수시지 못하시던 반주도 몇 잔 했습니다. 모인 모든 식구들 동네 사람들도 아버지가 기뻐하니 다들 좋아하며 아들의 귀환을 진정으로 축하했습니다. 해가 서쪽으로 기우는 저녁 무렵 큰아들이 밭에서 하루 일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옵니다. 피곤한 발걸음으로 집 가까이 다가오자 큰아들의 귀에 딩카 딩카 풍악 소리가 들립니다. 이 큰아들은 아침 일찍 밭에 나가 열심히 땀을 흘려 일하는 성실한 사람으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한눈팔지 않고 아버지 곁에서 순종 잘하는 효자 중의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집 나간 동생이 돌아왔다는 소식과 아버지가 돌아온 동생을 위해서 큰 잔치를 벌이고 있다는 소리를 종으로부터 듣는 순간 큰아들의 입술이 파르르 풀잎처럼 떨리며 얼굴이 갑자기 울 거락 불거 락 핏빛으로 변하더니 분노의 폭풍이 잔치집에 벼락 떨어지듯 강타했습니다. 도대체 잔치라니! 아버지가 돌았나! 잔치라니 그 더러운 놈을 위해 잔치를 베풀다니 아버지가 실성을 한 모양이야! 큰아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분노의 함성이 즐겁던 그 잔치집을 적막강산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집 나간 동생이 왔다면 당연히 뛰어들어와서 동생을 기쁘게 맞이해야 되는 것이 형님의 자세가 아닙니까? 그리고 아버지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효자 아들은 더 반겨야 마땅하지 않습니까? 그 성실하며 좋은 아들의 모습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뛰어나와 설득을 시킵니다. 하지만 큰아들은 막무가내로 화를 내면서 평소 그렇게 순종 잘하던 큰아들의 입에서 아버지에 대한 불만이 폭포수처럼 터져 나옵니다.

 

2. 갈등 심화

왜 큰아들은 동생의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마련된 그 잔치 집에 들어오기를 거부하며 아버지에게 불만을 쏳아냈을까요?? 큰아들은 자신은 동생과는 전혀 다른 매우 성실한 사람이며 아버지의 좋은 아들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외형상으로 보면 그 평가가 틀린 것이 아닙니다. 성실하고 말썽 부리지 않고 아버지 말에 고분고분했던 정말 효자였습니다. 학교에서도 늘 우등상과 모범상을 독차지했던 모범생이었습니다. 큰아들은 이런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자부심이 지나쳐 큰아들은 자신을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는 교만까지 생겼습니다. 동시에 평소 말은 안 했지만 아버지께 불만이 많았음이 드러났습니다. 자신은 한 번도 아버지 명을 어기질 안 했고 종처럼 섬겼는데 자기 한 데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신 적이 없으면서 창기와 함께 아버지 재산 다 날려버린 당신의 아들을 위해서는 살진 송아지를 잡다니 왜 사람 차별하느냐고 불만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큰아들은 아버지는 사랑이 없는 인색한 분으로 매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아버지의 은혜에 힘입어 사랑으로 기쁨으로 아버지를 섬겼다기보다는 종처럼 의무감으로 억지로, 아니 재산 때문에 섬겼음을 은연중에 드러내었습니다. 아버지의 크신 사랑을 잘 모르며 아버지와의 인격적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음을 보게 됩니다, 또 이 큰아들의 말속에는 동생이 돌아와서 자기 재산에 손실이 일어나지 않을까? 라는 염려가 깔려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릅니다. 이미 동생에게 유산을 나누 줄 때 아버지는 장자 몫으로 2/3을 이미 주었기 때문입니다. 큰아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임에 분명합니다. 또 아버지에게 자기 동생을 당신의 아들로 지칭합니다. 내 동생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아버지를 아주 모욕하는 표현입니다. 그 시대 관습으로는 이 큰아들도 곤장을 벌로서 수십 대 맞아야 마땅한 불량한 자식입니다. 둘째 아들이 집 나갈 때 아버지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것과 자기 동생을 아버지 아들이라고 막말을 하는 것과는 무슨 차이가 납니까? 큰아들는 자기 동생에 대한 사랑이 전혀 없음이 백일하에 드러났습니다. 창기와 같이 아버지 재산을 다 날려버린 당신의 아들이라는 표현 속에는 동생에 대한 심한 적개심이 담겨 있습니다. 물론 자신은 아버지의 착한 아들이라는 자기 의가 깔려있습니다. 그러나 집 나갔던 둘째 아들도 아버지 마음을 몰랐고 집안의 큰아들도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점에서 둘 다 아버지 앞에서 탕 자였습니다. 아버지 앞에서 죄인이었습니다. 평소 조용하고 성실한 사람이 성질내면 더 큰 일이 벌어지는 경우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3. 전환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예수님의 이야기 가운에 큰아들은 도대체 누구를 가리킬까요? 아버지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는데 동생과 형님 다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탕 자였습니다. 동생은 집 나간 탕 자였고. 형님은 집안의 탕 자였습니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집 나간 탕 자는 즉 이 동생은 유대인 외의 모든 세상 사람들 성경에서는 이것을 이방인이라고 부릅니다. 즉 우리들을 두고하는 말합니다. 우리들은 하나님 아버지 집을 떠나 내 마음대로 내가 주인처럼 살았던 죄인들이었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부름 심을 받아 아버지 집으로 돌아와 예수 믿어 모든 죄를 다 용서받아 하나님 아버지의 친아들과 딸이 되었습니다. 집안의 탕 자인 큰아들은 유대인을 가리키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유대인 가운데서도 특별히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자부하고 있었던 경건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가리킵니다. 유대인은 일찍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아 하나님을 잘 아는 축복을 누린 백성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일찍부터 섬긴 백성들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이들은 자신들만이 거룩한 하나님의 좋은 자식들이요. 자기 외에 이방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는 지옥의 땔감들이라고 무시하며 결코 교제조차 하지 안 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은혜는 망각하고 자신들의 의를 신뢰하면 자랑하는 교만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자기들도 죄인임을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마치 집안의 형님이 집 나갔다가 돌아온 자기 동생을 더러운 놈이라고 무시한 것처럼 세상 모든 사람들을 그렇게 정죄하면서 살았습니다. 151-3절을 보면 “ 15:1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15:3.15:3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 예수님 곁으로 세상에서 소위 죄인이라고 손가락질을 당하든 많은 세리들과 죄인들이 모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다 받아주셨습니다. 무 조건적으로 용서하셨고 용납하셨습니다. 그러자 아주 경건하게 산다고 자부하고 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처신에 대해 매우 큰 불만을 품었습니다. 죄인들을 저주하고 책망해야지 죄인들을 받아주시다니 예수는 참 하나님이 보내신 분이 아닌 모양이야 의심하면서 노골적으로 예수님을 죄인들의 친구라고 비아냥거리며 자신들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을 믿지 아니하고 배척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탕 자 비유의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신들은 하나님 앞에 잘 믿는다고 착각하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이 이야기 가운데 큰아들을 가리킵니다. 집안에 있었던 큰아들도 알고 보니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탕 자에 불과하다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집 나간 동생도 아버지 마음을 아프게 하는 탕 자였다면 아버지 집에서 성실하게 효도하는 것처럼 보였던 큰아들도 실상은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탕 자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고 회개하여 아버지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참 아들로 살도록 돕고자 하시는 주님의 크신 사랑이 깔려있었던 것입니다. 부모 곁을 떠나 멀리 살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식도 불효자식이라면 같은 지붕 밑에서 살면서 부모 마음 아프게 하는 자식도 똑같이 불효자식입니다. 부모와의 물리적 거리가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마음을 모르는 자식이 탕 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예수님의 말씀은 교회 밖에서만 죄인이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도 큰아들과 같은 죄인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랫동안 성실히 교회 생활을 하며 교회 직분도 받아 열심히 봉사하면서도 이 큰아들처럼 즉 바리새인처럼 여전히 자기 의를 믿고 하나님의 은혜임을 망각한 체 자기 공로를 자랑하면서 이웃들을 무시하며 살고 있다면 그 교인이 바로 집안의 탕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집안의 탕 자인 큰아들에게도 아버지는 여전히 사랑의 두 손을 벌리고 계심을 잊지 마십시오. 아버지는 일찍부터 이 큰아들의 마음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아버지 옆에서 좋은 아들처럼 폼을 잡지만 진정한 아버지의 사랑은 모르고 자기 의를 자랑하며 몸은 돈 때문에 아버지 곁에 있지만 마음은 동생처럼 아버지 마음에서 멀리 떠난 아들의 마음을 이미 다 아시고 계셨습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의 마음을 다 아시고 계십니다. 그러나 책망 대신 아버지 마음에 못질을 하는 큰아들에게도 31야 라고 부릅니다. 이 말씀은 내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큰아들도 내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아버지는 집 나갔다가 돌아온 탕 자도 진정한 아들로 받아주셨고 자기 가까이 곁에 있었던 집안의 탕 자인 큰아들도 내 아들로 삼아 주셨습니다. 아버지의 무 조건적인 사랑 때문에 이 두 아들이 다 아버지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큰아들에게도 말은 안 하셨지만 진정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세요! 아버지 옆에 있었지만 아버지 마음도 모르고 아버지 사랑하시는 동생을 미워했던 죄인이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앞으로는 아버지 마음 잘 헤아려 동생과 잘지내겠습니다. ‘라는 진정한 회개와 다짐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과연 큰아들이 진정한 회개를 하였을까요?

 

4. 대단원

흥미로운 점은 집 나갔다가 돌아온 둘째 아들은 진정 회개하여 그 후 정말 아버지 마음을 알고 아버지 마음을 헤아려 위해 사는 좋은 효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열 손가락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 없듯이 부모에게는 모든 자식이 다 사랑스럽습니다. 저의 모친이 소천하시기 직전 유언처럼 하신 말씀도 동생하고 잘 지내라고 당부했습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예수 안 믿고 죄 가운데 살고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잃어버린 아들딸입니다. 아버지는 자식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때 제일 기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모르는 것이 탕 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오늘도 잃어버린 자신의 자식들이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고 계십니다. 아니 우시고 계십니다. 저는 우리 어르신네들에게 단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수년 내로 다 이 세상을 떠나실 것인데 여러분이 늦게나마 하나님 아버지 앞에 돌아와서 예수 믿어 죄 용서함 받아 하나님 아버지 아들딸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품 안에서 영생을 누리며 사셔야 안 되겠습니까? 이것은 나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소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마음을 기쁘시게 해드리시기 위해서 여러분을 섬깁니다. 주변에 아직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다 영적인 내 믿음의 형님, 동생으로 생각하시고 사랑으로 이끌어 주십시오. 아버지 앞으로 돌아오도록 애쓰십시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가 기뻐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