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전 6:9-11
명제: 복음만이 인간을 살리는 유일한 희망입니다.
3. 제목: 하나뿐인 희망
갈등
성경은 오래된 것으로 시대에 뒤진 책이므로 현재의 삶과는 무관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안다면 성경만큼 항상 현재 적이고 항상 새로우며 그 시대를 정확히 말하는 것이 없음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에 나오는 세 구절을 주목하십시오. 이 단락은 바로 지금 기록된 것처럼 바로 이 순간에 필요한 말씀을 남기고 있습니다. 성경은 인간의 책이 아니며, 인간의 이론이니 사상을 담아 놓은 책이 아닙니다. 성경은 인간과 이 세상에서의 인간의 삶에 관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교회의 일은 성경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의 메시지를 설명하고 해설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본문에서 " 알지 못하느냐? "라고 묻습니다. 성경에 따르면 우리가 이 세상에서 겪는 모든 문제는 한 가지 근본적인 원인은 기본적이며 근본적인 진리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것도 바로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8:37절 “ 내가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그분은 하나님에 대해, 인간에 대해, 구원의 길에 대해 가르치러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성경이 뜬구름이며, 비현실적이라고 말합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멋진 동화를 들려주거나 좋은 정서를 심어 주거나 우리 모두가 천국에 가서 행복하게 살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여러분의 모든 것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성경은 두 가지 중요한 질문을 다룹니다. 성경은 " 이것이 생명이다! " 라고 말합니다. 신문은 삶의 근본적인 문제를 모릅니다. 신문은 인간과 사회, 국가에 대한 진리를 계시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성경만이 인간과 사회, 국가에 대한 진리를 계시합니다. 성경은 거짓 없이 아주 거친 방법으로 우리 앞에 사실을 제시한 다음 두 가지 문제를 다룹니다. 첫째, 성경은 왜 세상이 지금과 같은지 말합니다. 성경은 세상이 지금과 같은 원인을 제시하고 설명합니다. 둘째, 감사하게도 성경은 세상이 바로 설 수 있는 유일한 길을 말해줍니다. 이것이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모든 성경의 메시지입니다.
2. 갈등 심화
사도 바울은 " 알지 못하느냐? "고 묻습니다. 우리가 가장 먼저 알아야 할 사실은, “ 속는 것이 아주 위험하다. ”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냐? 성경은 어디서든 속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인류의 이야기 전체가 잘못된 방향으로 전개된 것은 인간이 마귀에게 속았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장에 이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완벽하게 창조하시고 낙원에 두셨습니다. 인간은 행복하게 살았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인류의 이야기는 이렇게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인류의 이야기는 불행과 질투와 시기와 살인과 전쟁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왜 인류의 역사가 이렇게 되었습니까? 마귀가 들어왔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자신의 간교함과 속임수로, 아담과 하와를 속였습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 3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 그리나 나는 뱀이 그 간계로 하와를 미혹한 것같이 너희 마음이 그리스도를 항하는 진실함과 깨끗함에서 떠나 부패할까 두려워하노라 “ 인류의 역사가 시작에서부터 지금과 같았던 이유는, 인간이 마귀와 죄의 속임수에 속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복음을 들은 사람들도 마 13:22절에서 “ 재물의 유혹에 넘어갈 위험이 있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들은 “ 가시떨기에 뿌려진 씨앗 "입니다. 사람들은 재물의 유혹에 빠져 삶의 참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세상의 마지막 때도 이와 같을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바울은 “ 미혹을 받지 말라 "고 말합니다. 현시대의 인류가 속기 쉬운 위험한 요소들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를 제시하겠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성경은 2천 년도 더 된 책이고 우리는 그때 이후로 너무나 많은 것을 배웠고 우리의 지식은 너무나 많이 진보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성경처럼 오래된 책이 아직까지 우리에게 말해 줄 것이 있겠습니까? 마귀의 강력한 공격 가운데 하나는 사람들이 성경을 읽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무시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어떻게 다릅니까? 2천 년 전 사림들은 " 음행 하는 자나 우상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 하는 지나 도적이니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니 속여 빼앗는 자들 "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사람들이 아닙니까? 현재의 위기는 우리 가운데 이러한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도 예전 어느 때의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미혹을 받지 말라. 성경은 바울 시대만큼이나 지금도 현재 적인 책입니다. 속임수의 두 번째 형태는 도덕 사상이 변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 사람들은 도덕이 상대적이며, 변하지 않는 원칙이나 진리란 없다. ” 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세상은 간음도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니며 때로는 옳은 것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동성애도 더 이상 잘못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거짓말을 하는 것도 항상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모든 것이 상대적입니다. 도덕과 의와 진리에 대한 변하지 않는 기준이 없습니다. 이것이 현대의 가르침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가르침은 순전히 속임수일 뿐입니다. 도덕적 기준이 지금처럼 개탄할 정도로 느슨해진 데는 한 가지 큰 원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신앙 없이도 도덕적일 수 있다고 배워 왔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이렇게 해석합니다. “ 성경의 도덕적 가르침은 매우 훌륭해. 하지만 성경의 신학이나 교리는 받아들일 수 없어. ”신앙 없이 도덕만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현재의 도덕적으로 몰아넣은 치명적인 가르침입니다. 속임수의 네 번째 형태는, 죽음이 끝이며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이라고 믿습니다. 생명은 끝나고 시신은 무덤에 장사 되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무슨 근거로 이렇게 말합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말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이런 말은 그저 말과 이론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믿기 때문에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습니다. " 미혹을 받지 말라!"속임수의!" 마지막 형태는 하나님은 전적으로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적으로 사랑이시므로 도덕적 기준도 없고, 심판도 없고, 형벌도 없고, 지옥도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어리석기 짝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의로운 재판장이시며, 마지막 때에 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영원히 지옥 형벌을 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순전히 속임수이며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고 있습니다. 우리는 철학으로 하나님을 만들어 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신앙과 도덕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셨지 우리가 우리를 지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그분의 손에 있습니다. 인간은 " 괜찮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모든 게 괜찮을 거야!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역사가 시작된 때부터 우리에게 계시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에게 이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면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고, 너희가 내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쫓아내리라. ”그런데 불순종한 인간은 쫓겨났으며 다시 돌아가지 못했습니다. 영원한 의의 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은 절대적인 법입니다. 이 법은 우리 모두의 양심에 있습니다. 또 한 십계명에서처럼 외적으로 반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분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도덕적 기준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실 뿐 아니라 심판이 있다는 사실도 똑같이 분명히 하십니다 "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반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니? "세상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거나 하나님의 나라밖에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 설 것이며,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느냐, 아니면 밖에 있는지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마귀에게 속아 이렇게 말하지 않도록 하십시오. 나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어 그러니까 술 취하고 간음하며 뭐든 해도 괜찮아! 하나님이 나를 용서하실 거야.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 여러분이 계속해서 이렇게 한다면 여러분은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는 것이며, 따라서 지옥에 갈 것입니다. ”
3. 전환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두 번째로 가르치는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인간에게 중요한 것은 “의”라는 것입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능력이 있거나 똑똑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에는 똑똑한 사람들이 인기가 있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까? 성경은 가장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뿐이라고 말합니다. 바로 의입니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시 24 3-4절 “ 여호와의 산에 오를 자가 누구며 그의 거룩한 곳에 설 자가 누구인가? 곧 손이 깨끗하며 마음이 청결하며 뜻을 허탄한 데에 두지 아니하며 거짓 맹세하지 아니하는 자로다. "똑똑한 사람들이, 머리 좋은 사람들이, 세련된 사람들이, 현대적인 사람들이 아닙니다. 절대로 아닙니다! 손이 깨끗한 사람들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다윗은 이것을 알았습니다. 시 51:6절” 보소서,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 “그렇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5:20"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중요한 것은 의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며 그분의 계명을 지키며 살아야 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과 얼굴을 마주하고 그분과 교제를 누리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 3: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우리는 모두 본질상 불의하다고 말합니다. “ 의롭다는 것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러분의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뜻이며,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의롭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의 영광과 찬양이 되기 위해 살고 있습니까? 이것이 의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롬3:23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성경은 그 원인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불의합니다. 왜냐하면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입니다. 아담은 마귀에게 귀를 기울이기 전까지 의로웠습니다. 그러나 그는 마귀의 말에 순종함으로 타락했고 불의해졌습니다. 인간은 하나님께 등을 돌렸기 때문에 지금도 불의합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자이며, 마귀의 노예가 되었고, 정욕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타락하고 추하고 비참한 노예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두 번째 중요한 사실은, 하나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의뿐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설 때, 우리는 자신이 죄인이며 불의한 자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복음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복음이 우리 모두에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복음은 단순히 죄와 죄인을 고발하는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굳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더라도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교회의 메시지는 단지 권면이나 호소의 메시지도 아닙니다. 모든 세상 지도자들이 " 지금의 도덕적인 죄.” 등에 대해 나름의 견해를 표현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행태는 바리새주의에 불과합니다! 주님은 요한복음 8장 첫 부분에 나오는 사건에서 이 문제를 단번에 다루셨습니다. 사람들은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힌 여자를 예수 님 앞에 끌고 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 님이 이 여자에게 어떤 판결을 내리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님은 사람들에게 대꾸하시지 않고 바닥에 뭔가를 쓰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예수 님을 제촉 하자 예수 님은 사람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7절 “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 그러자 사람들이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고 마침내 여자와 주님만 남았습니다. 한 사람에게 손가락질하고 그를 비난하며 정죄하는 것은 매우 간단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자신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마음은 깨끗합니까? 여러분의 손은 깨끗합니까? 복음의 메시지는 단지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믿고 주어, 주여! 라고 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 점을 고린도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 가운데는 추하고 끔찍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 율법주의입니다.. 복음은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을 고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합니다. 복음은 바리새인들처럼 죄인들을 손가락질하지 않습니다. " 당신은 여기서 구원받을 수 있으며, 씻음 받을 수 있으며, 깨끗해지고 새로워질 수 있으며, 주 예수의 이름으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가장 악한 자에게도 희망을 줍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바울은 "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더 이상 이런 사람이 아닙니다. 왜 아닙니까? 여러분은 씻음을 받았기 때문이며, 거룩하게 되었기 때문이며, 주 예수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롭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복음을 전하는 특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에게서 죄의 더러움을 씻어 낼 수 있는 복음, 우리에게서 우리를 정결하게 할 수 있는 복음, 우리를 죄의 책임에서 자유 하게 하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주어 거룩한 하나님 앞에 서게 할 수 있는 복음을 전하는 특권입니다. 복음은 용서만 전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됨과 거듭남을 전합니다. 복음은 실패의 잿더미에서 새로운 사람들이 일어나 하나님 앞에 성도로 설 수 있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4. 대단원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울은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라고 대답합니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의 노예입니다. 여러분이 계속해서 범하는 죄가 무엇입니까? 왜 여러분은 그 죄를 끊지 못합니까? 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이 우리를 죄의 종에서 구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러 오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그분과 교제하며 복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대신해서 해주셨습니다. 그분이 인간이 되셨으며, 스스로 율법 아래 서셨으며, 율법을 지키셨으며, 십자가 위에서 나의 죄를 친히 담당하셨으며, 나를 위해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분 안에서 하나님은 나를 용서하시고 그분의 의를 내게 입히십니다. 저는 저와 같이 불쌍한 인간을 비난하려고 이 자리에 선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메시지입니다! 기독교의 메시지는 바리새주의가 아니라, 종교적 품위와 허식과 연기가 아닙니다. 복음의 메시지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 마음에 의가 있고 그리스도의 의가 그 위에 임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 즉 거듭난 사람입니다.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 수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에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 찬 260 장“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십자가의 보혈로 날 씻어 주소서. ”감사하게도 우리가 처한 어떤 상황에도 불구하고 오늘 밤에 소망이 있습니다! 이것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의 복음이 유일한 소망입니다. 여러분은 그분을 압니까? 그분을 의지합니까? 그분을 통해 죄 씻음을 받아 깨끗하고 새롭게 되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