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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수정본"

wordlove 2021. 7. 30. 08:03

1. 본문: 14:1

2, 명제: 진정한 평화는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나온다.

3. 제목: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1. 갈등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오늘 이 말씀은 예수 님이 하신 말씀 가운데 가장 친숙하고 부드러운 말씀이라고 말합니다. 위로와 위안을 주는 말씀이다 보니 장례식 때 많이 사용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단순히 위로를 주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더 깊은 진리를 깨달음으로 인생의 근본적인 위로와 위안을 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지금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예수 님을 거의 3년 동안이나 따라다녔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그들의 곁을 떠나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주님의 나이는 30세 초반인데 세상을 떠나신다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놀라고 크게 상심한 것입니다. 예수 님은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이 근심과 불안에 사로잡히고 평안을 잃을 것을 아셨습니다. 지금 까지 제자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전적으로 주님을 의지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겠다니 불안과 걱정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은 이전에 살던 곳으로 다 돌아가야 합니까? 아무 소망이 없던 과거의 삶으로 복귀해야 합니까? 그들은 생각했습니다. 주님 없이 어떻게 살지? 주님이 떠나시며 우리는 다 끝장이야. 다 망한 거라고예수 님은 제자들의 이러한 생각들을 다 아셨습니다. 이 시점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주님은 인생의 어느 시점에 이 말씀을 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저녁에 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에게 곧 어떤 일이 닥칠 것인지를 알고 계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친히 인류의 죄를 대신 담당해야 함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만인의 죄를 지우실 때 하나님 아버지의 존전에서 격리되는 무서운 순간이 찾아오리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 모든 것을 아셨기에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에서 그분의 영혼은 26:38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고민을 접어 둔 체 불행에 빠진 제자들을 위로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 앞에 닥칠 문제보다 제자들의 불행에 더 마음을 쓰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우리 인생에 대한 한없는 사랑입니다. 주님은 십자가에 달려 손발에 잔인한 못질을 당한 후에도 옆에서 죽어가는 강도를 위로하시고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렇게 세상 죄를 다 짊어지고서도 함께 못 박힌 비참한 자를 돌아보실 만큼 그의 긍휼과 사랑과 연민과 이해심은 큰 것이었습니다. 이분이 우리가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 분이 복음의 중심입니다. 예수 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있는 바로 그 자리에 언제라도 찾아와 만나 주시는 분이십니다. 묻기도 전에 대답해 주시려고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읽어 주시는 수고를 마다치 않으시는 분 우리의 필요와 불행한 마음을 미처 표현하기도 전에 먼저 알아채시고 위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른바 마음의 평안과 마음의 여유라는 말은 정직한 말입니다.

 

2. 갈등 심화

결국 인생이 찾는 것은 평화 즉 평강이 아니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여러 가지 이유로 불안합니다. 우리 마음을 불안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 있다고 한다면 무엇보다도 죽음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심란하고 근심이 됩니다. 2: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 하심이니 ”세익스피어도 “ 죽음이 무서운 것은 그 미지의 나라로 떠난 어떤 여행자라도 다시 경계선을 넘어 돌아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익스피어는 “ 그걸 알면 모두가 비겁자가 되어버리다 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마음을 불안하고 불편하게 만드는 원인이요 근심거리입니다. 또 다른 원인으로 세상살이에 자연히 따라오는 수많은 문제들,, 각종 병들, 실망스러운 일들, 사업의 실패, 가까운 이의 죽음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이 찾아오면 우리는 피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계획을 완벽하게 세웁니다. 그 순간 갑작스러운 사고가 찾아옵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이것이 인생의 비극입니다. 이것에 더하여 우리는 전쟁의 위험성과 그 밖의 많은 위협이 상종하는 불확실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현실 앞에 과연 마음의 평안을 얻을 수가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 진정 마음의 평안을 주는지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기독교 복음만이 마음의 근심에서 벗어나게 약속하는 것이 아님을 인정해야 합니다. 평안을 준다고 가르치는 여러 방법들이 기독교 밖에도 많습니다. 하지만 과연 세상 사람들이 제시하는 다른 방법들이 평안을 주는 것인지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그 방법 중의 하나는 아예 생각이라는 것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리석게 이런 세상에서 생각이라는 걸 하다니 그런 사람은 불행해지는 것도 놀랄 일이 아니요. 어떤 면에서는 불행해지는 것이 당연하다 라고 주장합니다. 계속 생각하기를 고집하는 것이야 말로 문제라는 것입니다. 이제 생각은 그만하고 동물처럼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면 모든 문제가 다 풀린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이 행복하고 싶으면 근심을 떨쳐 버리라 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도피해 버리라는 것입니다. 마음의 평안을 얻는 또 다른 방법은 낙관주의 철학입니다. 어떤 이들은 필연적으로 더 나은 삶을 향해 인류는 모든 문제와 고민이 사라지는 완벽한 상황으로 진화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난 100년간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면서도 여전히 이런 낙관론은 여전히 인기가 있습니다. 일차 대전 이차 대전을 겪으면서도 이런 태도를 자랑스러워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물의 밝은 면만 보면서 무슨 일이 닥쳐도 늘 웃음 짓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로 여깁니다. 이런 방법으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 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운명론입니다. 운명론은 어차피 일어날 일이 일어나는 거야. 세상에서 생각하고 걱정하고 계산해 봐야 다 쓸데없는 짓이라고 자꾸 생각을 하는 게 오히려 더 문제라니까? 다 팔자소관이야. 그냥 일어날 일이 일어나려니 하고 기다려보라고 그러다 보면 잠시나마 근심을 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어. ”또 다른 방법은 심리학적인 방법입니다. 이 방법은 문제 자체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 문제에 대한 반응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심리학자들은 잠시의 평안을 주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목표입니다. 그들은 왜 걱정하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걱정하는 것이 어리석은 것임을 보여주려 합니다. 그리고 아름답고 유쾌한 것들을 생각해 보라고 합니다. 의도적으로 생각을 다잡아 다른 데로 돌려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이 흔들릴 때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에게 달려갑니다. 이들보다 한 단계 위는 극기의 태도가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이것을 “ 과학적인태도 ” 혹은 심리적인 침착성 이라고 부릅니다. 이들은 감정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감정의 영향을 받는 것이 문제라고 봅니다. 감정과 마음이 흔들리면 불행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걸음 물러나 심리적인 침착성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과학자처럼 말입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 철학자인 스토아학파들이 주장한 내용입니다. 감정과 느낌을 늘 신중하게 통제해야 휘둘리지 않는다는 것이 스토아 철학의 핵심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통제하고 감정을 다스리면서 객관적인 태도를 갖자. 철학적인 태도를 갖자. 이런 감정에 빠지지 말자 라고 다짐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여타의 종교와 사교들의 가르침을 봅시다. 모든 종교들의 목표는 비슷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평온하게 해 주겠다고 말합니다. 동양의 신비주의 종교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들은 우주의 중심으로 들어가 만물의 배후에 있는 영과 합일하는 것에 구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이 방법을 통해서 마음의 평안을 얻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법들은 결국 비관적이고 절망적이라는 것입니다. 비관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생각하기를 거부합니다. 쾌락을 위해서 살면서 비참한 그리스도인들과 비교하면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가 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들은 삶이 너무 두렵기 때문에 감히 그것을 대항해 싸울 엄두를 못 내는 것입니다. 오늘날 현실을 직시하지 않는 낙관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진보하고 진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아무런 소망을 찾을 수 없기는 운명론도 마찬가지입니다. 심리학도 마찬가지입니다. 문제를 만지작거릴 뿐이며 현실을 외면하고 태연 한척할 뿐입니다. 여타 사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여러 번 환생을 거치다 보면 마침내 우주와 합일에 이를 수가 있다고 말합니다. 이 또한 심각한 비관주의입니다. 이런 생각들은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장치들에 불과합니다. 이 중 어는 것도 우리에게 참 기쁨과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이런 방법들은 모든 문제를 개인의 책임으로 문제를 떠넘긴다는 것입니다. 각자가 알아서 무서운 시련을 헤쳐 나가야 합니다. 각자 훈련을 통해 지식을 얻어 스스로를 구원해야 하다고 주장합니다. 심리학이 어느 정도 신경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신경을 평안하게 해주는 것은 어느 정도 감사한 일이지만 그러나 우리 인생이 원하는 것은 표면적인 안식만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3. 전환

바울 사도는 바로 이 점에서 복음만이 우리 인생의 가장 깊고 근본적인 필요를 채워 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14장이 말하는 점이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 님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삶에서 이것을 입증했습니다. 로마 제국의 무력과 폭정 및 잔인한 박해에 능히 대항하여 넉넉히 이기고 승리함으로 기뻐했습니다. 사도와 순교자들과 초대교인들의 위대한 이야기를 들어 보십시오. 이 말씀은 과거에도 역사했고 지금도 역사하고 있습니다. 복음의 위대한 점은 현실을 직시하는데 잇습니다. 복음은 결코 어떤 사실도 감추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주님은 제자들에게 최악의 현실을 그대로 말씀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른 가르침이나 철학들은 애써 감추려고 합니다. 최악의 현실을 듣고 그것을 직시하지 않는 한 진정한 마음의 평안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직시해야만 비로소 극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속임수를 쓰는 가르침은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최악의 상황 같은 것은 없다는 철학은 쓸모가 없습니다. 고통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고통이 없다고 말하는 거짓말을 듣고 잠시 심리적인 안정은 찾을 수는 있겠지만 그것은 잠시일 뿐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것은 고통을 달래기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고통과 맞서 싸우는 것입니다. 복음의 매력은 사실성에 있습니다. 복음은 자 근심일랑 잊어버리고 아름다운 생각만 하라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탄이 다스리는 이 세상은 난리와 난리 소문이 이 있게 마련이라고 말씀합니다. 24:6“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듣겠으나 너희는 삼가 두려워하지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아직 끝은 아니니라 심리학은 잠시나마 근심을 잊게 하려고 애써지만 복음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예배당에서 잠시 동안 자신의 근심을 잊어버리고자 교회에 오는 사람은 복음을 싫어합니다. 복음은 우리의 현실과 대면시킵니다. 복음은 한 인격에 모든 토대를 두고 있으며 역사적인 사건에 그 토대를 두고 있습니다. 복음의 주인이신 주님이 나를 찾아와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도 십자가에서 잔인하게 처형되는 현장 몸이 찢겨서 무덤에 장사되는 현장 극한 절망과 현장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후에야 부활의 영광과 성령의 오심을 이야기하면서 우리를 완전히 다른 자리로 데려갑니다. 현실의 터널 어둠의 터널을 통과시킨 후에야 그 끝에 있는 새벽빛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복음은 수긍할 만한 설명을 해줍니다. 복음은 역사의 원리를 제시합니다. 복음은 모든 문제가 인간의 육체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문제는 영혼에 있다고 말합니다. 내 영혼을 만족시킬 만한 무엇이 있어야 합니다. 왜 삶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설명을 들어야 합니다. 성경은 인생이 하나님을 떠난 죄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해 주는 것은 복음밖에 없습니다.

 

4. 대단원

무엇보다 복음은 모든 문제를 나 자신에게 떠넘기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연결시킨다는 것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떻게 근심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예수 님은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해 예수 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일상생활에 쫓기며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들에게 평안을 주지 못하는 복음은 복음이 아닙니다. 세상을 뚫고 나가 승리하신 분 죽음과 무덤까지 정복하신 분이 그분의 말씀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라고 말하는 복음입니다. 죽음과 무덤을 이기신 하나님의 아들 그 누구도 그 무엇도 궁극적으로 대항할 수 없는 아들의 힘이 우리의 말할 수 없는 연약함 속으로 흘러들어 온다고 말하는 복음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나를 믿으라 렇습니다. 하나님은 약속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평화와 기쁨을 주며 그들을 자녀 삼기 원하신다고 태초부터 말씀하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분을 신뢰하기 힘들 때가 많습니다. 3년 동안 예수 님과 함께 한 제자 빌립이 예수 님에게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14:8-9 “ 14: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의 질문에 예수 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또 나를 믿으라 나를 믿지 않으면 아버지도 결코 알 수 없다 예수 님을 믿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믿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 님을 보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보는 것입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연약합니다. 이런 우리가 주님 없이 어떻게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18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그러시면서 다른 보혜사를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보혜사는 우리와 함께하시는 분이라는 뜻입니다. 이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입니다. 성령님은 바로 그리스도의 영이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모실 때 성령님이 오셔서 예수 믿는 우리 안에 거하시며 모든 것을 계시하시고 설명해 주실 뿐만 아니라 힘과 능력을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나를.... 믿으라 이 말씀의 뜻은 나에게 와서 근심을 떨어 놓아라. 하나님에 대해 느끼는 어려움 기도할 때 느끼는 어려움 너의 약한 의지와 실패와 관련된 어려움을 전부 다 나에게 떨어 놓아라 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을 불안하게 만드는 원인이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전쟁의 원인일 수도 있고 사업상의 문제 연약한 의지의 문제 경제의 문제 등 여러분을 불행하게 만드는 무엇이라도 개의치 말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십시오. 그분은 죽기까지 여러분을 사랑하셨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불안해할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십시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그런 불행과 불안에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십니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능히 여러분에게 안식과 평안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진정한 평강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서 나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