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고전 12:11
2. 명제: 모든 은사는 성령의 뜻에 따라 주어진다.
3: 제목: 성령이 그 뜻대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성령세례 말씀에 대한 편집본“
1. 갈등
이해를 돕기 위해 로이드 존스 목사가 사용하는 용어에 대한 정의를 먼저 소개합니다. 첫째는 중생, 거듭남, 성령의 기본 세례, 성령에 의한 세례를 동일한 개념으로 사용합니다. “고전 12:3, 13” 두 번째는 거듭나고 성령의 기본 세례를 받은 자가 성령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성령의 인도를 지속 적으로 받은 것을 성령의 생활 충만이라고 말합니다. “엡 5:18”엡5:18” 세 번째는 성령의 생활 충만한 가운데 특별한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능력을 부어 주시는 성령의 사역으로 승천하시면서 주님이 친히 부어 주셨으며 오순절뿐만 아니라 교회사를 통하여 계속 부어져 왔으며 지금도 계속 부어짐으로 교회는 부흥될 것이라고 주장할 때 로이드 존스 목사가 사용하는 용어가 성령세례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세례 요한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분을 선포할 때의 말씀들을 상고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약성경을 읽으면 위대한 능력이 초대교회 사도들과 제자들에게 주어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죄와 타락과 부패와 도덕적 퇴폐 현상이 신약성경 시대에도 편해 있었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일단의 단순하고 무식하고 배우지 못했던 남녀들이 그 세계에 심각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영향을 주어 심원한 변화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이 사실에 대한 설명은 그들 모두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데 있습니다. 신약교회와 그 후에 여러 세기를 통하여 이런 일들을 가능하게 했던 것은 성령의 세례로 말미암아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펴 본대로 이 능력은 본질적으로 복음을 증거 하기 위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행 1:8절 “ 권능을 받고 내 증인이 되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오신 것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리고 증거의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유일하신 구세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입니다.
2. 갈등 심화
이제 우리는 이 위대한 은사의 문제를 다루어야 할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이 영적 은사는 성령님에 의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증언하게 하기 위하여 부어지는 은사인 것입니다. 우리는 앞서 어떤 사람들이 신약성경이 완결됨으로 은사들은 종결되었다고 믿는데 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좀더 나아가서 교회 역사가 이런 은사들이 종결되었다는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고까지 말하며, 신약 시대 이후로는 기적은 실제 적으로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모든 것은 신약교회만을 위하여 베풀어졌고, 그리고는 종결되었으므로 그 이후 나타난 초자연적 은사들로 보이는 것들은 틀림없이 마귀 적이며, 모조품이며, 그런 것들은 염병처럼 멀리해야 되며 실제로 굉장히 위험스러운 것이라고까지 말합니다. 다음으로 어떤 사람들은 그 은사들이 사라졌기 때문에 언급되지 않았다고 추론합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아주 위험천만한 주장입니다. 이것이 소위 “ 침묵에 의한 논증 ”이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특별히 방언 문제를 논하면서 “ 사도 바울은 그 은사를 거의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혹시 언급한다 할지라도 방언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을 규제하는 오용을 방지하기 위하여 언급할 뿐이다. 이것은 틀림없이 그가 방언 은사를 은사 목록의 최하위에 두고 독자들도 그러한 관점으로 보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계속 말하기를 “ 그 방언이 성행했던 고린도 교회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초대 기독교 사회에서 가장 미숙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린도 교회가 가장 미숙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은 확증할 수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나 갈라디아 교회들도 미성숙했다는 증거들을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성경을 그대로 취하면 됩니다. 곧 “ 나는 너희가 다 방언 말하기를 원한다.” 단지 허용적일 뿐만 아니라 바람직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말하기를 “ 방언 말하지를 금하지 말라. " 또 사도 바울은 “ 내가 너희 모든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말하므로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의 서신서들은 특수한 목적을 가지고 기록되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은사 문제 때문에 큰 혼란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문제에 큰 비중을 두어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교회에서도 은사가 고린도 교회에서처럼 풍성하게 드러났지만 그 은사 문제로 오해가 생기거나 문제 거리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문제를 취급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교회에서 이런 문제들이 다루어지지 않은 까닭은 아마도 은사 문제가 쟁점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성경의 서신서들은 이것들은 어떤 특수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하여 기록되었습니다. 골로새서를 예로 들어 보십시다. 그 교회에서는 철학적인 사색을 위주하는 이단들에 대한 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문제를 취급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곳저곳을 여행하며 복음을 진해야 하는 바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특수한 문제가 일어날 때마다 편지를 써서 해결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이 사실을 염두에 두신다면 이 모든 서신서들에 대한 새롭고도 신선한 이해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갈라디아교회에서는 할례 문제가 큰 문제로 대두되었습니다만 그것만이 유일한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중요한 원리는 이것입니다. “ 침묵에 의한 논증 위에 서서 주장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그것은 위험한 덫이 될 수 있습니다. 많은 세기를 통해서 많은 이단들이 여기에 섰습니다. 신약성경 기록의 모든 배경은 사도행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서신서 위에서만 세워서는 안 됩니다. 서신서들은 사도행전에 분명히 나타난 역사적 배경에 비추어서 읽혀야 합니다. 또 다른 문제로 나가봅시다. 우리는 이 문제를 기적적으로 치료하지 않고 딤 전 5:23“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 “에바브로디도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렀도다. "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기록들을 보고 “ 기적들은 분명히 지나가 버렸다. 만일 기적들이 지나가지 않았다. 라면 이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고침을 받았을 것이며 디모데에게나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의학적인 충고는 불필요했을 것이다 "라고 합니다. 이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어느 곳에서도 병은 반드시 치료되어야 하며 항상 기적적으로 치료되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한 은사들이 계속적이며 오늘날도 신유가 계속된다고 믿는 사람들은 심지어 기독교인들은 결코 병이 들어서는 안 되며 또 언제나 기적적으로 치료되어야 한다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그 반대의 극단적인 주장은 이런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적인 치료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 두주장들은 똑같이 잘못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어떤 그리스도인들도 병이 들었을 때 기적적으로 치유함을 받아야 한다고 신약성경에 기록되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결단코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다. 기적은 단지 이 따끔씩 일어나는 예외적인 일입니다.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한 참된 해답은 고린도후서 12장에서 사도 자신이 진술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자신의 육체의 가시에 대해서 취급하고 있습니다. 사도 자신은 병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일을 계속할 수 없어서 하나님께 그 병을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병은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 번이나 끈질기게 매어 달렸습니다. 그는 수많은 기적들을 행했고 놀라운 일들을 체험했으면서도 자신이 병들었을 때에는 그 병을 견디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이유가 무엇인가를 그에게 가르쳐주었습니다. 그것은 곧 “ 육체적인 고침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이라는 것입니다. 그 교훈은 이러했습니다. 고후 12:9절“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그는 전에는 그러한 은혜를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질병도 때로는 우리 영혼의 유익을 위하여 허용된다고 가르칩니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때로는 질병이 우리의 유익을 위한다는 것도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 있어서 육체의 가시는 “ 내가 약할 그때에 곧 강함이니라 ”라는 사실을 알게 하기 위하여 제거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원리는 이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어떤 사람들이 기적적으로 치료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적은 사라져 버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신유를 포함해서 모든 기적들은 이따금씩 일어나는 것이며 성령님의 주권에 의하여 결정되었습니다.
3. 전환
기적들은 결단코 자동 적으로 일어나지 않으며, 모든 기독교인들이 즉각적으로 치료된 것이 아닙니다. 제가 누누이 강조한 대로 이 모든 은사들은 성령님의 주권 아래 속해 있습니다. 성령께서 시기와 방법과 장소를 결정하십니다. 우리는 결단코 요술 방망이 식으로 원하는 대로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사고방식을 버려야 합니다. 어떠한 특정한 경우에 능력이 주어졌을 때, 비로소 기적은 발생했습니다. 또 다른 논점을 취급해 보기로 합시다. 이러한 기적들은 신약 시대에만 속하며 현재의 우리와는 무관하다는 고등 비평가들의 주장입니다. 이것은 성경을 심판하는 자리에 서 있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 그래 물론이지! 기적은 일시적이었어. 지금 우리에게는 상관없는 것이야. ” 이 사람들은 “ 고린도전서 전체는 일시적인 상황을 기록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상관없는 기록이다. "라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성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 주장은 자가당착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 이것은 우리에게 적용되고 저것은 우리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라고 독단적으로 주장하는 고등비평가들의 주장을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교회사를 살펴보기로 하십시다. 모든 기적적인 은사들과 표적의 나타남은 사도 시대 후부터 사라졌다는 주장을 취급해 보십시다. 이러한 기사와 이적과 은사들이 틀림없이 지속적으로 일어났다는 것을 증거해 주는 기록들이 터툴리안을 비롯하여 많은 교부들의 생활과 저술에서 발견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확실하고 중요한 사실은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 당시에도 이러한 인들이 일어났다는 사진입니다. 존 녹스(John Knox)의 사위인 위대한 신앙인이요 학자인 폰 웰쉬(John Welsh)의 전기를 읽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그에 관해서 많은 놀라운 일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뛰어난 역사가들이 폰 웰쉬가 프랑스 남부지방에서 피신하고 있을 때에 실제로 죽은 사람을 일으켰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정반대의 극단으로 흐르기 쉬운가를 살펴보는 것은 언제나 흥미 있는 일입니다.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항상 교회에 나타나야 하면 그런 은사를 소유하지 못하는 것은 믿음의 결핍이라는 주장입니다. 이러한 입장도 역시 비성경적이며 성경 자체에서 결코 입증될 수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성경의 가르침은 이러한 얼들은 성령의 주재권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성령님만이 모든 것을 결정하십니다. 고전 12:11절“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느니라. ”성령께서 한 사람에게는 이 은사를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저 은사를 준다는 사실입니다. 은사를 주는 것은 전적으로 성령의 지배 안에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는 부흥의 역사를 경험했습니다. 여러분이 원할 때마다 부흥을 일으킬 수 있다고 가르친 사람들이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은, “ 여러분은 할 수 없다! ”입니다. 부흥은 언제나 성령의 주권에서 오는 것입니다. 부흥은 여러분이 가장 기대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이러한 초자연적인 능력들이 점 점 더 적게 발견하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입니다. 그리고 “ 왜 그런가? "라는 필연적인 질문이 야기됩니다. 복음이 헬라 철학이나 로마의 법과 상반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던 변증 가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박해와 오해들 때문에 아주 폭넓게 그 일을 행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선한 동기로 출발지만 그들은 복음을 ‘이성적인 철학’의 길로 변질되어 사실상 성령을 소멸시켰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콘스탄틴 황제는 그의 '지혜'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심하였으며 로마제국을 그리스도교로 이끌었습니다. 교회는 모든 것이 관리되는 하나의 기관이 되었습니다. 3세기 말이나 4세기의 교회는 신약의 교회와 동일시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은사들을 거두어들였기 때문이 아니라 인간이 교회를 맡았기 때문이며 성령께서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성령이 소멸되었기 때문입니다. 때를 맞춰 제도상의 교회가 중제의 로마 가톨릭 교회에 응해서 생겨났습니다. 그들은 신약성경의 은사들을 부정하지만 일반적으로 동정녀 마리아로 말미암아 엉터리 기적들을 연출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타락하기가 쉽습니까? 하나님께서 은사들을 거두어 버렸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자신의 '지혜'와 영리함으로 제도화되어 버렸으며, 성령을 소멸시키고 그리고 성령의 능력의 표시들을 거의 불가능하게 만들어 버렸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4. 대단원
그러므로 나의 마지막 결론은 이것입니다. 성령의 주권 안에서 이러한 일들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 성령의 능력은 오직 신약의 교회에서만 일어났다. "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 성령의 능력의 표시들이 항상 그것들의 충만함으로 존재할 것이다. "라고 말해서도 안됩니다. 이 두 가지 견해는 모두 틀린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은 언제나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흥되기를 요구하는 어떤 것이나 또 는 이러한 은사들에 대한 새로운 수여와 직면하였을 때, 우리는 그것을 힘주어서 거부해서는 안 되며 그것을 조사하고 시험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가짜들에 대한 무서운 위험 때문에 이와 같이 시험하라고 성경에서 권고할 뿐만 아니라. 또 한 우리가 이 시험을 어떻게 행하였나를 말씀하시고 가르쳐 주신 것을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