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마 6:19-24
2. 명제: 천국 백성의 인생관은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는 사람이다.
3. 제목: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예수님께서 “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라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 세상은 천국 백성을 위협합니다. 주님은 천국 백성이 만날 세속성 즉 세상사랑의 문제를 다루시고 계십니다. 마귀는 이 세상의 세속주의에 빠져 천국 백성의 영적 생명을 죽게 만듭니다. 세상은 교묘하고 세상사랑은 너무 침투성이 강해서 이것의 침투를 받고서도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세상 사랑이란 댄스홀이나 나쁜 tv를 보지 않는다는 것만이 아닙니다. 세속성이란 것은 세상에 대한 우리 인간의 태도입니다. 인생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의 인생관은 보물을 땅에 쌓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천국 백성은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야 합니까?
1. 땅에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보물은 오래가지 못한다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보물은 덧없는 것이요. 하루 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좀과 동록의 관점에서 이것을 보고 있습니다. 좀과 동록이 서며 들어 이것들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영적으로 보면 이런 것들은 결코 만족을 주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들이 바라는 모든 것을 갖고 있으나 그들은 여전히 또 다른 것을 원합니다. 행복은 돈 주고 살 수 없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꽃도 가지를 꺾는 순간 시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쓰레기통에 내어 던져야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생명을 가진 모든 것은 죄의 결과로 좀과 동록이 스며드는 과정의 지배를 받기 마련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외모도 부패의 과정을 지나가며 죽어 추하게 됩니다. 가장 눈부신 재능도 시들며 최고의 진리에도 악과 죄와 거짓의 요소가 있기 마련입니다. 인생에는 많은 도둑들이 항상 위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집안에 들어앉아서 안전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도둑이 뚫고 들어와 샅샅이 뒤지고 약탈해 갑니다. 갑자기 찾아온 질병, 사업의 실패, 전쟁, 사고, 죽음 등등입니다. 이 도둑들이 우리를 항상 위협하여 우리로부터 탈취해 가버립니다. 그것은 금전뿐만 아닙니다. 그것은 나의 소중한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이런 도둑들을 예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상식에 호소하여 땅의 보물들이 오래가지 못함을 상기시켜 줍니다. 오늘 신문을 보십시오. 병원을 가 보십시오. 사망 기사난을 보십시오. 매일 발생하는 사건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데 어째서 이 모든 실상을 알면서도 왜 이 땅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까? 이것이 인생의 어리석음입니다. 왜 천국 백성은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야 할까요?
2. 하늘에는 좀이나 녹이 해하지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후 4:18”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 ‘’ 하늘의 것은 멸하여지지 않으며 썩지 않으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들어와 도둑질할 수 없습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간직해 두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우리에게 빼앗아 거거나 심지어 들어올 수 있는 원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관인이 되시기 때문에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난공불락의 장소에 간직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 우기 그 기에는 불순한 것은 없습니다. 부패한 것은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바울은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천국은 빛과 순순한 영역이며 죽음과 속한 것이나 더럽거나 오염된 것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천국은 완전합니다. 예수님은 거기에 보물을 쌓아두라고 말씀합니다. 좀이나 녹이 쓸지 않고 도적이 구멍을 뚫지 못하고 들어가서 도둑질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천국에는 순수함과 기쁨과 영원한 축복이 있음을 알면서도 어째서 거기에 보물을 쌓지 않습니까? 이것인 우리 인생의 어리석음이요. 한계입니다. 왜 천국 백성은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야 하는가?
3. 천국이 아니라 땅에 보물을 쌓아두는 영적인 위험이 크기 때문입니다.
영적 위험성 첫 번째는 이 세상사랑 즉 세상 보물은 우리에게 주는 무시무시한 지배력과 세력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 네 보물이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여기 섬기다. 라는 말에 주의해야 합니다. 이 단어는 무서운 지배력을 표현하는 용어입니다. 이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우리는 지배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속성은 교활할 뿐만 아니라 아주 교묘합니다. 그 사람의 보물이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전 안대희 총리 후보가 평생을 나름대로 정직하게 살다가 이 정부에서는 고위 공직자로 더 이상 임명되기는 틀린 것 같다.라는. 생각을 했는지 돈이나 벌자 라는 생각으로 전관예우의 나쁜 관행을 쫓아 6개월 사이에 수억 원의 거금을 수임료로 챙겼다가 결국 국무총리에 오르지 못하고 말았지 않습니까? 결국 그도 땅의 보물에 희생이 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누구나 세상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천국 백성도 이것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이 세상 보물의 지배력이 인생을 정복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의 노예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우리를 지배하는 이 위험은 전 인격에 영향을 줍니다. 예수님은 " 마음 “이라고 지칭합니다. 주님은 ” 너희 마음이 있는 것에 보물도 있다. ”라고 하셨습니다. 세상 보물은 감정과 애착과 우리 모두의 순수성을 지배하고 정복합니다. 우리 모두의 성품이 이것들에 의해 지배를 당함으로 인생의 순수함이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 3:19“ 그 정죄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기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사람들은 세상을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합니다. 세상 사랑이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마음을 지배할 뿐 아니라 정신까지 지배합니다.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빛이신 하나님을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 보물은 결국 그 인생을 죽게 만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22-23“ 마 6:22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마 6:23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둠이 얼마나 더하겠느냐 ”예수님에 의하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보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주께서 성한 눈이라고 부르는 눈이 있습니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신령한 사람의 눈입니다. 이 사람의 눈은 밝아서 사물을 정상적으로 봅니다. 나쁜 눈도 있습니다. 이중으로 보는 눈 곧 눈알의 수정체가 맑지 못한 눈입니다. 안개와 불투명의 물체가 끼이며 사물이 흐릿하게 보입니다. 이런 눈은 나쁜 눈입니다. 이것은 어떤 편견 정욕과 욕망의 영향을 받은 눈입니다. 이런 눈은 맑은 눈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쌓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음을 보여 주고 나서는 예수님은 마음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이것이 사람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생각이 얼마나 많이 땅의 보물에 영향을 받고 있는지를 주목하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지요? 우리 정치의 혼란을 보십시오. 그저 자신들의 편견. 자기 욕망과 자기 진영의 이익만을 내세우지 않습니까? 땅의 보물을 사랑함에 기초한 이 같은 시력의 혼미가 불의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빵을 훔치면 도둑이지만 더 큰 소득세를 조작하는 것은 절도가 되지 않는다고 항변을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은 작은 도둑은 도둑으로 벌을 받지만 큰 도둑은 도둑으로 보지 않습니다. 무전 유죄 유전 무죄라는 왜 이런 모순이 벌어집니까? 이 세상이 세상 보물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보물은 감성을 물론 지성에까지 지배합니다. 사람들의 도덕과 윤리도 이것들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신앙도 이런 것의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바울은 데마가 나를 버렸다고 말합니다. 어째서입니까? 그가 이 세상을 사랑했기 때문에 믿음을 버리고 바울을 떠난 것입니다. 세상 사랑이 사람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요인 것입니다. 그래 예수님은 눅 21:34-36“ 눅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눅이날은 온 지구 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눅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시니라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기준도 어떻게 땅의 보물을 더 잘 쌓느냐 라는 것 외의 다른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라고 하셨습니다. 섬긴다는 말은 우리의 의지의 영역 곧 행동의 영역입니다. 우리의 행동은 생각의 결과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 곧 우리의 마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결론은 세상 보물은 세력이 매우 강하여 사람의 전 인격을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세상 보물은 사람의 영과 혼과 전 존재에 영향을 줍니다. 이것이 곧 그 사람을 멸망시키는 길로 가는 큰 위험이 되고 있습니다. 왜 천국 백성은 보물을 땅에 쌓지 않고 하늘에 쌓아야 하는가?
4.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를 결정한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 한 종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너희가. .....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리라 ”보물과 하나님은 모두 우리에게 전체주의적 요구를 합니다. 세상 보물은 전 인격을 지배하며 어디서나 우리에게 영향을 줍니다. 이것들은 우리에게 온전한 헌신을 요구합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만을 위해 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보물의 노예가 되기를 요구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 ”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전체주의적 요구를 하십니다. 24절”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이것은 양자택일의 문제입니다. 이것이냐 저것이냐의 문제입니다. 이 점에서 타협은 불가능합니다. ”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무신론적 유물론자를 반대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유물 주의자는 무신론자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습니다. 만일 유물주의 철학이 여러분을 지배하고 있다면 무슨 소리를 하든 그 사람은 무신론자입니다. 그러나 여기 예수님은 무신론적 유물론자보다 더 고약한 것은 하나님을 존경한다고 말하는 유물론 자입니다. ” 그러므로 만일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땅의 보물을 위해 사는 이 사람의 삶의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습니까? 구약 성경의 한 예를 들어 봅시다. 왕 하 17:21-42에 보면 앗수르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사마리아를 침략했습니다. 그런 다음 자기 백성들을 이주시켜 살게 했습니다. 물론 앗수르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사자를 보내시어 그 지역의 몇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러자 두려움에 빠진 백성들이 앗수르 왕이여! 우리 백성들이 이곳에 왔지만 이 땅의 신의 법을 모름으로 그 신의 사자들이 앗수르 사람들을 죽였으니 왕이시여 포로로 잡혀온 이스라엘의 제사장 하나를 보내 그 땅의 신의 법을 가르치게 하소서. 그래서 왕이 포로로 잡혀 온 제사장을 보내 여호와의 법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그러면 만사가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와 같이 저희가 여호와도 경외하고 자기의 신들도 섬겼더라. “여호와 하나님도 섬기고 자기 신 즉 우상도 섬기면 만사가 잘 될 것이라는 인간의 어리석을 보십시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마지막 날에 ” 주여 주여 우리가 이러저러한 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말할 사람이 많을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아버지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갈 것이니라 “여러분은 누구를 섬기고 있습니까? 하나님입니까? 재물입니까? 결국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지만 이러저러한 모양으로 재물을 섬기는 것보다 하나님께 더 큰 모욕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얼마나 쉽게 무의식적으로 이 죄에 빠지는지 알 수 있습니까? 어떤 농부가 자신의 소가 송아지 두 마리를 낳았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습니다. 한 마리는 붉은 송아지요 다른 한 마리는 흰 송아지였습니다.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 이 송아지 한 마리는 하나님께 드리고 싶소.라고. 말했습니다. 아내는 어느 놈을 바치고 싶은지를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지금 당장 결정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오. 때가 되면 말하리라. 몇 달 뒤에 그 농부가 슬픈 얼굴로 부엌으로 들어왔습니다. 여보! 나쁜 소식이요. 주님의 송아지가 죽고 말았소.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아내가 당신은 어느 것이 주님의 송아지인지 결정짓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았소, 그러자 남편이 아! 나는 항상 흰 놈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그놈이 죽고 말았소.라고.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웃을 수도 있습니다. 마는 그러나 웃지를 마십시오. 언제나 죽는 것은 항상 주님의 송아지입니다. 금전상으로 어려움이 오면 절약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 바치는 돈입니다. 맨 처음으로 아끼는 돈은 헌금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은 맨 처음으로 지출되는 것입니다. ”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섬기지 못한다. “우리가 좋아하는 것들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마귀는 세상 보물을 사랑하게 만들어 인생을 멸망케 유혹합니다. 세상 보물에 대한 태도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관계와 태도를 결정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며 주여! 주여! 주여!라고 부른다는 단순한 사실이 그 자체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며 우리가 하나님의 절대적 요구를 인정하며 우리 자신을 주님께 굴복시킨다는 증거는 아닙니다.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누구를 섬기겠습니까? 두 주인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