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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형론의 길

wordlove 2021. 9. 24. 05:03

모형론의 길

 

본 주제의 글은 구약의 그리스도어떻게 설교할 것인가? 의 저자인 칼빈 신대원 설교학 교수인 SIDNEY GREIDANUS의 글을 요약하여 연재함을 알려 드립니다.

 

구약 본문을 해석할 때 반드시 신약으로 건너와서 이 원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 언약에 의해 어떻게 수정되어야 하는지 새 언약과 어떻게 조화하는지를 물어야 한다. (1) 구속 사적인 성경 해석 7가지.(구약인 경우): 구속 사적 해석(그리스도 중심적 설교=구속 사적 설교): 예수 그리스도의 빛에서 이 본문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본문은 신약에 나타난 대로 그리스도의 인격, 사역 그리고 가르침과 어떤 연관이 있는가? a) 이 구절은 예수 님에 대해 무엇을 말하는가? b) 구약의 이 구절에서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께로 가는 길은 무엇인가? c) 이 구절은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된 소식을 선포하는가? d)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 7 가지 길 중 어느 길이 예수 그리스도께로 확고하게 연결되어있는가? 알레고리적 해석 배제, 설교 주제와 목표에 맞춰 취사선택. a. 구속 사의 중심 요소: 창조: 혼돈을 자신의 구조화된 왕국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행위(1-2), 구약 시대의 구속: 범죄 타락한 이후에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열방의 빛이 되도록 그들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들(3-4),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 예수 님 안에서 모든 민족들을 구속하시고 자신의 타락한 창조 세계를 자신의 왕국으로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행위들(1-22), 새 창조: 악에 대한 하나님의 최후 승리와 자신의 완전한 왕국을 지상에 세우심(21-22) b. 구속사의 특징: a) 구속 사는 구약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설교하기 위한 기반이다. b) 알레고리적 해석은 구속 사의 견고한 기초에서 떠나 방황하는 것이기에 받아들일 수 없다. c.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택된 백성을 다루시는 이야기이다. 성경은 모든 행위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일들을 먼저 기록한다. 이러한 과정을 하나님이 주도해 왔다. 구속 사는 예수님을 향한 통일된 이야기이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구약의 다양한 길들(구약의 구속 사적 해석 7가지 길)

 

점진적 구속 사의 길

2. 약속-성취의 길

3. 모형론의 길

하나님께서는 구속 사에서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기 때문에 약속-성취가 구속 사 안에서 작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구속 사 내에서 규칙적인 유형들(patterns) 안에서(patterns) 행하시기 때문에 모형론도 구속 사 안에 그 기능을 발휘한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구속 계획을 약속에서 성취까지 점진적으로(progressively) 성취하심은 물론, 구속 행위의 유사성을 통해 일관되게(uniformly) 성취하신다. 따라서 신약 저자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하나님의 현재 적인 행위들과 구약에서의 구속 행위들 사이에 있는 유추들을 식별할 줄 안다. “ 이리하여 신약의 모형론은 복음 사건들 속에서 보다 충만하고 완벽하게 다루어지는 과거 역사의 반복적인 리듬을 드러내면서, 본질 적으로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한결같은 원리들을 추적하는 것이다 "특히 선약 저자들은 예수 님께서 메시아 시대의 도래를 알리고 계신다고 믿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행하신 구속 행위를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새 시대의 그림자와 예상 형태(prefigurations)를 모형으로 본다. 따라서 모형론은 유추(analogy)와 확대 상승(escalation)으로 특징지어진다. 모형론적 해석의 기초가 되는 주요한 전제 조건은 역사의 하나님께서 역사의 주인으로서 역사에서 구속 계획을 실현한다는 것이다. “ 신약의 모형론적 주해의 이론적 근거는 단순히 하나님의 언약의 역사 전체에 미치는 하나님의 목적의 연속성일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목적을 드러내고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만드시고 이용하시는 하나님의 통치권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비유들을 시간의 모래밭에 기록하신다.. "감추어졌거나 오직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것들은 이제 그 안에서 성취되는 교회-메시아적 공동체-에 드러나 있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신앙은 모형론적 해석의 필수적인 기초가 된다.

 

3.1. 모형론의 복잡성

신약 저자들은 일반적으로 " Typos "라는 단어를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하지 않는다. 이 단어는 신약에서 15번 나타나지만 그 손의 못 자국 "(20:25), " 교훈의 틀 ”(6:17), “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 ”(7:43), “ 산에서 네게 보이든 양식 ”(8:5) 둥과 같이 다른 의미들로 사용되고 있다. 데이비드 베이커(David Baker)typos가 전문적인 의미로는 결코 사용되지 않는다. 는 것과 " 실례 으로 번역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레온하르트 고펠트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우리가 알고 있는 한 이전 역사에서 장차 나타날 모습을 미리 표현하기 위한 용어로 하나의 표상(typos; 형용사 (typiko)이라는 헬라어 단어를 바울이 처음 사용했다. 하나님께서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모형적 방식(typikos), 즉 방식(typikos), 즉 종말에 교회를 다루시는 유형(pattern)이 되는 방식으로 다루셨다. ” 이스라엘의 장래 사는 교회가 경험하는 모형들(typoi)이다(고전 10:11). 고펠트는 다른 곳에서 오실 자의 모형 인 아담에 대해 말하는 로마서 5:145:14와 관련하여, “ 아담이 초래한 우주적인 대 파괴 속에서 바울에게는 아담이 하나님의 우주적 구원 사역 속에서의 미래의 아담 즉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비추시는 하나의 typos, 즉 사전 제시(advance presentation)가 된다. 용어 typos는 어떤 다른 자료에서는 정반대의 인상을 주는 ‘‘속 빈 행태’(hollow form) 일 수 있다. 바울은 주조 원형(moulding original)의 의미로 이미 친숙한 이 용어를 그 기본적 의미에 일치하는 전문적인 사용을 위해 채택할 수 있었다. 고 설명한다. 바울이 typos라는 용어를 전문적인 의미로 사용하기 시작했으나, 비록 베이커의 견해가 옳다 하더라도 전문적인 의미로 typos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신약 저자들이 여전히 우리가 모형론이라고 부르는 방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고펠트 말에 나는 동의한다. 보다 심각한 복잡성은 마태와 같은 저자들이 예수님의 생애와 모세, 엘리야, 이스라엘과 같은 구약 인물들의 삶 사이에 나타나는 병행 관계 양식들을 매우 창조적으로 제시한다는 것이며, 어떤 학자들은 이러한 병행 관계들을 모형들 혹은 모형론적 해석 이라고 부른다는 것이다. 얼 엘리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마태복음에서 그리스도의 그림은 특별히 모세와 메시아 사이의 랍비 해석적인 병행 관계에 대하여 시사한다.. 모세처럼 예수 님도 헤롯의 살육으로부터 구원받고,, 애굽에서 나와서 이스라엘의 12 아들들’(12 아들은 모두 유대인이다)을 부르고 산에서 율법을 주시며(5-7장에 나타난 소위 산상수훈-역자주), 10개의 기적을 행하시고(모세의 10가지 재앙처럼), 하늘로부터 만나를 공급해 주신다. 엘리스는 그 그림이 확실하지 않다 것과 적어도 마태가 그리스도를 이스라엘의 화신으로 염두에 두었다고 판단해도 좋을 것이다 라는 것을 인정한다. 리차드 론거네크는예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의 병행 관계들 에 대한 실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 약속된 아이,...혜롯의 학살에서 구원받으시고.... 애굽에서.... 나시고...... 물로 지나가시고,... 시험받으러,... 광야에 들어가시고,...‘이스라엘의,...‘ 열두 아들’을’ 부르시고..., 산에서..., 율법을 주시고,.. 열,.. 가지 기적을 베푸시고... 땅을... 정복하러 열두 명을 파송하시고,... 무리들을,... 하늘의 만나로 먹이시고,... 제자들,... 앞에서 변형되시고... 론거네커는 ‘그 복음서 저자가 제시한 것의 이면에는 공동체적 결속(앞서 살펴본 공동체 인격참조-역자 주)과 역사 속의 모형론적 일치들에 대한 유대교적 개념들이 존재한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은 옛 이스라엘의 화신과 이전의 신적 구속 사의 원형으로 묘사된다 ””라고 결론짓는다.. " 나는 마태의 이 모든 병행 관계들과 인유들을 모형들 이라고는 부르지 않겠다. 왜냐하면 모든 병행 관계과 인유가 예표론이라면 아무것도 예표론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우리가 이러한 병행 관계들과 인유들 모두를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하나의 다리로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모세가 바로의 학살에서 구윈 받은 모세에 관해 우리가 설교를 만든다고 가정해 보자(출 2:1-10)..2:1-10).. 만약 모세를 헤롯의 학살에서부터 구원받은 그리스도의 모형 이 되도록 우리가 설교를 모형론적으로 발전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출 2:1-10의 메시지를 놓치게 될 것이다. 요점은 이것이다. 신약에서 제시된 모든 병행 관계들이 다 모형이 아니며, 하나의 모형은 하나의 유사점 이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보다 통제되고 오늘날에도 구약에서 신약에 ·나타난 그리스도로 가는 다리로 사용될 수 있는 모형론의 길을 신약에서 식별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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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구약의 모형론 사용

모형론의 뿌리는 구약에서 발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이사야는 바벨론의 포로가 된 이스라엘에게 새로운 출애굽을 약속하기 위해 출애굽의 그림을 자주 사용한다. 바벨론에서 가나안으로 귀환할 때 이스라엘은 바다나 사막을 가로지를 필요가 없었지만 이것은 이사야가 사용하는 영상들이다. “ 너는 두려워 말라. 너를 구속하였고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바다 가운데 길을 큰 물 가운데 첩경을 내고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정녕 히 내가 광야에 길과 사막에 강을 내리니. "예레미야는 옛 언약의 관점에서 새 언약을 언급한다. 그것은 여전히 은혜 언약이지만 그 새 언약에서 하나님은 다음과 같이약속하신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러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에 세울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31:33), 이러한 예언에서 우리는 모형론을 특징짓는 요소들, 즉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일치와 단계적인 확대를 명확하게 본다. 선지자들은 역시 또 다른 다윗 왕을 약속한다. 하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내가 한 목자를 그들의 위에 세워 먹이게 하리니, 그는 내 종 다윗이라. 그가 그들을 먹이고 나 여호와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다윗은 그들 중에 왕이 되리니,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 "여기서 원래의 다윗 왕은 장차 오게 될 목자 왕에 대한 모형의 기능을 한다. 이사야는(65:17-25) 하나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할 것 이라고 예언한다. 우리는 또다시 모형론을 특징짓는 두 요소들인 이 땅과 새 땅 사이의 일치는 물론 점진적인 확대도 보게 된다. 더 이상 울음도 없고, 유아의 죽음도 없으며, “ 그들의 수고가 헛되지 않겠고, 그들의 생산한 것이 재난에 걸리지 아니하리니 이리 와 어린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

 

3.3 예수 님의 모형론 사용

예수 님께서 모형론을 사용하시는 목적은 과거의 구속 사건들과 자신의 사역이 일치함을 확정하고 단계적인 확대를 보여주시려는 것이다. 예수 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을 땅 속에 었으리라. 심판 때에 니느웨 사람들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들이 요나의 전도를 듣고 회개하였음이어니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그 후 다시 심판을 언급하여, “ 심판 매에 남방 여왕이 일어나 이 세대 사람을 정죄하리니, 이는 그가 솔로몬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땅끝에서 왔음이어니와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라고 말한다(12:40-42). 예수 님께서 불순종한 요나를 자신의 모형으로 시용한다는 것이 놀라움으로 다가올지는 모르지만, 여기서 병행 관계는 바다의 큰 불고기 뱃속에서 있었던 삼일 삼야와 뒤따르는 니느웨 백성들을 회개하게 만든 요나의 설교에 국한된다. 프란스는 하나님의 사역의 반복된 원리인 신화적 입지는 회개한 설교자의 파송에 놓여 있다. 그 설교자의 사명은 구원의 기적적인 행위에 의해 증명된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니느웨로 파송하신 것처럼, 예수 님도 자기 당대의 유대인에게 파송되셨다 그리하여 모형론은 사람들에게 보낸 하나님의 예언적 사자의 계승 속에 예수 님을 둔다. 이제 요나보다 더 크신 이’ (41)를 파송하심으로써,, 이렇게 오랫동안 계속된 하나님의 사역 방법은 그 정점에 이르게 되었고, 구원의 보다 위대한 행위 가운데 회개하라는 이 최고의 부름을 하나님께서 안정하실 것이라고 설명한다. 요한복음 3:14-15에서 예수 님은 자신을 모세가 들어 올린 놋 뱀(21:9)과 비교하여, “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고 말한다. 예수 님께서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악의 상정으로 작용하는 뱀에다가 자신을 비유하신 것은 또다시 이상해 보인다. 그러나 병행 관계는 들어 올려짐과 요구된 믿음과 그 결과로써 생기는 생명에 국한된다. 또다시 이러한 모형의 단계적 확대는 놀라움을 주는데, 이는 그 확대가 뱀을 보고 살았으나 나중에는 죽음뿐인 사람들에게서 인자를 믿고 영원히 사는 사람들에게로 옮겨 가기 때문이다. 예수 님께서 모형론을 사용한 또 다른 실례들은 마가복음 14:24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에서 발견된다. 그리고 요한복음 6:49-51에서 예수 님께서는 광야에 내리던 만나를 자신의 모형으로 보신다: “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나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gk는 이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산 먹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우리는 또다시 유추와 확대 상승에 주목하게 된다.

 

3.4 신약의 모형론 사용

바울의 모형론이 가장 분명하게 사용된 곳은 오실 자의 표상(typos)인 아담 ”(5:14)에서 typos " "라는 단어를 사용한 로마서 5:12-19이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아담 사이의 유추를 드러낸다: 각자는 새 창조의 머리이며, 각자는 모든 것 을 대표한다(18). 바울은 ~와 마찬가지로...... 인(just as`... as)이라는 접속사를 두 번씩 사용함으로써 그 유추를 강조한다(18-19) 아담은 그리스도의 모형이지만,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아담의 정반대 인물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이 반의 적인(antithetic)(antithetic) 모형론은 바울로 하여금 그 단계적인 확대를 훨씬 더 강조하도록 만든다. 그는 같지 않다 (not like)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한다.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또 이 선물은 범죄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15- 16). 그리고 그는 두 번이나 그리스도의 사역을 훨씬 더 효과적인 적으로(“ 훨씬 더 확실하게 "(much more surely) 묘사한다. “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 적더욱’ (영문 직역 훨씬 더 확실하게"역자 주) 하나님의 은혜와 또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많은 사람에게 넘쳤으리라 " 그리고 또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훨씬 더 확실하게)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이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리로다.(15.17). 유추와 확대 상승에 대한 이런 상세한 제시와는 대조적으로, 바울은 보다 단순한 형태의 모형론도 사용한다. 예를 들어, 그는 고린도전서 5:7에서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라고 기록한다. 이것은 매년 드리는 유월절 어린양들의 제사(모형들)와 원형(영어 ‘antitype’ 은 문자적으로 모형과 대조되는 대형’ 이라는 뜻이므로, 이 단원에서는 대형이라는 뜻이 더 적합하겠으나, 편의상 그 문맥적 의미로 일관하여 사용한 원형’ 으로 번역한다-역자- 주) 그리스도 사이에 모형론적인 관계를 세우는데 필요한 모든 것이다. 고펠트는 다음과 같은 요점을 제시한다. “ 바울은 피상적인 유사성이 아니라 사건들에 대한 신학적 본질에서 모형과 원형 사이의 일치점들을 찾는다. 예를 들어, 홍해에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험이 세례의 모형이 되는 것은 양자가 물을 통과하는 것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단지 각각이 하나님의 기본적인 구원 행위이기 때문이다 "월터 로엘스(Walter Roehrs)는 고린도전서 10:1-13, 로마서 5:12-19 그리고 로마서 4장을 분석한 후에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 이러한 문단에서 바울은 그것이 구약의 세 가지 이야기에 묘사된 대로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관계성과 그것이 신약에 관련된 대로 하나님께 대한 관계성과 사이의 상관관계에 대한 유추를 세운다. 그 유추의 공통적이고 통합시키는 요소로서, 그 유추는 모든 경우들에서 역동적인 말씀과 하나님의 주권적인 행위를 가진다 "모형과 원형 사이에 있는 이러한 하나님 중심적 연결을 고려하고, 모형론의 오용을 막기 위하여 우리는 세 번째 판별 기준을 첨가할 필요가 있다. , 타당한 모형론이란 단지 모형과 원형 사이에 있는 유추와 점진적인 확대는 물론, 모형과 원형 모두가 구속사에서 하나님의 행위와 의미심장한 관계를 반드시 드러내는 하나님 중심성(theoltricity)을 그 특정으로 한다는 것이다. 복음서 저자들은 종종 모형론을 보다 미묘한 방식으로 사용한다. 요한은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1:14). 영어 번역에서는 결코 모형론을 알아차릴 수 없을지 모르지만, 헬라어에서는 우리 가운데 거하매가 문자적으로 우리 가운데 장막을 치신 임이 명확하다 (‘장막을 치다 란 뜻의 동사 skénoo장막 이라는 명사 skene에서 파생한 것으로, 구약 성막에 임재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전문 용어인 shekinah shekinah와 동일하다-역자 주). 구약에서는 여호와의 영광이 성막에 충만했다 ”(40:34), 이제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님 안에서 이러한 모형의 성취를 선포한다. 다음으로 세례 요한은 예수 님을 다음과 같은 말씀으로 소개한다. “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1:29, 30. 예수 님의 나아오심에서 요한은 속죄를 위한 구약의 어린 양 제사의 성취를 본다(참조. 베전 1:19; 5:6 ), 마가는 모세가 금식한 40(34:28)을 회상하면서, 예수 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계셨다 "(1:13)고 진술한다. 산상설교에서 마태는 예수 님을 산에 올라가서 ”(5:1; 참조. 칠십 인 역 신 9:9) 새 시대를 위한 모세 율법을 선포하셨고,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신 ”(8:1; 참조. 칠십 인 역, 34:29) 새로운 모세로 묘사한다. 요한은 병사들이 예수 님의 다리를 꺾지 않았다고 보고하면서, “ 이 일들이 이룬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우지 아니하리라고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라고 설명한다(19:33, 36) 요한은 여기서 예수 님을 그 뼈가 꺾이지 않은 유월절 어린양(출(12:46; 9:12)의 원형으로 묘사한다. 신약의 다른 저자들보다 히브리서 저자는 모형론 사용에 있어서 더욱 유명하다. 그는 비록 “typos’라는 단어는 한 번만 시용했지만 복사나 스케치(hypodeigma, 8:5; 9:23; antitypos, 9:24), 그림자(skia, 8:5; 10:1), 상징(parable, 9:9)과 같은 다른 말들로 모형들을 가리킨다. 그는 독자들에게 점진적 구속 사를 환기시키면서 서신을 의미심장하게 시작한다. “ 옛적에 선지자로 여러 부분과 여러 모양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이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1:1-2). 프리 샤프(Jeffrey Sharp)는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 저자의 생각을 이해하는 열쇠는 그가 모든 성경을 근본적으로 구속사 적 관점에서 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데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인류를 하나님 자신과 화해시키려는 하나님의 오래된 계획의 궁극적인 성취이다 " 이러한 관점은 우리의 저자에게 옛 언약이라는 그 사건들, 제도들, 인물들과 함께 역사적 형이상학적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새 언약에서 실현될 하나님의 구속 계획의 실재에 대한 전조(foreshadow)와 투영(shadow) "임을 의미한다. 이 견해는 그리스도에 대한 많은 모형들이 구약에서 밝게 드러나게 만든다. 예를 들어, “ 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 이며 의의 왕 이고 평강의 왕 로서의 멜기세덱은 하나님의 아들과 닮았다 “(7:1-3). 모세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 하나님의 집에서 충성하였다. 예수님은 모세보다 더욱 영광을 받을 만한 것이... 모세는 장래에 달한 것을 중거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온 집에서 사환으로 충성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집 맡은 아들로 충성하였다 ”(3:2-6). 대제사장 역시 그리스도의 모형이다.(2:14큰 대제사장 이라는 표현을 주목하라-역자 주) 대제사장은 사람들의 죄에 대해 속죄 제사 를 행하는 사람으로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대제사장의 그림자가 된다(2:17; 8:1). 또한 염소와 송아지의 피 로 제사하는 대제사장은 자신의 피로 영원한 구속을 얻는 제사를 드리는 대제사장을 그림자의 형태로 미리 보여준다.(9:12-14; 10:1-10). 게다가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오직 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신다. ”(9:24-28), 그래서 구약의 성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닌 참 장막 을 그림자의 형태로 미리 보여 준다(8:2), 히브리서의 저자는 첫 언약 보다 나은 ” “ 두 번째 언약 ”(8:6-13)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그리고 그는 그리스도를 새 언약의 중보자 로 보아, “ 첫 언약 때에 범한 죄를 속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신다 ”(9:15), 고펠트는 히브리서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린다. “ 모형론은 비교 형식의 관계성이며 양적으로라기 보다는 질적으로 배열된다. 모형은 본질 적으로 원형의 축소판이 아니라, 미래의 실재에 대한 윤곽이나 본질적인 특징들을 나타내는 구속 사의 상이한 단계에 써 나타나는 예표(prefiguration)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