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마 18:21-35
2. 본문 중심 진리: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히 용서해야 함을 비유를 통해서 가르치셨다.
3. 주제; 용서
4. 테마; 용서해야 할 이유
5. 명제; 용서는 진정한 자유와 치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가능성의 명제)
6. 설교 목적; 왜 어두운 삶의 고통을 사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인식시켜 용서를 통해 진정한 치유와 자유를 누리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7. 질문제기: 왜 어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지 못합니까? (Why)
8. 중심 단어: 다음과 같은 “이유로”
9. 전환 문장; 용서는 진정한 자유와 치유를 경험하게 합니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은 용서하지 못합니까?
10. 대지
12. 제목: 용서가 자유와 치유를 가져옵니다.
여러분은 어두운 감옥 생활을 해 보신 적이 있나요? 물리적인 감옥 생활만이 감옥 생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어두운 영적, 정신적 감옥 속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찰스 스탠니라는 작가의 용서란 책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비극적인 삶을 산 사람을 만났습니다. 짐이란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짐은 의학박사가 되기를 원했습니다. 열심히 공부하여 뛰어난 성적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러나 대학 진학 시 아버지는 아들 짐이 집을 떠나는 것을 허락지 않고 농장 일을 거들며 집에 머물도록 했습니다. 짐의 꿈은 아버지의 반대로 산산조각이 나고 만 것입니다. 짐은 23세에 아버지에 대한 쓰라림과 원망을 마음 가득 품은 채 집을 떠났습니다. 짐은 가는 곳마다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영원한 우정이란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느껴졌고 그의 마음은 거부와 격리 감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 직업 저 직업 찾아다니며 전전긍긍했지만 어는 곳에서도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그를 진정으로 아끼고 돌봐 주던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결혼했습니다. 결혼한 지 3주가 지난 어느 날 짐은 아내에게 분노를 폭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짐의 가정생활은 지옥 같은 40년 세월이었습니다. 짐은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고 노쇠하여, 자신의 몸을 스스로 돌보지도 못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어, 그의 생애를 마감하는 날까지 짐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린 극심한 내적 고통은 계속되었습니다. 이 모든 것은 그가 10대 소년이었을 때 경험했던 아버지로부터의 거부와 상처를 해결하지 못한 필연적 결과였습니다. 짐은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가 결국 아버지를 용서하지 못했고 그 용서하지 못한 마음이 결국 자신을 어두운 감옥 속으로 내적 고통으로 몰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리스도인들은 무한히 용서해야 함을 비유를 통해서 가르쳤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 두 번까지는 용서하라! 그러나 그 이상을 용서한다는 것은 비겁한 짓이다 ”이렇게 고발과 정죄와 비판이 난무하는 현실 속에서 예수님께 사랑을 배웠던 베드로는 어느 날 주님 앞에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까? “베드로의 질문에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22절 보십시오. “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할지니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무제한의 용서를 가르치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무제한 적으로 용서하면서 살아야 함에도 현실을 그렇지가 못합니다. 우리도 용서하지 못함으로 어두운 영적 감옥 생활을 많이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왜 용서를 잘하지 못하는지 그 이유를 밝힘으로 참으로 어두운 영적 감옥의 삶에서 해방되어 자유와 치유의 기쁨을 누리기를 원합니다.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를 잘못할까요?
먼저,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25-27)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이 무자비한 종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잘 모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인에게 지고 있는 빚이 얼마나 됩니까? 22절에 “ 일만달트 ”라고 합니다. 일만 달란트가 얼마나 큰 액수인지 얼른 상상이 안 됩니다. 일 달란트는 그 당시 일꾼 한 사람이 12,000일 계속해서 일해야 버는 품 삵입니다. 일만 달란트를 오늘의 시세로 12억 원가량 된다고 합니다. 어마어마한 액수입니다. 25절을 보십시오. “ 갚을 것이 없는지라 ”갚고는 싶어도 능력이 없는 것이 큰 문제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이 종이 진 큰 빚의 액수는 하나님 앞에서 지은 우리의 죄의 값이라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앱 2:1”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살려 셨도다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죄와 허물 때문에 죽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이 종의 문제는 자신의 빚이 얼마나 큰지를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큰 빚에서 탕감받은 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도 잘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26-27을 보십시오, 이종이 주인에게 애걸복걸하니 주인이 불쌍히 여기사 그 빚을 다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탕감받은 근거는 오직 주인의 긍휼 하심 때문입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 때문입니다. 죄로 죽었던 우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로 값 주고 사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은혜의 빚 진자들입니다. 그런데 이종의 말을 자세히 들어 보십시오. 주인 앞에서 애걸복걸하면서 “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다 ”주인님! 시간만 좀 주시면 나는 갚을 능력이 있으니 갚아 드리겠습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이 종은 자신을 여전히 신뢰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무력감을 깨닫지를 못합니다. 이런 그리스도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잘 모릅니다. 그러니 주님의 은혜로 모든 죄를 다 용서받고도 그것이 얼마나 큰 사랑인지 잘 모릅니다. 은근히 자기가 선해서 용서받은 줄로 착각합니다. 이 사람은 영적 소경입니다. 여기에서 영적 교만이 나옵니다. 그 결과는 무엇입니까? 남을 잘 용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신 남을 잘 정죄하고 잘 판단합니다. 우리가 남의 잘못의 횟수를 세고 있다는 것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찰스 스탠니는 그의 책 “ 용서”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한 첫 번째 단계는 “ 우리의 빚이 완전히 삭감되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고했습니다. 여러분이여! 용서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신 용서의 주님을 만나십시오. 이미 용서의 주님을 믿고 계신다면 나를 억만 죄악에서 용서하신 주님의 크신 은혜에 대한 깨달음이 다시 불일 듯 여러분의 심령 속에 일어나야 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크신 십자가 사랑으로 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은 은혜받은 사람임을 고백하십니까? 그리스도인은 용서받은 사람입니다. 주님의 은혜가 임하면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용서받은 은혜를 깨닫고 있나요?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용서를 잘못할까요?
둘째는, 이웃을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28)
주인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빚을 탕감받은 이 종은 기쁨으로 집으로 돌아오다가 자기에게 작은 빚진 동네의 한 친구를 만났습니다.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자 지금은 형편이 어려우니 조금만 참아다오 라는 그 친구의 요구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맥 살을 잡고 감옥에 집어넣었다고 했습니다. 이 무자비한 종의 문제는 자신이 용서받은 큰 죄인이었음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친구가 자신에게 빚지고 있는 빚의 크기가 주인으로부터 탕감받은 자신의 액수와 비교해 볼 때 너무나 작다는 것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28절을 보십시오.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친구의 빚의 액수가 얼마나 됩니까? “ 100데나리온 ”입니다. 일 달란트가 12,000 데니리온입니다. 자신이 주인으로부터 탕감받은 액수에 비해 친구의 빚은 1212만 분의 일에 불과합니다. 물론 이것은 비유입니다. 어마어마한 자신의 죄를 탕감받는 은혜를 누렸지만 한 형제의 작은 죄는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입니다. 형제의 눈에 티는 잘 보이지만 자기 눈의 들보는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방귀 퀸 놈이 더 큰소리친다고 하지 않습니까?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 이것이 인간의 부패성입니다. 이웃의 허물은 더 크게 보입니다. 여기에서 나는 너는 용서 못 한다는 미움이 싹 터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또 한 이 무자비한 종은 자신의 친구는 하나님이 맺어준 가까운 사이라는 것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입니까? 억만 죄악에서 용서받은 사람들입니다. 28절에서 그 종이 “ 동료 한 사람을 만나 ”여기 동료라는 것은 같은 주인을 섬기는 가까운 친구라는 사실을 성경은 강조합니다. 29에서 “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그 동료라는 말도 바로 가까운 친구라는 것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33절에서도 주인이 이 악한 종을 책망하실 때에 “ 네 동료 ”라고 호칭합니다.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아우성치는 그 사람이 누구라는 말입니까? 알고 보니 같은 교회 다니는 교우 사이입니다. 같이 예수 믿은 부부 사이. 고부 사이. 부모 자식 사이, 등등 이런 가까운 사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배신하고 은 30 양에 팔아먹은 자가 바로 3년 동안 주님으로부터 배웠던 제자 가룟 유다였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잘 모르면 옆에 가까이 있는 형제도 잘 모릅니다. 그래서 그 가까운 친구를 용서하지 못하겠다고 멱살을 잡고 흔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정 감옥에서 고통받은 사람은 누구인 줄 아십니까? 용서받지 못하는 사람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 누가 더 고통 속에서 살까요?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사실 감옥에 갇혀있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혀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28절에 “ 친구의 목을 잡고 즉 모가지를 비틀어 ”라는 말에서 이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잔인함과 분노 그것이 폭발하여 폭력적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두움에 갇혀있는 시한폭탄과도 같습니다. 언제 터질지 모릅니다. 찰스 스탠니는 그의 책 “ 용서 ”에서 다른 사람을 용서하기 위해서는 “ 다른 사람을 성장의 도구로 생각하라. 우리가 용서하는 못하는 사람들을 우리의 성장과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도구로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어린 시절 배다른 형님들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요셉은 형님들에 대한 증오심으로 분노하며, 밤잠을 설치며 복수의 불꽃을 피우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결정적으로 형님들을 용서했습니다. 그 근거가 창 50:19-21”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 하셔나니 ”요셉이는 하나님의 눈으로 자기의 지난 과거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우리 가문을 구원하시기 위한 선한 목적으로 나를 미리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게 하셨고 결국은 애굽에서 왕 다음의 자리인 국무총리까지 이르게 했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의지하여 형님들을 용서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고 생각되는 그 이웃을 하나님이 허락하셨음을 믿으십시오, 그리고 그 상처를 통해서 저와 여러분이 성장하는 계기로 삼을 수가 있다면, 오늘의 저주가 오히려 내일의 축복이 되지 않겠습니까? 아멘! 왜 어떤 그리스도인들이 용서의 삶을 잘 살지 못할까요?
3. 하나님을 잘 모르기 때문이다. (31-35)
이 무자비한 종은 자신도 모르고 이웃도 잘 모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32~33절 보십시오. " 내가 네 빚을 탕감하여 주었거늘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복수하라고 용서해주신 것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더 죄지으라고 죄에서 자유를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종은 하나님의 은혜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용서받은 우리에게 주님의 바람이 무엇입니까? 바람 이상으로 당위적인 의무를 요구하십니다. 용서받았다면 용서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의 인격을 닮기를 기대합니다. 용서는 주님을 닮은 인격입니다. 용서의 삶이야말로 주님께 영광을 돌릴 수가 있습니다. 또 한 이 무자비한 종은 공의의 하나님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34절을 보시면, “ 주인이 노하여 ” 이종은 분노의 하나님을 몰랐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를 얼마나 미워하는지요? 그 죄를 미워하시기 때문에 갚을 수 없는 우리의 죄를 위해서 죄 없으신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나 대신 못 박아 죽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하나님을 반쪽짜리 하나님으로만 아는 데 있습니다. 여기에서 타락이 생깁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잘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십자가 크신 은혜도 잘 모릅니다. 하나님은 심판의 주님임을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34절 보십시오. “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에게 넘기니라 ”이 구절의 의미는 용서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용서하지 못할 때 그도 감옥 같은 어두운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겠습니까? 35절 “ 너희가 각각 중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천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겪는 어두운 감옥과 같은 삶은 어떤 삶일까요? 의사의 연구에 의하면 용서하면 심장 박동이 떨어지고 혈압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반면 남에게 상처 주는 말을 하면 심장 박동이 76에서 99로 올라간다고 합니다. 용서받지 못한 사람보다 용서하지 못하는 그 사람이 더 큰 어두움 감옥 속에서 자신을 파괴하면서 산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용서만이 자유와 치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어떻게 내적인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요? 성경의 치유 방법은 십자가 앞에 와서 내 죄를 깊이 회개하는 것과 그리고 용서하지 못하는 그 이웃을 예수님처럼 무조건 용서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 밑에서 자란 아들이 성인이 되면 아버지처럼 알코올 중독자가 될 확률이 훨씬 크다는 통계 조사를 아시지요. 그 이유는 바라봄의 법칙 때문이라고 합니다. 두 부부가 서로 닮아간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것처럼 알코올 중독자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아버지처럼 안되어야지 이빨을 갈면서 아버지를 계속 바라보면서 자랍니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면 어느 날 그 미워했던 아버지 행실을 그 아들이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미워하면서 닮는 것입니다. 마치 유전병처럼 그 악습이 그대로 자녀에게도 전이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무엇을 바라보아야 합니까? 하나님을 거역하며 산 온갖 죄로,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랑은 용서의 사랑입니다. 이 주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우리의 과거를 더 묻지 않습니다. 아니 기억지도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의 용서를 받은 저와 여러분입니다. 주님의 용서와 사랑을 깨닫고 감격하여 이 주님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을 믿었습니다. 주님을 믿자 나의 모든 죄를 다 용서하셨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의 나의 모든 죄가 다 용서받은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렇다면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주님의 용서를 본받아 내가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그 사람을 주님처럼 용서하실 수 없겠습니까? 용서만이 내가 진정한 자유와 치유를 누리는 길입니다. 내가 치유받고 내가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라도 용서하십시오. 용서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와 치유를 누리게 됩니다. 용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