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일 1:3-5
2. 본문 요약: 사도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들은 것을 전하는데 하나님은 빛이시기에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고 말했다.
3. 본문 주제: 하나님과의 효과적인 교제 원리
4. 명제: 하나님과의 교제 시 망각하기 쉬운 요인들이 있다.(가능성의 명제)
5. 목적: 하나님과의 효과적인 교제를 위해서 알아야 할 원리를 소개하기 위해서......
6. 질문제기: 하나님과의 효과적인 교제 원리는 무엇일까요?
7. 전환 문장: 하나님과의 교제 시 망각하기 쉬운 요인들이 있다. 하나님과의 효과적인 교제 원리는 무엇일까요?
8. 대지
1) 첫 번째 원리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두 번째로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관하 계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3) 세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9. 제목: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이유는 하나님과 교제하는 인생으로 삼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인생은 하나님과의 교제하는 여정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하면 하나님과 교제를 마음껏 누릴 수 있는지를 가르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교제 시 망각하기 쉬운 요인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효과적인 교제 원리는 무엇일까요?
첫 번째 원리는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에서 요한은 ” 우리가 그에게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의 교제의 출발점은 언제나 하나님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어나는 많은 문제점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못하는데 기인합니다. 사실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더불어 시작하기 때문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을 믿고 있다고 가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가정하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 안에서 매사에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더불어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1860년경 이후로 사람이 모든 것의 중심부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모든 생각과 철학과 사색이 사람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람이 우주의 중심에 위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포함하여 모든 것이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다루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권위를 세우며 인간 자신을 신으로 착각하며 믿고 신뢰하며 자신의 필요나 조건이 언제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 같은 자세가 인류의 큰 실수였으며 대부분 오해의 근원이었습니다. 성경은 인간은 하나님과 더불어 매사를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일 사람으로 더불어 출발한다면 우리는 진리에 관한 모든 생각에서 잘못된 길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일단 인간에서 출발하면 그다음의 모든 것이 인간의 생각과 논리에 맞추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는 하나님의 시각에서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님에 관한 가르침 안에서 사람을 바라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인간을 제대로 알 수 없게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언제나 인간으로 모든 것을 시작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이 생각합니다. 나는 문제를 갖고 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안다. 과연 하나님이 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을까? 하지만 성경 말씀에 의하며 이런 마음가짐은 애당초 근본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며 문제를 안고 출발하는 것이며 하나님께 아주 오만 불순한 태도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첫 번째 답은 ” 여러분 자신을 잊어버리고 하나님을 바라보라 “이것이 성경으로부터 듣는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더불어 출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 적인 신앙과 다른 모든 이단적인 신앙의 특징은 사람에게 필요로 하는 것을 만족시킬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필요를 만족하게 하려 노력하기 때문에 잘못된 이단들이 인기를 얻으며 성공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채워질 수 있다고 선전합니다. 자신들에게 오면 만사형통을 준다고 속입니다. 참믿음과 이단을 시험해 불 수 있는 가장 좋은 도구가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사람을 최우선에 놓지 않습니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합니다. ” 태초에 하나님이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의 중심에 계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더불어 교제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문제는 대부분 인간 자신을 중심부에 놓고 자신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우리 인생에게 생긴 첫 번째 문제는 사람이 하나님께 순종하는 대신 자신을 높여 하나님과 동등하게 하려는데 있다고 말합니다. 인간이 자신을 첫 번째 자리로 세우려는 삶은 결국 파멸로 이끌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우리 조상들의 모습이었고 우리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과의 바른 교제의 출발점은 우리의 필요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의 필요를 말하기 전에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과의 효과적인 교제 원리는 무엇일까요?
두 번째 원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에 관한 계시를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시작해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에 관해 물어보면 ”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이라면 왜 이런 고통이 많습니까? 왜 전쟁을 허용하십니까? “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와 같은 생각도 오류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받아들여야 하고 계시의 말씀이 오직 성경 안에만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사도 요한은 ”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것은 이것이니 “라고 말합니다. ” 이것은 하나님에 관한 오랫동안 사고와 묵상과 독서를 한 결과로 그리스 철학과 현대사상을 연구한 결과로 얻은 것이다.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 나는 하나님을 잘 몰랐었고 예수 님을 만나기 전까지 그리고 예수 님과 함께 3년간 지내면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듣기 전까지는 하나님에 대한 내 생각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 님이 하시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분이 언제인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느니라. 너희는 나와 함께 있어 왔는데 나를 모르느냐? 너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였느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바로 예수 님이 내가 말하는 모든 것의 근거를 제공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나는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반복할 뿐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성경의 입장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두 개의 갈림길에 서 있습니다. 성경 말씀을 우리의 모든 것을 판단하는 전적 권위의 위치에 올려놓을 것인가 아니면 철학과 같은 인간 사고에 우리 판단 기준을 둘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모든 주장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이기 때문에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하더라도 입을 다물고 계시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이성이 어느 정도까지 우리를 끌고 갈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진리에 대한 결정적 근원이 되지 못합니다. 이성이 하나님을 아는 참된 지식에까지 이끌어 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철학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논리적인 논쟁을 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으면 그 원인도 또 다른 원인의 결과였을 것이며 이런 방식으로 계속 추적해 나가다 보면 최초의 원인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처음의 원인은 하나님이실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논리도 어느 정도 맞을 수 있겠으나 이런 것을 믿는다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요한은 이런 철학적 방식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논쟁이나 하나님의 실존에 대한 여러 증거가 어느 정도 옳다고 할 수 있겠으나 우리가 하나님과의 연합과 교제와 그분에 대한 지식으로까지 인도할 수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나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에 철저하게 의존해야 한다는 것을 말씀드립니다. 믿음은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우리의 무능함을 인정하는 가운데 이런 진리의 말씀으로 찾아오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말씀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더불어 출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계시의 말씀을 구약 시대의 선지자에게 주었습니다. 십계명을 통해서 도덕법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오직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안에서만 하나님을 직접 알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교제를 제쳐 놓고 하나님과 직접 교제함으로써 하나님을 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예수 님은 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나의 노력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하는 분은 안 계십니까? 예수 님은 “ 나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계시의 말씀을 믿지 않고서는 결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 요한 사도는 자신이 예수 님을 만나기 전에도 하나님에 대한 것을 믿었으며 하나님에 대한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섰지만 예수 님을 만나 그분의 말씀을 듣고서 그분을 알게 되었고 그때야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루터도 “ 예수 그리스도를 모르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알며 하나님과 더불어 참된 사귐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님을 여러분의 그리스도와 유일하신 주님으로 믿습니까? 그 신앙이 참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과의 효과적인 교제 원리는 무엇일까요?
세 번째 원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5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한은 4절에서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했습니다. 문제는 어떻게 기쁨이 충만하게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자비로우시고 긍휼 하신 분이라는 말을 기대할 것입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기대할지 모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와 긍휼에 관심을 두기 전에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부터 출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잘못된 개념을 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감상적인 개념을 가지게 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늘 웃음을 지으시는 사랑의 하나님으로만 알기 쉽습니다. 그러다가 전쟁이나 큰 재난을 만나면 당황하며 왜 하나님은 이런 일을 주시는가 하며 회의감을 품고 하나님을 떠납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출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은 빛 안에서 완벽한 의와 공의를 함께 공유하신 분이시라고 말씀합니다. 어떤 분들은 왜 하나님의 사랑보다 거룩하심에서 출발해야 합니까라고 질문을 던집니다. 답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오직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서만 가능했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십자가가 그렇게 중요합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고 자비와 긍휼히 풍성하신 분으로만 생각한다면 십자가는 사실상 무의미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사랑밖에 모르신다면 사람이 죄를 지었을 때 그분이 하실 수 있는 것은 단지 용서해 주시는 것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죽으심을 빼놓고는 하나님이 용서하신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에 악을 차마 보지 못하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십자가에 담긴 의미도 상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십자가를 평가절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용서는 하나님의 나약하고 타협적인 것의 결과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 자신의 거룩한 방식에서 죄가 다루어질 때만 죄를 용서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거룩한 방식이란 십자가에서 행하신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출발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구원 계획과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출발해야만 성육신과 십자가 부활과 성령의 강림 등 모든 구원 계획이 이해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시작하는 것만이 참된 기쁨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길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서 출발한다면 우리는 가장 낮은 곳까지 겸손하게 될 것이며 참으로 가치가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으로부터 한 푼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라는 것과 그로부터 받은 것은 무엇이든지 그분의 은혜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예수 님 안에서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알고 누리는 사람은 진정 기쁨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의 기쁨이 충만해질 수 있을까요? 요한은 “ 여러분의 삶에서 이 같은 축복을 원하며 이런 기쁨으로 충만하기를 원한다면 여러분의 삶이 기쁨으로 충만하려면 잘못된 모든 죄를 제거해 버리기를 바랍니다. ”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나의 무거운 죄를 제거할 수 있습니까?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이유입니다. 예수 님이 오셔서 거룩하신 하나님 앞으로 나를 인도하기 위해서 바로 내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고 이 예수 님을 믿는 자를 죄 없다 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롬 4:25“ 예수는 우리가 범죄 한 것 때문에 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이 예수 님을 여러분의 구주로 믿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십시오.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즉 예수 님과 교제를 누리는 사람의 축복이 무엇입니까? 롬 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여러분은 예수 안에 있습니까? 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사람은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또다시 죄 때문에 넘어지더라도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여러분을 변호하실 변호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찌 기쁘지 않습니까? 요일 2:1 “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 시라”여러분은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여러분을 변호하실 구주 예수 님 안에 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하나님과 교제하는 축복을 충만히 누리시는 여러분이 남은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