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일 2:7-11
2. 본문 요약: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는 자요 미워하는 자는 어두움에 거하는 자이다.
3. 본문 주제: 참된 그리스도인
4. 본문 테마: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
5. 명제: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증명될 수 있다. ( 평가적 명제)
6. 목적: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를 소개하기 위해서
7. 질문 제기: 형제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8. 전환 문장: 참된 그리스도인의 증거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증명될 수 있다. 형제를 사랑한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9. 대지
10. 제목. 형제 사랑
갈등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에 대해 최종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것은 기쁨으로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앞에서 말했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경험이나 느낌이나 감각에 의한 특별한 방법을 통해 측정하는 것과는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안전하고 분명하게 증명될 수 있는 객관적인 테스트입니다. 사도는 이어 형제 사랑에 대한 말씀으로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사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언급했고 교제를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계속 설명했습니다. 이제 사도는 여러 방해 물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한 가지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는 일에 실패하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교제에 많은 지장을 주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부여되는 많은 축복을 상실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7-8절에서 “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바 말씀이거니와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라 ”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여기 새 계명의 ‘새와’ 옛 계명의 ‘옛’이란 말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답은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에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서로 사랑하라는 권면과 형제를 사랑하라는 요청의 말씀이 바로 ‘옛 계명’이기도 하며 동시에 ‘새 계명’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나는 너희가 이미 알고 있는 것을 너희에게 말하고자 한다 ”는 구절을 보면 옛 계명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필수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틀림없는 옛 계명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이 서로 사랑하라는 개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새것이 될 수 없습니다. 레 19:18” 원수를 갚지 말며 동포를 원망하지 말며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나는 여호와이니라. “주님은 구약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옛 가르침을 다시 한번 강조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구별되었음으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볼 때 오래된 계명이라고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이 전에는 도저히 불가능했던 것이 지금에 와서 가능해졌다는 차원에서 바라볼 때 새로운 계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와서 행하신 일로 말미암아 이미 주어진 옛 계명을 새롭게 했으며 우리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셨다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요한은 8절”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고 했습니다. 그는 ” 지금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 님 안에서 그리고 여러분 안에서 이미 실현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도 사랑하라는 계명을 받았지만 이 계명을 지키기가 참으로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이 계명을 지키며 완성된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분은 구약에서 의미하는 그 뜻을 가지고 인간을 사랑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계명이 그분 안에서 실현되었고 그분 안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된다.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완전히 새로운 방식으로 이 계명을 지킬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분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부여받았으며 또한 성령의 공급하시는 힘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처음 이 계명을 주실 때의 의도대로 주위의 형제자매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면에서 이 계명은 새로운 계명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 형제를 사랑하라고 외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교회 봉사를 요청하거나 헌금 드림을 가르치는 것은 순서가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기 때문에 복음의 가르침을 행할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주어졌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새로운 생명이 즉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하신 것처럼 그들도 할 수 있고 그리스도가 사랑하신 것처럼 그들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 계명은 새로운 계명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실현되었기 때문에 그분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은 모든 사람의 삶에도 실현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배경을 근거로 사도는 그리스도인에게 서로 사랑할 것을 권고하고 있습니다.
2. 갈등 심화
형제를 서로 사랑하라는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그리스도가 새로운 생명의 질서를 도입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으셨다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분이 새로운 질서를 도입함으로써 이전과 달라진 것은 빛과 어둠의 차입니다. 8절 ”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 빛이 벌써 비침이나 “는 말씀을 다시 한번 보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고 후 5:17에서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고 말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모든 것이 바뀌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새로운 세상에 놓인 새로운 사람들이기에 어느 것도 이전의 것과 똑같을 수가 없습니다. 요한 사도도 이 세상이 어둠의 영역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서신 1장에서 빛 가운데 행하는 것과 어둠 가운데 행하는 것에 대해 강조했던 것입니다. 골 1: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에서도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은 이 같은 내용의 말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주님도 요 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이 같은 가르침들이 그리스도인들이 취해야 할 입장에 대한 근본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온전하게 설명하기 위해서 11절“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을 살펴보십시다. 요한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은 어둠 가운데 행할 뿐 아니라 그들 안에도 어둠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어둠이 그들의 눈을 멀게 했기 때문에 어느 곳을 향해 나아 가는지조차 볼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될 때에는 두 가지 일이 생기게 됩니다. 첫째는 그들의 눈이 열려 앞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며 둘째는 완전히 다른 영역에서 거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인 된 사람은 어둠의 왕국에서 빛의 왕국으로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그들의 위치뿐만 아니라 그들 자체가 전적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 세상의 신은 눈을 멀게 했지만 이제 그들의 눈은 뜨게 되었고 빛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되어 새로운 영역에 거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다른 왕국의 시민으로서 다른 사람이 되었습니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라면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지켜야 하며 여기에 어떤 핑계도 용납될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사랑의 계명을 완수하지 못한데 대한 어떠한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두 번째는 우리가 새로운 질서 속에 들어왔는가 들어오지 않았는가에 대해 알 수 있는 것은 사랑의 태도로 하느냐 아니하느냐로 식별한다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9절 “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 속에 있는 자요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라고 딱 부러지게 말합니다. 이것은 완벽한 테스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무엇이라고 말을 하건 상관없이 여전히 어둠 가운데 있으며 그 어둠이 여러분 안에 내재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한다면 어떤 결함이 있다 할지라도 빛의 영역 안에 거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으로 누구인가 하는 것은 우리의 지적 의견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전통주의자이지만 형제를 사랑하지 못한다면 그 전통은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한 아무 가치가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교리에 대해 지적으로 말할 수 있으며 믿음을 변증하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믿는 그 진리를 부인하는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큰 테스트입니다. 요한은 11절 “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거하는 자요 그리스도의 사랑을 갖지 못한 자. ”라고 말합니다. 주님은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주님은 “ 주님이요 선생이라고 부르는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겨 주었을진대 너희는 얼마나 많이 서로의 발을 씻겨 주며 사랑을 나누어 섬겨야 하겠는가? ”라는 의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그분에 속한 자들이라며 이와 같이 사랑과 섬김의 삶을 살아야 된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3. 전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인가 아닌가는 형제들에 대한 태도로 구별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형제를 사랑한다면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합니다. 반면 형제를 사랑하지 않은 자는 어둠에 거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둠의 왕국의 질서 속에 있다는 뜻입니다. 딛 3: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이런 모습들이 어둠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본래 모습을 감추고 외적으로 아름답게 그럴싸하게 드러내 놓고 있습니다. 이 세상은 외관상으로 좋은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반대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서로를 미워하고 이기적이고 탐욕스럽고 투기하며 질투하며 악하고 자기중심적인 것이 바로 이 세상의 삶의 특징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질투심이 정치적인 제도로 나타난 것이 사회주의 공산주의라고 정의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11절 “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니니. ”라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은 삶이 어둠의 영역에 거하며 이와 같은 태도에 의해 주도 받으며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불신자의 비극이란 자신조차도 주관하지 못하고 오히려 주변 환경과 상황에 의해 주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사람들은 언제나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지배를 받습니다. 따라서 일이 잘 진행되면 기뻐하고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즐거워합니다.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화를 내고 기분 나빠합니다. 그들은 우연이나 운에 의해 즉 우연히 만나는 사람이나 우연히 일어나는 일이나 자신의 상태나 분위기에 지배받습니다. 그들이야말로 어둠의 희생자이며 언제나 불확실하고 의지할 데 없는 삶을 살수밖에 없습니다. 사도 요한은“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해 그와 같은 사람들의 문제는 삶의 참된 본질에 대해 진짜로 눈이 멀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고 뿐만 아니라 죽음 건너편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도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을 대면해 서게 될 것에 대해서도 전혀 인식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영원한 운명에 대해 눈이 멀어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남을 사랑하지 못하는 본성을 가진 사람은 언제나 문젯거리를 찾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모욕을 받지 않았는데도 모욕감을 느낍니다. 언제나 무엇인가 그들을 흥분하게 만듭니다. 항상 무엇인가에 의해 화를 냅니다. 이들은 참으로 예민하고 다루기 어려우며 계속해서 다른 사람을 문제에 빠지게 하는 사람입니다. 매사에 부정적인 사람입니다. 이것이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사도의 표현입니다.
4. 대단원
그렇다면 누가 그리스도입니까? 누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까? “요한은 10절 “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며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전혀 다른 영역에 사는 사람입니다. 빛의 영역에 사는 사람입니다. 그들은 삶을 지배하는 목적을 갖고 있으며 운이나 우연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눈이 열려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이해하고 있으며 그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계속해서 넘어지거나 자빠지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의 가장 좋은 점만을 빼내어 말하려는 사랑의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죄의 본질을 볼 수 있으며 자신도 이전에 미움으로 가득 차 있었으며 어둠 가운데 거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귀가 그들로 하여금 미워하는 삶을 살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며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삶을 살았다는 것도 깨닫게 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용서함이 허락되었다는 복음을 듣게 됩니다. 그들은 지옥에 갈 수 밖에 없는 자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구원받았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 사랑이 전 생애에 걸친 그들의 자세를 지배해야 한다는 것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주위 사람들이 영 안이 열리기 전 자신의 모습과 너무나 똑같다는 사실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끼게 됩니다. 그들은 죄의 희생자인 연약한 사람을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하며 그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아 죄로부터 구원받게 될 수 있도록 기도합니다. 그들은 미워하는 자를 미워하는 대신 사랑하기 시작하고 ” 우리는 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다 “는 말을 하면서 이들을 향한 연민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지식에 의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왔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됩니다. 그들은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에게 영광을 돌리기 원합니다. 주님은 빚지고 있는 종의 예화를 통해 설명하셨습니다. 마 18:23-35절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주인에게 나아가 간청하여 빚을 탕감받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친구가 그에게 와서 똑같이 요청했을 때 그는 멱살을 잡고 ” 안 돼 너는 다 갚아야 만해 “고 호통을 쳤습니다. 주님은 이런 사람은 자신이 용서받은 자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용서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남을 사랑하고 용서해 주려는 마음이 있음을 보면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에 기뻐하고 행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