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일 2:1-2
2. 본문 요약: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것
3. 본문 주제: 죄
4. 본문 테마: 죄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5. 명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죄이다. (선언적 명제)
6. 교훈: 죄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 소개하여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서
7. 질문 제기: 죄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8. 전환 문장: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죄이다. 죄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9, 대지
10. 제목: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죄
1. 갈등
오늘날 가장 위험한 것은 인생을 너무 외형적으로만 보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는 병 자체를 치료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병으로 인해 드러난 징후들만 치료하려는데 있습니다. 어쩌다가 죽음이나 재난 전쟁 병과 같은 무서운 일을 만나면 다시 인생에 대해 묵상을 하게 됩니다. 자신에 대한 불안감을 인식하며 인생에서 무언가를 진실로 해결해야만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예민한 상태가 지나가면 며칠이 못 되어 다시 마음먹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가게 되곤 합니다. 성경은 실제로 이런 인생의 문제야말로 가장 중요하게 관심을 두고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고 성경은 이런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치료법을 제시합니다.
2. 갈등 심화
성경이 말하는 치료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삶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발전시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 가장 중요한 핵심을 무시하기 때문에 어떤 것도 여러분에게 주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겉으로 보이는 징후들을 다루지만, 문제는 그 근원에 있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우리를 근본적 원천으로 인도합니다. 이 근본적 원천이란 모든 것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입니다. 모든 불행은 궁극적으로 인생이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와 방황하는 데서 기인하며 하나님과 잘못된 관계를 유지하는 것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소위 믿음의 영웅이라는 사람을 보십시오. 히 11장을 보면 그들도 오늘 우리처럼 똑같은 세상에서 세상의 흥망성쇠나 현재 일어나는 모든 일과 같은 일을 겪으면서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서 그들에 대해 인정하는 것은 특별히 예외적인 무엇인가를 그들이 소유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승리하는 삶으로 이끌었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의 비결은 딱 한 가지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주변 상황에 의해 좌지우지되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은 사람답게 처신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혹독한 시련으로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극단적 형태로 역경을 참아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 있는 그들의 모습을 대할 때 어떠한 것으로도 깰 수 없는 평온함과 침착함과 소망에 차 있는 것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수 있는 이유에 대해 히브리서는 그들의 믿음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하나님을 올바르게 아는 가운데서 그들의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비결은 히 11;27“ 믿음으로 애굽을 떠나 왕의 노함을 무서워하지 아니하고 곧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같이 하여 참았으며 ”그들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주변 상황이나 기회나 여건이나 분위기 등에 구해 받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 말씀이 주장하며 제시하는 모든 것은 바로 이런 가르침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유지한다면 미래를 바라보면서 담대하게 “ 올 테면 와 봐라! ” 무엇이든지 합력해 선을 이룰 것으로 나는 믿는다.라고. 외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특정한 문제들을 좀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시키려고 노력하라는 가르침을 제시하기보다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올바로 설 수 있도록 가르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옛날 아브라함을 부르셨듯이 순간적으로 우리의 안락한 상태를 깨뜨리는 것 같은 일을 하도록 부르실 때도 눈에 보이지 않는 그분을 바라보면서 나아갈 수 있어야 합니다. 또 한 모세처럼 전혀 이해하기 힘든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찌할까 망설이는 상황에 부닥친다 할지라도 히 11:25“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라고 평가받았듯이 주저하지 않고 하나님의 길을 따르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바로 이런 믿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이 서신을 기록한 때는 주 후 85년경으로 추정합니다. 요한은 나이가 90세쯤 되었을 때였습니다. 교인들에게 “ 나의 자녀들아 ”라는 표현들이 그것을 반영합니다. 어쨌든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든 그로서 그는 어려운 시련과 환난과 문제에 직면한 교인들과 어린 교회를 보고 있었습니다.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는 마지막 충고를 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요일 2:1-2“ 요일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요일 2:2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요한은 교인들을 바라보면서 지난날 자신을 돌아보며 언제든지 만날 수 있는 두 가지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첫 번째는 자기만족이라는 것이며 두 번째는 그와는 반대로 희망에 대한 포기의 위험성이었습니다. 첫 번째는 타협의 위험성이고 두 번째는 낙심의 위험성이었습니다. 우리 중 대부분도 이 두 가지 위험성 가운데 서서 방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아주 좋다가도 그다음 순간에는 매우 낙망하고 실망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따라서 양극단의 위험성을 피하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도 요한은 두 가지 양면성을 골고루 균형 있게 유지할 방법을 제공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하나님의 무한하신 은혜 가운데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시는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사도는 유언과 같은 말씀으로 하나님과 항상 동행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 관계를 유지해 나간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발생하건 그다지 큰 문제가 되지는 못할 것입니다.
3. 전환
그런데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방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무엇입니까? 죄라고 말합니다. 죄가 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 오늘날 사람들은 죄라는 단어를 싫어합니다. 자유주의 신학도 세상 철학의 영향을 받아 인간의 원죄를 부인합니다. 그래서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외면하고 도덕적인 모델로서의 인간 예수로 끌어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단호하게 먼저 죄를 거론합니다. 죄를 모르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는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진정으로 알기 원하고 그분과의 교제를 원한다면 죄가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죄입니까? 죄란 하나님이 우리에게 제시해 주신 거룩한 법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또는 성경 말씀에서 정죄하는 모든 것을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이 죄를 짓지 말라는 말씀이 십계명에 나옵니다. “ 너희는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며, 너희는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등등 ”의 명령을 하지 않았거나 죄를 지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하는 말씀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죄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상관할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 중에는 완벽한 금지 사항들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금지 사항들을 어긴다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는 하나님이 계시하신 법에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또 한 죄는 양심을 거스른 것을 의미합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옳고 그른 것을 추정할 수 있는 검사기를 줬습니다. 아무도 변명하지 못합니다. 어떤 옳지 못한 일을 할 때 내 양심은 그것이 옳지 못한 일이라고 알려줍니다. “ 그것을 하면 안 됩니다. ”는 음성이 우리 안의 양심이 하는 기능입니다. 그것이 옳지 못한 것인 줄 알면서도 그 잘못을 계속한다면 양심의 죄를 무시하는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양심의 소리를 무시하는 것도 죄를 짓는 일입니다. 성경은 그런 경우 단호히 그 일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살 전 5:22“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악하게 보이는 어떠한 것이라도 하면 안 된다고 말씀합니다. 또 우리의 삶은 진리 즉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욕망 때문에 지배받을 때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진리에 관해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일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왜 내가 원하는 일을 포기해야 하는가? 반문합니다. 이들의 마음에서 나오는 말들이야말로 욕망이나 일시적 충동이나 격한 감정이나 쾌락 같은 것들에 의해 기대고 있는 현대의 무법적 사고방식을 대언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죄 된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삶 중심에 있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상 즉 세상의 방식이나 세상의 전반적인 태도에 의해 지배받고 있다는 말입니다. 소위 신전통주의자 칼 바르트는 성경의 객관적 진리를 믿지 아니하고 듣는 자의 자기감정에 와닿는 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 된다는 성경의 주관성을 주장함으로써 현대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과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권세가 인간의 기분과 감정에 따라 좌우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모습이 바로 죄입니다. 인간만이 최고의 존재인 것처럼 여기면서 삶을 이끌어 나가는 생활이야말로 죄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 최선의 삶은 경건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행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늘 생각하며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를 생각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웨스트민스트 신앙고백의 문답에 “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며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죄짓는 것을 피하는 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사는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아울러 가장 고귀한 삶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을 존귀하게 해 드리는 것이며 그분의 거룩한 뜻에 합치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 내가 무엇을 하기 원하는가? ”는 질문 대신에 “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와 같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위대한 소망으로 출발하고 그 같은 자세로 삶을 이끌어 나간다면 우리는 죄 된 삶에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는 말씀이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죄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까? 먼저 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고 하나님에 의해 단죄되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죄는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거룩한 본질을 철저하게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죄라는 것 그 본질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 된 것을 객관적으로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 우리 삶에서 가장 큰 문제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나 변명이나 하고 우리가 저지른 그것에 관해 설명하는 데만 급급합니다. 우리는 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아야만 하고 죄의 추잡하고 무서운 성질과 파괴적인 속성을 바라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참된 죄의 속성을 바라볼 때 죄를 미워하고 죄를 멀리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죄라는 못된 것이 모든 수난과 고통을 귀한 주님께 주어지게 한 장본인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죄를 지어서는 안 되겠다는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죄 때문에 주님이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이 대항하는 죄인들을 참으시고 인내하셔야만 했던 것도 죄 때문이었으며 십자가에 피를 흘리신 것도 죄 때문이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안다면 그리스도인이 죄를 더 지을 수 있게 되겠습니까? “ 내가 이것을 씀은 너희에게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또 다른 이유는 죄는 복음과 복음 전파의 능력을 손상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능력을 제공합니다. 죄를 짓는다면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며 복음에 대해 스스로 악평을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는 항상 악한 양심으로 인도합니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좋지 못한 느낌이 들게 됩니다. 다른 모든 사람에게 예민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죄로 인해 기쁨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죄는 행복과 기쁨을 빼앗아 가버립니다. 그리고는 정죄의 느낌 안에 자신을 가두어 버립니다. 죄는 의심을 낳습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기도할 자격도 없다고 느낀 적이 없습니까? 여러분이 해서는 안 될 일을 했을 때 죄의식 속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할 힘조차 사라지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사도 요한은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한다면 언제 닥칠지 모르는 역경의 순간에 진정 하나님 앞에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해서라도 평소 죄를 멀리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죄는 항상 언제나 절망의 구렁텅이로 인도한다는 것입니다. 한번 죄를 지으면 오랫동안 계속해서 죄를 짓습니다. 죄의 종노릇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며 단지 버림받은 존재라는 의식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됩니다. 이 얼마나 처참한 모습입니까?
4. 대단원
그러나 여기 위로의 말씀이 있습니다. ”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 여기 ”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이니 “이 말은 여러분이 지은 모든 죄악까지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더 이 상 마귀가 주는 절망 속으로 넘어가지 말기를 바랍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나아와서 우리 죄악을 낱낱이 아뢰면 됩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나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십니까? 예수 님을 안다면 하나님을 아는 것입니다. 또 한 그분이 하나님 앞에 우리의 대언 자시며 변호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확실하고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자신의 생명을 단번에 그리고 영원토록 화목 제물로 드리심과 성령 하나님을 통해 힘과 생명을 공급해 주심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과의 교제를 계속할 수 있게 해 주시는 대언 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드립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