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일 2:15-17.
2. 본문 요약: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3. 본문 주제: 세상에 대한 사랑
4. 본문 태마: 세상의 의미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이유
5. 명제: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선언적 명제)
6. 교훈: 세상의 의미와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할 이유를 소개하기 위해서.
7. 질문 제기: 세상이란 단어의 의미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8. 전환 문장: 그리스도인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 세상이란 단어의 의미와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9. 대지
10. 제목: 세상에 대한 사랑
1. 갈등
요한 사도는 자신이 요구하는 수준이 너무 높아 성도들이 지키기에는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게 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인들에게 힘과 능력이 주어졌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악한 자를 이길 수 있다는 것 등에 대해 명확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 그는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고 요청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며, 형제들을 사랑하며, 동시에 세상을 사랑하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먼저 본문의 가르침에 대해 잘못된 인식 두 가지를 알아봅시다. 첫 번째는 금욕주의적 해석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해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회를 떠나 격리된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 같은 잘못된 해석은 수도원 운동을 이끌어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이탈해 소위 종교적 삶이라고 불리는 생활을 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종교적’인 것과 ‘세상 적’인 것 등으로 그리스도인을 분류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을 더 사랑하지 않는다는 보장을 마치 어떤 제도 같은 것을 통해야만 될 것처럼 이해했습니다. 두 번째는 본문에 대한 ‘불안전’하고 ‘부분적’인 해석입니다. 요한이 제시한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대신 이들은 ” 우리는 세속화되는 것에 대해 죄의식이 없다. ”라고 말합니다. 이들이 말하는 세속화는 세속화를 별로 대수롭지 않게 이해하는 것으로 본문에서 말하는 사도의 의도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을 두 가지로 다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분류는 “ 우리는 술을 먹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춤을 추지 않으며 노름을 하지 않는다. ”라고 말합니다. 세속화에 대한 그들의 개념이란 이와 같은 정도입니다. 그 대신 그 이외의 것을 세속화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분류는 세속화를 정치나 사회 활동에 대한 관심을 두는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들은 “ 그리스도인은 정치적인 것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속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정치적인 것에 관심을 두지 않는 한 세속화에 대한 죄의식을 느끼지 않습니다. 이들의 문제는 세속화에 대한 개념 중에 일부분만 취하고 나머지를 철저하게 무시해 버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이해는 본문의 의도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속화에 대한 성경의 의미를 정확하게 정의 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2. 갈등 심화
무엇보다 사도 요한이 교훈하는 내용에서 ‘세상’이라는 단어가 무슨 의미인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 단어는 산이나 골짜기 강물 같은 창조된 물리적 세상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심지어 ”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는 말씀을 두 눈을 가리고 자연에 귀의하거나 아름다운 것까지 보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런 의도로 기록한 것은 아닙니다. 금욕주의 자들은 그리스도인은 결혼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결혼에서 주어지는 성적 관계를 죄악시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세상은 피조물이나 가족 관계 또는 사업이나 직장같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일들에 종사하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또 한 정부나 공공 기관 같은 것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다 하나님이 이미 허락하신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본문이 말하는 세상의 의미는 어떤 단체나 사람의 견해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무시한 상태에서,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과 세상에 근거해 자기 멋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을 등지고 거슬러 반역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런 삶은 하나님을 전혀 개의치 않고 오직 세상과 세상의 삶에만 신경을 쓰며 자신들의 본능과 욕구에 지배받는 오늘날 보통 사람들의 전형적인 삶의 사고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6절이 답을 하고 있습니다.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에서 정욕이라는 단어는 지나친 욕구나 애착을 의미하며 그 자체를 놓고 볼 때는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오용되거나 과용될 때 정욕으로 바뀌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은 고전 7:31”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세상 물건을 쓸 때 잘못 사용하거나 지나치게 사용하는 것을 정욕이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허락한 합당한 욕구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욕구들 때문에 지배당하며 우리 삶의 모든 생각마저도 이런 욕심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되면 결국 정욕의 죄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는 ‘육신의 정욕’이라고 표현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본문에서의 뜻은 육체에 예속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정욕을 감각이라는 말로 대신할 수 있습니다. 그는 지금 감각적 만족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 또는 음식에 너무 욕심을 내는 사람들을 포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그러한 것들에 전문적인 지식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배가 고프면 먹는 것은 당연한 본능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먹기 위해 또는 마시기 위해 산다면 육신의 정욕에 빠진 것입니다. 먹고 마시는 것이 삶을 지배하고 삶의 주된 관심사가 된다면 그것은 곧 육신의 정욕대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육신의 정욕으로만 그친 것이 아니라 사도는 계속해서 ‘안목의 정욕’에 대해서도 언급합니다. 안목의 정욕이란 잘못된 가치관에 따라 사는 사람들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외관과 같이 겉으로 드러난 것만을 갖고 판단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눈을 통해 죄를 짓습니다. 우리가 보는 것과 세상이 우리에게 보게 하는 것들이 죄를 짓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마 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여기서 안목의 정욕이란 이처럼 음욕의 마음마저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안목의 정욕은 눈에 띄고 멋지고 웅장하게 보이는 외적인 것들을 즐거워하는 허영심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 세상을 볼 때 우리의 눈을 자극하는 멋지고 대단해 보이는 모양들로 가득 찬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이런 외적인 모습은 삶에서 주된 관심이 사람들의 외모에 있는 것들을 즐겁게 해 줄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자신의 외형과 외형이 주는 인상만을 위해 사는 사람만큼 비참한 자가 없습니다. 많은 시간 돈 정열이 외모 가꾸기와 옷을 입는데 들어갑니다. 외모만이 아닙니다. 옷과 마찬가지로 집에 대해서만 관심을 두고 떠드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해 주신 눈을 가지고 사람들을 단지 외관상으로 보이는 화려함을 바라보며 안목의 정욕에 의해 지배받은 사람이야말로 비참한 것도 없습니다. 또 다른 것은 ‘이생의 자랑’입니다. 자기 영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적당합니다. 이것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째로 이 말은 야망을 포함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것을 포함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자기 외에 다른 사람을 어는 정도 희생시켜야만 자신에 대한 자랑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것을 자랑합니까? 출신에 대한 자랑, 가족에 대한 자랑, 명성에 대한 자랑, 지위에 대한 자랑, 영향력에 대한 자랑, 돈에 대한 자랑, 자식에 대한 자랑 등등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랑은 나의 영혼과 하나님을 존귀하게 하며 영화롭게 하는 일과는 전혀 무관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자기 자랑만을 생각하며 이것만을 위해 시간과 돈과 정열을 사용합니다. 자기보다 못한 인생에 대해 무시하고 우월 의식을 갖고 당신은 몇 평 아파트에 살아? 라는? 자세로 사람들을 대합니다. 이같이 무엇을 이루어 내고자 하는 야망이나 다른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것이나 어떤 형태로든지 자신이 영광을 얻고자 하는 생각이 바로 이생의 자랑에서 자랑하고자 하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삶의 자세를 두고 사도 요한은 ”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자랑하지 말라 “고 했던 것입니다. 세 가지 중에 가장 좋지 못한 것이 이생의 자랑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영적인 죄가 육적인 죄보다 더 나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육신의 죄는 다소 당연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지만 반면에 영적인 죄는 그리스도의 본성을 전적으로 거슬리는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의 죄를 비난하면서도 이생의 자랑에 대한 죄의식이 사라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또 한 육신의 죄를 짓지 않았기 때문에 무죄하다고 말하면서 출신이나 신분이나 돈이나 학력으로 인해 교만해지거나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육에서 영으로 올라갈수록 죄는 더욱더 교묘하게 다가오며 그리스도인의 삶에 더 많은 타격을 가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3. 전환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면 안 될까요? 요한은 이 말씀을 지키지 않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분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부인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그는 15절”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여러분은 하나님과 돈을 하나님과 이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도 약 4:4”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믿는 바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한다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을 부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곳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여기 ”...께로부터 “이라는 말의 의미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았으며 아버지 하나님의 본성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들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을 간직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요한은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신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육신의 정욕이나 안목의 정욕이나 이생의 자랑으로부터 기인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죄를 짓지 않을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주님을 보십시오. 주님은 이처럼 육신의 정욕의 죄를 한 번도 짓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허영이나 자기 과시의 자세나 외모 같은 것을 일절 믿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온유하고 겸손하셨으며 이 세상의 천박하고 사치스러운 모든 것과 외형적인 것을 드러내는 일에 즐거움을 느끼는 사람들과 대조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분이 영광의 주님이시며 우리 영혼의 구주가 되신 분이십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은 어떠했습니까?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 주님이 말씀하시는 온유는 세상이 원하는 것과는 정반대입니다. 3절”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 심령이 가난한 자는 자신들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며 전혀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어떤 것에 근거해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교만하고 거드름을 피우는 야심만만한 사람과는 전혀 다릅니다. 이것들이 주님이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그분은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23:11”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는 주님의 말씀에 근거로 하여 이 세상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주관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나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던 분이십니다. 주님은 입는 옷이나 그들의 출생이나 조상이나 소유 같은 것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셨고 그저 사람들의 영혼에만 관심을 가지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분을 따르는 모든 사람은 그분과 더불어 영혼을 귀하게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영혼외에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없어질 것들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관심은 없어질 것이 아니라 바로 사람의 영혼이라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죄인을 보실 때마다 저 영혼이 하나님을 몰라서 저렇게 되었구나 라며 영혼을 불쌍히 여겨셨습니다.. 주님은 죄인을 불러 회개시켜 구원의 선물을 주시고자 오셨습니다. 이 주님을 모시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이 모든 것에 대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갖는 것과는 전혀 다른 개념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겸손해지고 온유하기를 원합니다. 그들이 갈망하는 명예란 사람들 사이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마 25:21”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와 같은 축복된 말씀을 듣게 될 장차를 기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이런 자세는 이 세상의 진짜 모습과는 정반대가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와 같이 우리는 갈 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4. 대단원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마지막 이유는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곧 구원의 위대한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17절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영원하리라. “여러분 중에 외모에 자부심을 가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늙고 쭈굴 쭈굴 해질 것입니다. 그리고 죽을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랑할 만한 그 어느 것도 사실상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덧없는 것들 안에 영광을 찾으려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것입니까? 이 모든 것이 다 파멸될 것이며 멸망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위해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영원토록 멸망하게 될 영역에 속했다는 사실을 즉 복음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요한 사도는 여러분은 자신의 소원만을 이루고자 하는 데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데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영원하리라.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원토록 거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매우 든든한 기초 위에 여러분의 인생의 집을 짓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는 영원하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