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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혜 안의 성장

wordlove 2022. 9. 18. 15:11

1. 본문: 요일 3:6-10

2. 본문 요약: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를 짓지 않는 사람일까?

3. 본문 주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

4. 본문 테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함

5. 명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아직 완전한 자가 아니다. (예언적 명제)

6. 교훈: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죄짓지 않는 완전 자라는 논쟁에 대한 성경의 답을 소개하기 위해서…….

7. 질문 제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죄를 죄지 않는 완전한 자인가?

8. 전환 문장: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아직 완전한 자가 아니다.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죄를 죄지 않는 완전한 자인가?

9. 대지

10. 제목: 은혜 안의 성장

 

갈등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요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분명히 명심할 것을 부탁합니다. 이 세상을 살면서 기쁨을 누리려면 기다리고 있는 영광의 길을 가고 있는 하나님 자녀로서의 신분을 꽉 붙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를 따라오는 몇 가지 확실한 사실들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거듭나지 않는 사람처럼 살면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인식함에 우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필요성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신약 성경 가운데 가장 논란이 많은 것 중 하나입니다. 이 구절들이 의미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서 살면서 완벽해질 수 있으며 행동뿐만 아니라 생각이나 마음이나 모든 다른 면에서 죄악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먼저 이와 같은 구절을 보면서 편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무엇보다 논쟁하려는 자세를 지양해야 합니다. 우리는 쉽게 한쪽 편에 서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죄 없는 완전성을 지지하거나 반대편에 섭니다. 교회사를 보면 이런 본문에 대해 논쟁하면서 자신은 옳고 상대방은 틀렸다고 부정하면서 서로의 증오심을 키우는 죄를 범했다는 것입니다. 죄를 짓지 않는 완전성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때로 죄를 지으며 온전하지 못한 행위를 할 때가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2. 갈등 심화

그렇다면 이런 말씀들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요? 6절을 봅시다. 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범죄 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어떤 특정한 죄인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인가? 9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등의 말씀은 개인적으로 행하는 죄 된 행위를 의미하는 것인가? 9그도 범죄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났음이라 는 말씀은 사람이 하나님에서 났기 때문에 죄를 짓지 않는다는 말인가? 10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이와 같은 말씀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이 구절은 과연 성도의 온전함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인가?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결코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까? 먼저 문법을 이해해야 합니다.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되어있습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되는 헬라어의 동사는 현재형입니다. 헬라어 동사의 현재형은 계속적 의미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들은 어떤 특정한 행위보다는 성품이나 주된 습관을 서술하고 있습니다. 6절을 죄를 계속해 짓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9절 하나님으로부터 난자마다 죄를 계속해서 습관적으로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를 계속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 났음이라고 읽을 수가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죄를 계속 짓는 자와 불법의 행위를 계속하는 자들에 대해 말하고 있으므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는 일을 계속하지 아니하나니 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요한은 개인적인 어떤 죄의 행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요한은 습관적으로 죄를 계속해 짓는 사람들의 상태에 대하여 말합니다. 여기서 요한이 진짜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상태나 신분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것이라 여겨집니다. 그는 불의한 자와 의로운 자들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분명하게 그는 우리의 자녀 됨에 대해 말함으로써 3장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것에 대해 말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가 말하는 진짜 문제는 그리스도인은 어떠한 사람이냐 라는 것입니다. 의로운 자는 남자나 여자나 할 것이 없이 의로운 삶을 삶으로써 자신이 의로운 자란 사실을 보여 줍니다. 반면에 불의한 자는 의롭지 못한 삶을 삶으로써 자신이 의롭지 못한 자라는 사실을 입증해 줍니다. 이것이 그가 마귀에 대하여 확실하게 말하는 내용입니다. 8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는 말씀입니다. 범죄성은 마귀의 특성이며 본성이며 습관입니다. 그것이 마귀가 사는 방식입니다.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한 자입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 죄를 짓고 있습니다. 요한은 계속 죄를 짓는 자는 자신이 마귀가 가진 본성을 가지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며 아직 그리스도가 가진 새로운 본성을 받지 못한 자입니다. ”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특정한 죄의 행위에 관한 것이 전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해석하면 이 구절이 죄 없는 완전함에 대한 교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결론을 말하자면 사도가 여기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말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죄 없는 온전함을 믿는 어떤 사람들은 사도가 오직 몇몇 그리스도인에게만 말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 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6그 안에 거하는 자마다 범죄 하지 아니하나니 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는다면 절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 거한다는 말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지 않아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장은 중생의 교리를 부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거나 없거나 둘 중의 하나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없으면 그리스도인이 절대로 아닙니다.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라고 했습니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했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하루는 그리스도인으로 있다가 다음 날에는 그리스도밖에 있을 수가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분 안에 거합니다.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사람이 몇몇 특별한 사람에 불과하다는 말은 맞지 않습니다. 지금 그는 모든 그리스도인에 대해 말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의 일반적 경향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난자라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하나님의 씨가 여러분에게 들어왔다면, 여러분이 신의 성품에 참여한 자라면, 이런 성품이 삶에 반영되어 나타나는 것은 당연합니다. 반면, 마귀의 성품의 특성은 계속해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가운데 거하는 것입니다. 그런 삶의 전체적 분위기는 죄를 계속해 습관적으로 짓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거듭난 자들과 본성 안에 거룩한 씨를 부여받은 자들에게는 이런 것이 더 해당 사항이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어둠의 왕국으로부터 빛의 왕국의 시민권자로 이전되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빛 가운데 거하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죄 없는 완전함에 관한 내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분명 아니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더 이상 어둠 가운데 거하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거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들 삶의 일반적 조건이나 지위는 그들 존재의 전반적 수준은 의로움에 속해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그들이 의로운 자이며 거룩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 온전하고 완벽한 자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구원받았으나 구원받았다는 사실이 죄가 없고 절대적으로 온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아직 죄인 된 자들과 본질에서 다른 자들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가르침입니다. 사도가 말하는 것은 그 안에 거하는 자 는 죄를 계속해 짓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씨가 이들 안에 거하면 이들 안에 있는 새로운 본성은 죄짓는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만들어 준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수준에 관한 전반적 문제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들도 비록 도덕적으로 고개를 높이 치켜들고 다닐 수 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본질에서 그리스도인에 비해 낮은 등급에 처해 있는 자들입니다.

 

 

3. 전환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수준은 어느 정도입니까? 그들은 다른 등급 즉 아주 높은 수준에 있습니다. 비록 때때로 죄를 짓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땅 밑바닥까지 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을 알기에 죄를 고백하고 회개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다시 죄를 사해 주십니다. 그러고는 다시 빛 가운데 계속해 나아 나갑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죄 없는 온전한 삶의 상태를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감사하게도 그들은 자신이 새로운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자신 안에 의로운 씨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전의 방식으로 살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으로 이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죄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되어 완벽한 사람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의 능력에는 제한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왜 하셨는가? 왜 하지 않으셨는가? 식의 질문은 우리가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경험을 통한 사실과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을 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지혜와 영원한 뜻 가운데서 구원의 계획이 이 같은 방식으로 진행되도록 선택하셨다는 말이 명확하지 않을까요? 내가 예수 님을 믿는 순간 사탄은 떠났습니다. 그러나 죄의 세력은 즉시 우리 안에서 소멸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일을 점차 하도록 선택하셨습니다. 영적으로 위치는 분명 예수 안에 있지만, 현실적으로 내 안에 죄의 습관은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는 의인이지만 동시에 죄인인 신분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정의했습니다. 9절의 는 단어도 의미심장한 뜻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씨를 뿌립니다. 하지만 만개한 꽃을 보기 위해 아마도 몇 주 몇 달 몇 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의 신앙의 어린아이로부터, 청년, 어른에까지 자라는 은혜 안의 성장에 대해서도 배웠습니다. 이것이 성화 구원의 방식입니다. 3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이것은 성화 구원에 대한 진행과 발전을 말합니다. 이런 구절을 이런 식으로 해석하지 않는다면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에서 말한 내용을 부인하는 것이 됩니다. 2: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 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이 내용도 요한의 목적은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게 하는 데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이 구원받은 즉시 온전해진다면 무엇하러 이 말을 했겠습니까?

 

4. 대단원

그러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도 아직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는 이 사실은 우리가 자신을 정결하고 깨끗하게 씻으며 성경 말씀을 매일의 생활에 적용하도록 노력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룩한 씨 즉 성령님이 내 안에 있기에 하나님이 내 안에서 성화의 일을 시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계속해 성화의 일을 진행하실 것이며 결국 온전함에 이르기까지 이끌어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죄를 보여 주며 나에게 가르쳐 주신 말씀들을 생활 속에 행하며 계속해 그런 삶을 살도록 요청하는 것입니다. 이 땅의 하나님의 자녀는 완전한 사람이 절대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에게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라는 놀라운 약속을 기억하십시오. 나는 나의 매일의 삶을 돌아보면서 죄를 인정하고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이런 삶은 하루에도 몇 번 반복되어야 하며 칼빈은 평생 해야 할 일이라고 조언하고 있습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은 자신은 완전하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자신의 죄를 숨기고 고백하지 않으려는 태도입니다. 하나님 앞에 내가 철면 피지 어떻게 또다시 죄를 고백해라는 자세는 영적 겸손이 아니고 영적 교만입니다. 주의 십자가 은혜를 의지 않은 불신이요 불순종입니다. 그렇게 하면 나의 영혼은 완고하게 되어 하나님과 나 사이는 점점 멀어지고 마는 것입니다. 불순종은 성령 충만을 방해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솔직하게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죄를 통애 자복하는 그 모습이 겸손입니다. 그 심령을 주님이 기쁘시게 받으십니다. “ 애통해하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요 가장 위험한 마음은 회개하기를 싫어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성경은 완악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사랑의 주님 앞에 곧장 달려가서 내 죄를 고백하는 마음을 주님은 절대 외면하시지 않습니다. 이것이 십자가 은혜를 잘 아는 은혜에서 성장한 신자의 모습입니다. 6·25 때 전쟁 때 부산만 남았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피난 온 교인들에게 기도들 부탁했다고 합니다. 그때 부산 초량 교회에서 전국 목사 장로 250명이 집회를 열었다고 합니다. 주 강사가 박형룡, 박윤선, 한상동 목사였고 주제는 회개기도였다고 합니다. 집회가 끝난 그다음 날 1/5,000 확률이라는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했다고 합니다. 회개 없이 믿음, 용서, 치유, 화목, 부흥, 구원이 없습니다. 회개하는 곳에 성령이 역사합니다. 회개하는 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합니다. 회개하는 심령이 은혜에 강한 자요. 신앙이 성장하여 의로운 삶으로 열매 맺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의로운 삶으로써 내가 하나님의 자녀 됨을 확증해야 합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