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플롯이 있는 설교

죄 된 본성

wordlove 2023. 7. 16. 15:47

1. 본문: 2:13

2. 명제: 마음의 빈 공간은 하나님이 아니면 죄로 채워진다

3 제목: 죄 된 본성

 

1. 갈등

고 팀켈 목사님의 글을 편집해서 올립니다. 세상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에는 대부분이 공감합니다. 기독교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가장 큰 문제는 죄입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이 ''라는 개념을 불쾌해하거나 터무니없는 소리로 치부합니다. 이는 기독교가 말하는 죄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반응입니다. 기독교의 '' 교리는 인간 본성을 절망적이고 비관적으로 본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이들은 진리에서 한 걸음도 더 나가지 못합니다. 죄에 대한 기독교의 교리를 제대로 이해하기만 하면 인간에게 소망을 가져다주는 엄청난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죄의 교리는 도대체 무엇을 가르칩니까?

 

2. 갈등 심화

죄란 하나님 앞에 서기를 바라지 않는 절망적 상태입니다. 1849, 덴마크의 유명한 철학자 쇠렌 키르케고르는 매력적인 글 한 편을 썼습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는 책에서 그는 성경에 뿌리를 둘 뿐만 아니라 현대인들이 금방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를 규정했습니다. "죄는 하나님 앞에 있는 그대로 서기를 바라지 않는 절망적인 상태. 죄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가 되기를 바라며 참 자아와 동떨어진 정체성을 추구한다.”이게 무슨 뜻일까요? 다들 어딘가에서, 또는 무언가로부터 스스로 남다르고 독특한 존재라는 정체성을 얻습니다. 그런데 키르케고르는 인간이란 그저 일반적인 차원에서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을 으뜸으로 사랑하고, 그분을 중심으로 삶을 꾸려 가고, 그분을 토대로 자신의 정체성을 구축하도록 만들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무엇이든 다른 것으로 그분의 자리를 대신하는 건 죄입니다. 흔히 죄라고 하면 우선 '거룩한 규정을 위반하는 행위'를 먼저 떠올리지만, 키르케고르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계명이 십계명의 첫 줄을 차지하는 속뜻을 정확히 꿰뚫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그밖에 다른 요소들을 삶의 의미와 목적, 행복의 중심으로 삼고 그 위에 자기 정체감을 세워 가려는 게 죄라는 것입니다. 어니스트 베커는 죽음의 부정으로 퓰리처상을 받았습니다. 베커는 글을 시작하면서 자존감을 갈망하는 꼬맹이들의 필요에 주목하고 그 욕구가 곧 '삶의 조건'이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인간은 '우주적 의미를 절박하게 추구한다는 뜻입니다. 가치를 향한 인간의 욕구는 워낙 강렬해서 정체성의 토대가 될 만한 것이면 무엇이든 어김없이 '신격화'하게 마련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을 대단히 비종교적인 인물로 여기는 이들조차도 열정적으로 진지하게 경배하고 예배할 대상으로 바라봅니다. 베커는 로맨틱한 사랑을 본보기로 듭니다. 현대인들은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자기 영화(self glorification)의 욕구를 이제 사랑하는 상대에게서 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로맨스만이 아니라 일과 직업적인 성취에서 우주적인 의미를 구하는 이들도 숱하게 많습니다. 하지만 이는 끊임없는 낙심의 밑거름이 될 뿐입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그 어떤 관계도 신만이 감당할 수 있는 부담감을 배겨 낼 도리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상대가 자신의 '전부'라면, 그의 사소한 결함도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이를 신의 자리까지 끌어올리면서 무엇을 기대합니까? 스스로 아무짝에도 쓸데없다는 감각에서 벗어나고, 있으나 마나 한 존재가 아님을 알고 싶은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 바로 그걸 원합니다. 그러나 두말할 필요도 없이 인간은 이를 줄 수 없습니다. 키르케고르가 하는 말의 핵심이 여기에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뭐가 돼 든 존재를 증명하고 스스로 '허접쓰레기'일지 모른다는 보편적인 두려움을 피할 길을 찾아내야 합니다. 전통적인 문화 속에서는 가족을 먹여 살리는 의무를 다하고 사회에 봉사하는 데서 가치감과 정체감을 얻었습니다. 개인주의적인 현대 문화 가운데 사는 이들은 성과나 사회적 지위, 재주, 그밖에도 정체감의 토대가 되는 것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다양합니다. 개중에는 재물을 쌓거나 권력을 손에 넣는다든지, 남들의 인정을 받든다든지, 자기를 훈련하고 절제하는 데서 '정체성'을 느낍니다. 어찌 됐든 누구나 무언가를 토대로 정체성을 구축한다. 이렇게 죄를 규정하고 나면, 죄가 인간을 인격적으로 파괴하는 몇 가지 면모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별개로 구축한 정체성은 태생적으로 불안정합니다. 하나님이 없으면, 겉보기에 가치감이 견고해 보여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순식간에 허물어질 수 있다는 말입니다. 가령 좋은 부모라는 토대 위에 정체감을 세운다고 해 봅시다. 참다운 '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냥 좋은 부모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아들딸에게, 또는 아이들을 키우는 데 문제가 생기면 ''라는 존재는 조금도 남아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 그 사랑의 터 위에 정체성을 구축해야만 무엇이든 과감하게 도전하고 당당하게 맞서는 자아를 소유하게 된다고 키르케고르는 말합니다. 하나님을 빼놓고는 이런 불안정한 상태를 피할 길이 없습니다. "어떤 인간이나 물건에 기대어 행복이나 의미를 추구하진 않겠"라고 장담한다 해도 실제로는 그 말 자체가 개인의 자유와 독립성을 토대로 정체성을 세우고 있다는 뜻입니다. 무언가 그것을 위협하는 게 나타나면 자신을 잃어버린 상태로 되돌아갈 것입니다. 하나님게 토대를 두지 않은 정체성은 또한 아찔 수 없이 지독한 중독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좋은 것들을 궁극적 가치를 가진 대상으로 삼을 때 늘 그러하듯 영적인 중독 증세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가족, , 명분, 업적 따위에서 삶의 의미를 얻으려 들면 도리어 그것들에 얽매이게 됩니다. 그것들을 손에 넣지 않으면 견딜 수 없어서 합니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의 사랑은 순서가 제대로 잡히지 않았다 하며 하나님께 주님 안에서 쉼을 얻기 전에는 우리 마음엔 안식이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고백을 드렸습니다. 하나님 아닌 다른 무언가에서 영원한 쉼을 얻으려 하면 인간의 마음은 마치 '관절이 빠진 듯' 갈피를 잡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를 사로잡는 좋은 것들은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한 선한 것들입니다. 하지만 지나친 사랑을 거기에 쏟으면 약물중독과 다름없는 생활 방식에 말려듭니다. 하나님을 중심에 두지 않는 삶은 필연적으로 공허합니다. 더없이 허황한 꿈을 남김없이 이루는 이는 세상에 없으므로 바라는 대로 성공하거나, 큰 부를 쌓거나, 인기를 얻거나, 잘생기고 예뻤더라면 결국 행복하고 평안했을 거라는 환상에 빠져서 살기 쉽습니다. 그토록 갈구하던 엄청난 일, 뭐든 다 가능하게 해 줄 만한 일, 살맛 나게 할 일, 하하 호호 행복이 가득하게 해 줄 일이 실제로 일어났는데 이튿날 눈을 떠 보니 자신은 그대로 자신일 뿐, 변한 게 없습니다. 2:13”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환멸이“ 그들을 덮쳐 늘 으르렁거리고 볼썽사나운 인간으로 바꿔 놓습니다. 죄는 인간의 내면에 작용할 뿐만 아니라 사회 구조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영국의 작가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영국의 수많은 지성인이 인간 사회의 동향에 깊이 좌절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세이어즈는 1947년에 펴낸 책 <신조 또는 혼돈>에서 지식인들이 그토록 절망하는 건 주로 기독교의 원죄 교리, 다시 말해 인류는 태생적으로 교만하며 자기중심적이라는 가르침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까닭이라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세이어즈는 말합니다. "누구보다 크게 낙심한 이들은 진보와 계몽이 미치는 교화력을 믿는 낙관주의적인 신념에 집착했던 부류였다." 전체주의 국가들에서 벌어진 대량 학살과 자본주의 사회가 드러내는 탐욕과 이기심은 "단순한 충격을 넘어 공포 그 자체였다. 그들에게 이런 현실은 그동안 품었던 모든 믿음을 총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마치 딛고 섰던 우주의 발판이 밑으로 꺼진 꼴이다." 하지만 크리스천들은 "인성의 중심에는 심각한 흠집이 존재한다" 관념에 익숙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지금까지 나온 사회 윤리에 관한 논문 가운데 가장 심오한 글로 꼽히는 참다운 미덕의 본질에서 죄가 어떻게 사회 구조를 파괴하고 있는지 규명해 보입니다. 에드워즈는 하나님을 첫 번째 사랑의 대상으로 삼지 않으면 인간 사회는 속속들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합니다. 가장 높은 삶의 목표가 자기 가족의 유익이라면 다른 가정들에 관한 관심은 덜해지게 마련입니다. 자신의 나라나 민족, 인종의 유익을 최고의 목표로 삼으면 인종주의자나 국수주의자가 될 공산이 큽니다. 삶의 궁극적인 목표가 자신의 행복이라면, 자신의 경제적 이익과 권력을 다른 이들보다 앞세우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최고선, 다시 말해 으뜸가는 선이자 삶의 중심으로 받아들인다면 다른 모든 가정과 인종, 계급에 속한 이들은 물론이고 온 세상까지 마음이 닿을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결론짓습니다. 어떻게 사회적인 관계들이 무너지는 사태가 인간 내면에 미치는 죄의 영향에서 비롯되었습니까? 정치적인 입장에서 정체감, 또는 가치에 대한 감각을 얻는다면 정치는 그냥 정치에 그치지 않고 한 인간을 규정하게 됩니다. 대의나 조직을 통해 자신, 또는 자신의 가치를 추구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반대파에 속한 이들을 경멸하거나 악으로 취급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민족성이나 사회 경제적 지위에서 정체성을 찾는다면 다른 계층이나 인종을 바라보며 우월감을 느끼는 게 당연합니다. 열린 마음과 관용하는 마음가짐을 지녔노라고 깊이 자부한다면 편협하게 보이는 이들에게 극심한 분노를 품게 마련입니다. 자신을 대단히 윤리적인 인간이라고 믿는다면 음탕하다고 판단되는 이들을 깔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이 이런 식으로 돌아갑니다. 이 수렁에서 빠져나갈 출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가족, 계층, 인종, 또는 종교를 깊이 사랑하고 거기서 정체성을 찾으면 찾을수록 종교나 인종을 포함해 다른 요소를 가진 이들을 향해 우월감, 더 나아가 적대감을 갖지 않기란 더 힘들어집니다. 이처럼 인종주의, 계급의식, 성차별은 무지라든가 교육 결핍의 문제가 아닙니다. 푸코를 비롯해 이 시대를 대표하는 수많은 사상가는 배타적인 태도로 이어지지 않는 자기 정체성을 갖기가 생각보다 훨씬 어렵다는 것을 누누이 보여 주었습니다. 진정한 문화 전쟁은 뒤죽박죽 뒤엉킨 마음, 우리를 쥐락펴락할 뿐만 아니라 갖지 못한 이들을 깔보고 배척하게 만들며 손에 넣는다 해도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게 만든 지나친 물욕에 휘말려 박살 난 마음속에서 이미 진행 중입니다.

 

3. 전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샬롬'을 잃어버렸습니다. 성경은 지금껏 나눈 이야기보다 오히려 더 포괄적이고 신비롭게 죄가 미치는 파장을 이야기합니다. 창세기 1장과 2장은 세상에 존재를 명령하고 그대로 손에 흙을 묻히다시피 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소개합니다. 2:7"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느 창조 설명과 달리 성경은 특이하게도 세상을 완벽하게 빚어지고 상호 의존적이며, 서로를 향상하고 강화하는 생명이 다양하고 풍성한 형식으로 존재한다고 묘사합니다. 이에 대한 창조주의 반응은 기쁨입니다. 다 좋다는 말이 계속 되풀이됩니다. 사람을 지은 뒤에는 정원사가 정원을 가꾸듯 피조 세계를 경영하고 광대한 자원을 끌어내라고 가르칩니다. 창세기 128절을 보면, 창조주는 "잘 굴러가게 해라. 공이 여기 있으니!"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창조의 각 부분 사이의 이 완벽하고 조화로운 상호 의존을 설명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샬롬'입니다. 흔히 '평화'로 해석하지만 본질에서 부정적인 영어 표현으로는 어려움과 적의가 없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반면에 히브리어 단어는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전폭적인 완전함, 즉 충만하고 조화로우며 즐겁고 풍요로운 생명을 뜻합니다. 창세기 3장은 죄로 말미암아 샬롬을 참담하게 잃어버리는 과정을 상세하게 그려 냅니다.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을 섬기기로 작심하는, 그러니까 하나님을 최고선으로 여기며 그분을 위해 살고 즐거워하기를 포기하는 바로 그 순간, 이 창조 세계는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인류는 만물의 구조와 너무나도 단단히 통합되어 있어서 인간이 하나님께 등을 돌리자마자 세상의 기초적인 틀은 철저하게 흐트러졌습니다. 압제와 전쟁 범죄와 폭력과 마찬가지로 질병과 유전질환, 기근과 자연재해, 노화와 죽음 자체도 죄의 결과입니다. 인류는 신체적으로, 영적으로, 사회적으로 심리적으로, 문화적으로 하나님의 샬롬을 다 잃어버렸습니다. 만물은 망가져 버렸습니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이제 온 세상이 썩어짐의 종노릇하게 되었고허무 데 굴복하는 지경에 빠졌으며 인간이 바로 설 때까지 정상을 회복하지 못할 것이라고 지적합니다.

 

4. 대단원

죄로 인해 텅 빈 마음의 공간을 예수 그리스도로 채우세요. C. S. 루이스는 기독교는 어려운가, 쉬운가?" 에세이에서 인간의 통상적인 씨름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모두 가진 일반적인 관념은 인간에게는 다양한 욕구와 관심사를 가진 타고 난 자아가 있으며 '윤리''곧바른 행동' 같은 무언가가 마땅히 자신을 주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윤리와 사회의 온갖 욕구를 다 채우고 난 뒤에도 아직 가엾은 자연적인 자아에도 얼마간의 기회와 시간이 남아서 저마다 제 삶을 살고 좋아하는 일을 하게 되길 소망합니다. 기독교의 방식은 다릅니다. 더 어렵기도 하고 더 쉽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말합니다. "내게 전부를 다오. 난 너를 원한다. 너의 옛 자아, 내 욕망을 다오, 그 대신 새로운 자아를 주마. 내 모든 생명을 주마루이스는 여기서 죄에 대한 키르케고르의 정의를 끌어냅니다. 죄는 그저 나쁜 짓을 하지 않는 데 그치지 않고 선한 것을 하나님의 자리에 두는 것까지 아우릅니다. 그러므로 유일한 해결책은 행동을 변화시키는 차원을 넘어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하나님께 초점을 맞추는 것뿐입니다. 온전히 자아를 그리스도께 넘겨 드리는 건 불가능하다시피 한 일입니다. 우리가 애쓰고 있는 일은 스스로 '자신'이라고 부르는 데 돈이나 쾌락, 또는 야망을 중심으로 한 개인적인 행복에 계속 머물면서 그런데도 정직하고 순결하며 겸손하게 행하기를 소망하는 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위해 살지 않으면 무언가 다른 것을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출세를 위해 살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그게 평생 따라다니며 괴롭힙니다. 마치 낙오자가 된 기분이 듭니다. 아들딸만 보고 사는데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으면 하늘이 무너지듯 낙담하기에 십상이다. 인간으로 아무 쓸모가 없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입니다. 예수 님이 삶의 중심이고 주인이라면, 혹시 잘못을 저지른다 해도 그분은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예수 님은 삶의 목적으로 삼아야 할 유일한 분입니다.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마지막 숨까지 우리를 위해 내쉰 유일한 주님이십니다. 이게 그렇게 억압적인 소리로 들립니까? 살다가 실패하고 주저앉은 이들에게는 기독교 같은 게 필요하겠지. 하지만 난 직장생활에도 아무 문제가 없고 집안도 더 바랄 게 없을 만큼 잘 돌아가잖으라고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어거스틴의 말마따나, 하나님이 인간을 지으셨다면 그 영혼 깊은 데 자리 잡은 빈 공간들은 하나님 외의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습니다. 예수 님이 창조주라면 말 그대로 세상 무엇도 그분만큼 만족을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설령 성공을 거둔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더없이 순탄하고 성공적인 사회생활과 가정생활도 영광과 사랑을 지으신 분만큼 의미와 안전, 지지를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누구나 무언가를 위해 삽니다. 자기 생각과 상관없이 그 무언가 가 '삶의 주인'이 됩니다. 마음에 예수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그분은 우리를 완전히 채우며 어떤 잘못도 용서하는 단 한 분, 주님이 되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