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9:30-10:21
2. 명제: 택하심에는 우리의 책임도 있다. (선언적 명제)
3. 제목: 자기 의와, 믿음으로 난 의./ 유대인은 왜 예수 님을 믿지 아니하는가?
갈등: 구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오히려 의를 얻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안 믿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바울 사도의 답변이 계속됩니다.. 로마서 9장의 배경이 되는 당시 로마 교회에는 다수의 이방인 신자들이 유입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스스로를 하나님의 백성이라 여겼지만, 복음에 더욱 적극적으로 반응하는 쪽은 대개 이방인들이었습니다. 로마서 9장 30-31절에는 뒤바뀐 상황이 묘사되고 있습니다. 30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오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 우선 이방인들은 로마서 1장 18-19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완전한 율법을 가졌던 유대인들과 비교할 때, 의에 대한 완성된 그림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이방인들은 양심을 통해서 의에 대한 밑그림만 알고 있었습니다. 롬2:14-15“: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롬 2:152:15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이방인들은 양심을 따라 사는 것이 의가 되는 길이라는 어느 정도의 인식을 가졌지만, 그들의 삶은 불의한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불의하게 살아온 이방인들이 30절'믿음에서 난 의"인 복음에 더욱 마음이 열려 있었습니다. 반대로 31절"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는 의로워야 한다고 자각했던 반면, 이방인들에게는 그러한 지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32절 “행위에 근거하여 그 의에 이르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선물로 주어진다는 진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에 대해 가장 잘 알았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게 되었고, 하나님에 대해 가장 몰랐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가장 잘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의롭게 되기를 가장 원했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죄로 죽게 되었고, 의롭게 되기를 가장 덜 원했던 사람들이 하나님 보시기에 거룩하고 흠 없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종교적이고 도덕적인' 사람들과 '비종교적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복음에 각각 다르게 반응하는 것을 보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일어났던 일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됩니다. 비종교적이고 신앙이 없는 사람들은 어릴 때는 유독 복음을 무시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신의 죄를 깨닫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영적인 공허함을 통렬하게 절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오히려 자신들의 죄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고, 대개는 우쭐대며 다른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경향이 짙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으니까 하나님이 나한테 갚아 주셔야 해'라고' 느낍니다.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사람들은 복음을 들으면 기분이 상하거나, 범죄자도 예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도 안 돼 냉소를 짓습니다. 복음의 메시지를 행위 구원의 체계로 훼손해서, 은혜가 사라진 복음으로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합니다. 리처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가 우리의 이런 종교적인 모습을 묘사한 글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이룬 성화의 수준에 따라 의로워진다고 자연스럽게 가정하기 쉽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희생을 받아들여서가 아니라 당장의 기분이나 최근의 종교적인 성취로부터 자존감을 얻으며 하루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이 우리의 양심을 안심시키지 못하기 때문에, 안도감을 얻기 위해 삶의 기록을 조작하는 자기의 로 필연적으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이 종교적이요 도덕적이요 양심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가진 치명적인 결점입니다.
2. 갈등 심화: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졌다.
32절에서 말하는 “부딪칠 돌”은 그리스도를 지칭하는데 유대인들에게는 고전 1:23절 “거리끼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그리스도에게 걸려 넘어집니까? 이는 스스로 의롭게 되려는 일체의 생각을 포기하고, 예수님의 의를 받아들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높아지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낮추어야 합니다. 누구든지 32절'행위를 의지함”으로 구원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는 그리스도 앞에서 걸려 넘어져 추락할 것입니다. 이사야서에서 인용된 두 개의 본문 즉 “사 28:16과 8:14”을 엮은 로마서 9장 33절에서 볼 수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기반을 삼고 살아갈 반석이거나, 부딪혀 넘어지는 걸림돌입니다. 33절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 것을 유대인들은 명확히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자기 의의 외투에 걸려 넘어졌고, 예수님은 이들에게 거리끼는 존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롬 9:1-29절까지 바울은 불신앙을 하나님의 절대적인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9장 1-29절과 9장 30절-10장 21절을 계속 이어가려고 하면, 얼핏 두 단락이 상반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만일 불신앙이 하나님의 절대주권 때문이라면, 어느 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겠습니까? 물론 이것이 모순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왜 모순으로 보이는 말을 했을까요? 이 말의 의미는 도대체 무엇일까요? 바울은 하나님의 절대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서로 명백히 모순되는 이율배반 관계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물리학에서 빛이 때로는 입자가 되고 때로는 파동이 된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진 이율배반의 실례입니다. 왜 그런지 다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장차 더 많은 지식을 얻게 되면 언젠가 이 모순을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성경은 결코 ”이 구원과 불신앙의 사건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일어났기 때문에 인간은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없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또한 “인간에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이 있기 때문에 그 사건이 하나님의 계획대로 일어났는지 확실하지 않다"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두 진리를 함께 묶습니니다. 1. 모든 역사에 대한 하나님의 완전한 절대주권 2. 자신의 행위에 대한 모든 인간의 완전한 책임. 다음에 나오는 마틴 로이드 존스의 글은 이 '이율배반'에 대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지는 않지만,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을 구원하시는지와 또한 불신앙의 책임이 믿지 않는 그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줍니다. ”로마서 9장 6-29절에서 바울은 왜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게 되는지 설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절대주권에서 비롯된 선택을 통해서다. 30-33절은 왜 어떤 사람은 구원받지 못하는지 밝히는데 그것은 그 사람 자신의 책임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다음과 같다. 구원받는 것은 택하심으로만 설명되지만, 구원받지 못하는 것은 택함 받지 못한 것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6-29절에 잘 나와 있듯이 하나님이 절대주권으로 누군가를 선택하지 않으신다면 어느 누구도 구원받지 못할 것입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사역으로만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왜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그들이 택하심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그들이 복음을 거부했기 때문에 구원받지 못한 것이다. 복음을 거부하는 것은 우리의 책임이지만,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의 공로가 아니다? “?“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3. 전환: 이스라엘이 변명하지 못하는 이유
그러므로 이스라엘은 두 가지 이유에서 복음을 모른다고 변명할 여지가 없었습니다. 첫째 예수님이 오셨고, 둘째 그분이 오실 것을 성경을 통해 미리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10: 4절”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롬 3: 21-22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바울이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침"이라고 한 것은 충격적인 표현입니다. 이 말은 율법적인 도덕주의자들이나 종교적인 사람들과 직접적으로 충돌을 일으키는 말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율법의 특정한 부분이나 율법의 구속력이 끝났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율법을 통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려는 시도를 그리스도가 무효로 만드셨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의'의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바울이 4절에서처럼 믿는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여기서 의를 말할 때는, 일반적인 도덕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얻었다는 의미로,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의 설명은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의의 방편이던 율법의 역할이 끝났고, 대신 믿음이 그 역할을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로마서 6장 1절-8장 4절에서 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구원의 체계로서 "율법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 율법에 순종할 의무가 끝난 것이 아니라 계속됩니다.. 유대인들의 무지가 극복될 수 있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바울은 구약 성경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모세를 인용하며 모세가 도덕주의를 가르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가 율법의 준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밝힙니다. 바울은 모세가 율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표면상으로는 모세가 율법의 준수를 통한 구원(생명)의 가능성을 가리키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모세의 진의는 다음과 같습니다. "만일 당신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있다면, 당신은 영생을 얻을 것이다." 아 말씀은 인생은 아무도 완백하게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울은 로마서 10장 6-7절에서 모세의 신명기 30장을 인용하면서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가 무엇인지 밝힙니다. 6절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믿음은 우리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올라갈 필요도 없습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이미 하늘에서 내려오셨기 때문입니다, 7절“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죽음으로써 우리의 죄를 해결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모세가 율법의 준수보다 더한 것이 필요하고,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율법을 이루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말합니다. 8절"말씀이 네게 가까워" 모세는 마음으로 믿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구원 받은 믿음은 마음으로 모든 율법을 다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입으로 시인함으로써 믿음으로서 얻어지는 하나님의 의의 선물입니다.
4. 대단원: 지식이 없는 열정은 광신이다.
바울에게 구원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규명해야 할 신학적 쟁점이나 학문적으로 풀어내야 할 추상적인 이론이 아니라 자기 민족의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그를 이성적으로나 심정적으로 흔들어 놓았습니다. 10:1절"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따라 동족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이 가진 문제는 무엇이었습니까? 2절“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을 향한 열심"은 바울에게 큰 고통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일이든 기꺼이 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가진 열심이 좋은 줄 인정하면서도 그들이 길을 잃은 이유가 그 열심만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반드시 하나님의 즉 성경의 지식에 근거한 열심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당신이 진실하다면 무엇을 믿어도 괜찮다"라는 현 시대의 사조와는 완전히 모순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거짓 없는 열정으로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이들의 신앙은 잘못되었고 정도를 벗어났다!" 하나님의 즉 성경의 지식이나 지각이 없는 열정은 광신이며 더 나아가 테러리즘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이웃에게 심한 꽃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근사한 꽃다발을 선사한 여성이 있다고 가정해 봅시다. 지식이 없다면 관심과 애정조차 상대방을 괴롭히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예로 독약이 무해하다고 철석같이 믿는 사람이 있다고 칩시다. 만약 그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끽소리도 하지 못하고 죽게 될 것입니다. 열정은 때로 도움이 되기는 커녕 죽음을 재촉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의 문제가 무지라면 어째서 책망받아야 합니까? 면밀하게 살펴보면 바울이 의도하는 바를 알게 될 것입니다. 3절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들의 무지는 극복될 수 있었습니다. 거짓 없는 열정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무지 가운데 있었던 것은 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무지한 채로 있는 것이 더 마음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광신자들에게는 열심과 충심이 있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명분을 위해 때로 죽음도 불사합니다. 그 열심에는 깊은 반성이 없었습니다. 이들은 가만히 서서 사태를 깊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비록 거짓은 없지만 자신이나 다른 이들에게 심각한 해악을 끼치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그들에게 책임을 묻습니다. 무지한 유대인들은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님을 즉 믿음으로 난 의를 거부했으며,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구원을 얻지 못한 것은 하나님이 선택하시지 않으셨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고 자기 의를 열심히 따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그들이 구원 받지 못한 것은 오직 그들의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는 하나님의 지식을 겸비한 참 열정은 무엇입니까? 의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었으니 이제 그분을 삶의 반석으로 삼아, 감사하며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또한 사랑으로 인생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은,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마땅한 의무라는 것을 믿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자원하여, 무지한 유대인들 보다 더욱더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롬 12:11 ”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