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그리스도 중심적인 강해 설교

세상을 이기는 자들

wordlove 2024. 4. 21. 14:42

1. 본문 : 요일 5:4-5

2. 본문 요약: 하나님으로부터 난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3. 주제: 세상을 이기는 자

4. 테마: 세상을 이기는 자의 특징

5. 명제: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인 세상을 이기는 자에게는 계명들이 무겁지가 않다. (선언적 명제)

6. 설교의 목적: 세상을 이기는 자에게 계명을 무겁게 만드는 그것들과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아 승리하는 삶을 살도록 돕고자 함.

7. 질문제기: 세상을 이기게 하는 자에게 계명을 무겁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이며,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8. 중심단어: 무겁게 만드는 것들

9. 전환 문장: 세상을 이기는 자에게는 계명들이 무겁지가 않다. 세상을 이기게 하는 자에게 계명을 무겁게 만드는 것들이 무엇이며.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10. 대지

11.. 제목: 세상을 이기는 자들

 

요한은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방법은 그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며,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그 계명들이 무거울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이 그것들을 지키고 싶어서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관계는 종종 큰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어떤 사람은 그 계명들에 대한 준수를 강조하며 어느 정도는 그것들을 문자적으로 지켜 왔으며, 거기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율법주의적이 되었습니다. 이는 초대교회에서도 있었던 현상이며, 특히 바울이 갈라디아서나 로마서와 같은 몇몇 서신들을 썼던 이유가 되기도 했습니다. 때때로 어떤 사람은 은혜의 사역에 따른 결과로 의식법이 종료된 것으로 보지만, 도덕법만큼은 아직 존속되고 있다면서도 여전히 율법주의적 태도를 보입니다. 그다음 위험은 '율법 폐기론'이라 지칭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나는 이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더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며, 계명들은 나와 아무런 상관도 없다. 나는 율법과 절교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든 문제 될 것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 완전한 잘못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그러한 율법들은 폐기되지 않았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킴으로써 그분을 사랑하는 것을 당연한 일로 여겼습니다. 십계명은 모든 시대의 모든 곳에 거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령이며, 결코 감소하거나 수정된 적이 없습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다른 무엇보다도 계명들을 지키는 문제와 관련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말합니다. 비그리스도인에게는 계명들이 매우 무겁습니다. 비그리스도인에게는 하나님의 계명들은 멍에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고역이요 짐이라고 느낍니다. 이 때문에 마음으로 하나님을 미워하며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자 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은 진정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계명들이 고역이나 끔찍스러운 의무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분의 계명들은 무겁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인 우리가 모두 자신에게 적용해 보아야 할 시험 방식이 여기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들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떠합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인 세상을 이기는 자에게는 계명들이 무겁지가 않다고 선언합니다. 그래서 저는 세상을 이기는 자에게 계명을 무겁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이며, 세상을 이기게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세상을 이기게 하는 자에게 계명을 무겁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는 세상입니다.

3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요한 사도는 세상에 관한 주제를 요일 2장에서 이미 다룬 바 있습니다. 요일 2:15-17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아마 이 구절은 '세상'이라는 용어의 신약 적 의미를 가장 완전하게 설명한 성경 구절 중 하나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신약성경을 읽을 때마다 그리스도인의 삶 전체가 영적 투쟁의 삶이라는 점을 발견할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나라, 빛의 나라와 어둠의 나라가 존재합니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요한은 세상은 항상 그런 모습으로 존재해 왔으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이 '세상'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사용하는지를 규명하는 최선의 방법은, 그것이 하나님과 성령을 대적하는 모든 것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부르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분을 섬기며 영화롭게 하기 위함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서의 소요리 문답에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의 으뜸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주된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려야 하며 즐거워해야 합니다. 세상이란 그렇게 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제지하려고 하는 모든 것입니다. 세상은 하나님만 전적으로 또 절대적으로 영화롭게 해 드리며 즐거워하는 일을 방해하는 모든 것입니다. 세상은 온갖 것들로 우리를 유혹하고, 시험하며, 그것들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하려 합니다. 세상은 그 관점, 정신, 심리 상태, 그 지혜- 세 상적 지혜-등에 있어 하나님과 적대적입니다. 세상은 그 신념과 분별력과 지성 주의 등에 있어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특히 그 지성 주의는 하나님을 배제시키고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피를 조롱합니다. 더욱이 세상은 우리를 핍박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그 방법은 다양합니다. 때로는 조롱을 통해 그렇게 합니다. 세상은 우리를 비웃으며 자신이 어리석은 것처럼 느끼게 만듭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여러 다른 장소에서 그런 일이 너무도 자주 생깁니다. 또한, 조롱을 통해 고립이라는 방법도 동원됩니다. 사람들이 자신을 떠나감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무서운 유형의 핍박이며 매우 간교하고 사악한 것입니다. 때로는 물리적 핍박이 닥칠 수도 있습니다.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통한 사탄의 시험으로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부인하도록 유혹당하고 있습니다. 이는 계속해 복음을 증거할 때, 많은 사람이 직면하는 사실입니다. 어떤 방법으로도 세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 드리며 즐거워하는 일을 제지하려 애쓰고 있습니다. 우리가 싸워야 할 대상이 바로 이 세상입니다. 세상을 이기게 하는 자에게 계명을 무겁게 만드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는 우리 안에 있는 세상입니다.

세상은 우리 밖에 있을 뿐만 아니라 안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두 방향 모두에 대해 싸워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8:7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따라서 내가 육신의 생각을 갖고 있다면 나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드리지 않는 셈입니다. 육신의 생각은 내 속에 있는 그 무엇입니다. 그렇다면 신약성경의 표현처럼 우리 안에 있는 세상이란 '육신의 생각'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생각을 다른 말로 하면 '자아'입니다. 자아란 무엇입니까? 인간의 타락한 본성이며 그것은 교만입니다. 교만만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즐거워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도 없습니다. 여러분이 무엇에 대해 교만해서 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육체적 외모, 정신적 역량, 삶의 형편, 성공 등 그 어떤 것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이 지닐 수 있는 모든 자만심은 하나님께 적대적이며 그분을 영화롭게 해 드리는 일을 보다 어렵게 만듭니다. 교만은 여러 가지 형태를 띨 수 있습니다.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과 비평을 싫어하는 것 등입니다. 또한, 자기 신뢰를 들 수 있는데, 이는 현대 세계가 현대인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가장 어렵게 만드는 그것 중 하나입니다. 세상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자기 신뢰, 즉 자기 운명의 주관자로서의 인간, 자기 운명의 조정자로서의 인간, 우주의 비밀을 발견하고 자연을 이용하는 위대한 인간 등에 대해 설교해 왔습니다. 대중 서적들과 심리학적 가르침은 모두 자기 신뢰를 주창합니다. 자신을 의지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덜 신뢰하게 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일과 그분을 위한 삶에 더욱 태만하게 됩니다. 물론 그러면 무가치한 의미에서의 야망이 생기며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이 일어납니다. 또한,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해 무엇인가를 얻고자 갈망하는 이기심, 자기 중심성, 자기 배려가 생깁니다. 그러면 거기서 질투와 시기와 탐욕이 생겨나며, 생각이나 말에서 완악함과 몰인정이 생겨납니다. 내가 자신을 위해 살고 있을 때, 나는 모든 형태와 모든 유형으로 나 자신만 염려하는 셈입니다. 또 다른 육신을 들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욕, 정욕, 탐욕 등을 의미합니다. 이들은 내면에서 생겨납니다. 우리는 혼자 가만히 앉아 있다가 갑자기 악한 생각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육신이요, 세상 일부입니다. 우리 밖의 세상으로부터 제공된 향락들과 마찬가지로 그것 역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맞서 싸워야 하는 가장 끔찍스러운 것은 나태함과 안일함에 대한 추구라는 형태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육신입니다. 우리가 게으르다는 말은 일리가 있습니다. 성경을 읽지 않거나 기도하지 않기 위해 변명을 늘어놓는 자신을 발견한 적은 없습니까? 기도하려고 하면 냉담해지며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예배에 참석하려면 방해하는 수많은 핑계가 생깁니다. 육신의 나태함은 하나님을 영화하게 하는 일에 맞서고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도록 제지합니다. 그 다음으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은 온유해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주를 닮고자 하는 것, 주를 위해 사는 것은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지며 바보처럼 되는 것이 아니냐 라는 두려움 등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런 두려움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육신의 일부로서 안일함을 향한 욕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결핍된 상태로서 육신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입니다. 이것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게 하며 즐거워하지 못하게 하는 내 마음의 세상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을 이기게 하는 자에게 이기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받아 달라지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12:2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4"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라.”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요한이 나타내고자 하는 의미는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을 정복하고 지배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리스도인이란 세상을 이긴 자임과 아울러 세상을 이기는 자라고 했습니다. 요한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이 문제와 관련해 전적으로 새로운 위치에 처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는 비그리스도인과 같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믿음 때문에 이와 같은 새로운 위치에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에 대한 참된 의미를 간파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무엇인지를 파악하게 되었고, 그것을 미워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정복되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으며,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세상을 이겼다는 것도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세상을 이기셨고,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따라서 우리도 세상을 이겼습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을 이기는 중이라는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지만, 여전히 싸워야 합니다. 고전 1:30.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에게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예수 그리스도 그분은 이미 우리의 모든 것이 되셨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이미 성화 되었고 영화되었다 해도 일리가 있습니다. 로마서 8장을 읽어 보십시오. 8:29-30.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는 이미 완전해졌습니다. 그것은 이미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성화 되는 중이며 영화의 과정에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겼음과 '동시에 또한 이기고 있다 말이 어떻게 성립됩니까?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입장이 바로 그러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사탄의 지배 아래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탄의 나라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탄과 단절된 상태에 있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그것을 이런 식으로도 살펴봅시다. 한 길을 사이에 둔 넓은 사유지가 두 개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길 양편으로 사유지가 하나씩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사탄의 나라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인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사항입니다. 그들은 사탄의 지배 아래 있었지만, 이제 그 길을 건너 하나님 나라에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이 세상과 이생의 삶을 살면서 새 땅 곧 하나님 나라에서 일하고 있긴 하지만, 그들의 옛 원수인 사탄은 여전히 이웃 나라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사탄 자신의 말에 귀 기울일 정도로 어리석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사탄은 그리스도인들이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자신의 지배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사탄의 지배를 받지 않지만, 여전히 사탄의 공격과 기습과 미혹과 교묘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이겼지만, 여전히 싸우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또 그리스도와 더불어 계속 동행하고 교제하면서 여전히 이겨 나가야 합니다. 그들은 계속해 승리하고 있습니다. 예전에 그토록 쉽게 사로잡혔던 유혹들에 더 빠져들지 않습니다. 더 그 유혹들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더 나아가 참된 그리스도인은 죄짓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원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넘어지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들 속에 옛 자아로부터 남은 어떤 것들이 그들을 넘어뜨리는 것입니다. 이는 성경이 육신이라 칭하는 것으로서 옛사람의 잔재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미워합니다. 이겼다는 것은 그런 의미에서입니다. 그들은 승리를 얻었지만, 아직 완전하지 않습니다. 신구약 모든 믿음의 선진들도 실패를 경험했음을 성경은 증거가 되고 있습니다. 그들도 무죄한 완전 상태에 아직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시험당하며 때로는 낙심과 좌절을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자신이 승리자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분은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나도 이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은 알고,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님 안에 있기 때문에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신분의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우리의 신분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는 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즐거워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