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요일 5:4-5
2. 명제: 거듭난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세상을 이길 수 있다. ( 가능성의 명제)
3. 제목: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세상을 이기는 두 가지 방식
갈등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긴 자들입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이미 이겼으며 또한 이겨 나가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물음은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하면 세상을 이길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 교회사 전체는 이 점에 대한 두 개의 중요한 상반된 견해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이런 영적 싸움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어떤 의미에서든지 자각해야 합니다. 자신의 삶에서 영적 싸움을 전혀 감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분명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사망의 잠 속에 빠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영적으로 살아나는 순간에 그들은 이처럼 상반되는 세력들과 힘들을 자각하고, 그와 동시에 영적 싸움을 자각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엡 6:12."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이 물음과 관련해 두 가지 주요 견해들이 있습니다. 가톨릭의 견해 혹은 수도원적 견해가 있으며, 또 복음주의적 견해가 있습니다. 먼저 세상과의 싸움에 대한 수도원적 혹은 가톨릭적 견해의 본질입니다. 그들은 세상으로부터 물러서야 한다고 믿지만 또한 의지력의 행사와 수많은 규칙과 규정들에 대한 준수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그 견해에 따르면 세상은 너무도 역동적이며 우리 가운데 깊숙이 침투해 있고, 교묘하게 유혹하기 때문에 유일한 해결책은 세상에서 벗어나고 물러서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가톨릭 수도원 제도의 본질입니다. 그 결과 어떤 사람은 이런 가르침에 너무도 공감한 나머지, 가정과 여러 직업과 직장과 일 등을 서슴없이 버리고, 세상과 분리된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들은 물리적 의미에서 세상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의도적으로 노력했으며 종교 생활에만 매달렸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시간을 명상과 기도와 묵상 등을 위해 할애했고, 스스로 규정들을 만들거나 여러 가지 규칙과 지침들을 따르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일주일에 두 번 혹은 그 이상의 금식을 문자적 의미에서 실행했습니다. 그들은 때와 절기, 사순절과 같은 절기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정욕과 몸을 자제하는 데 보냈습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적 견해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이러합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벗어나야 하며, 여러 가지 측면에서의 엄한 훈련을 통해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고 서 있는 세상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실행에 옮길 수 있으려면 먼저 매우 특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실패하는 지점입니다. 그것은 평범한 보통 그리스도인에게는 아무런 소망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견해를 지지하는 자들은 그러한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을 두 부류로 나눕니다. 한 부류는 사업이나 직장 등을 위해 세상에 남아야하는 평범한 평신도들이요, 다른 한 분류는 종교 생활을 일종의 직업으로 간주하고 온종일 거기에 매달리는 비범한 사람들인 신부와 수녀 등 종교인입니다. 물론 그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그런 종교적 사람들은 스스로 충분한 공적을 이룰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의 부족함을 보충하기 위해 성인들에게 기도해 그 공덕을 얻고자 합니다. 그것은 단지 선택된 특정한 사람들만을 위한 것일 뿐이며, 보통의 그리스도인이 실행에 옮길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이것은 전적으로 비성경적입니다. 신약성경에는 그리스도인을 그런 식으로 구분하거나 분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자신을 다른 모든 사람과 동일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들의 메시지는 극소수의 선택된 자들에게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전파되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이 견해의 비극은 세상이 우리 밖에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도 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다는 데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이 죄, 시험, 유혹등과 더불어 우리 밖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있는 죄악된 성품인 육신이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내'가 세상에서 벗어남으로 그것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유치하다 하겠습니다. 내가 수도원에 들어가도 세상은 여전히 내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물리적 수단으로 피하고자 하는 시도는 결국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혼자였던적이 있으며, 특정한 기간 동안 고립되어 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에는 외부 세상이 우리를 시험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때 과연 모든 것이 좋았습니까? 온전히 행복했습니까? 시험으로부터 자유로웠습니까? 세상적인 마음과 관점, 그 정신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하나님은 알고 자신도 알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의 이야기도 그 점을 입증해 줍니다. 신부로서 수도원에 칩거해 땀으로 얼룩진 금식 기도를 드렸던 탁월한 수도사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세상 밖에 있었지만, 여전히 온갖 추악한 세상이 그의 내면에 있었고 아무런 평안도 얻을 수 없었다고 그는 스스로 고백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사회로부터 분리한다고 해서 신약성경적 의미에서의 세상을 제거하지는 못합니다. 달리 말해 수도원적 견해는 철저히 비성경적입니다. 신약성경에서는 그러한 가르침이 전혀 발견되지 않습니다. 특히 주님의 삶을 살펴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세상을 이기신 분이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도 알다시피 그분은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분리시킴으로써 그렇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세상속에 계셨고 보통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습니다. 사실 그분은 바로 그 때문에 오해를 당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은 그분을 보고 "그는 선지자일 수 없다.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이다. 세리들과 죄인들로부터 분리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우리는 주님의 교훈과, 신약성경 전체의 교훈뿐만 아니라, 그분의 본보기를 통해서, 단순한 세상을 떠나서는 세상을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2. 갈등 심화
이제 우리는 가톨릭 주장을 복음주의적 견해와 대조해 보겠습니다. 복음적 견해는 성경적 견해로 칭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기는 위치에 어떻게 도달합니까?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은 이긴 자들입니다. 그들이 이미 이겼고 또한 이기고 있다는 것은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과연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합니까? 그들이 소위 종교생활을 직업으로 삼았다는 언급은 여기서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들이 벽 뒤로 칩거해 규례들과 규칙들을 벽에다 새겨 놓고 날마다 지켰다는 언급도 전혀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무슨 일인가가 생겼으며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이것들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났기 때문에 세상을 이깁니다. 4절"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요한 사도는 거듭남을 첫 번째로 제시하며, 그리고 두 번째는 그분과 우리와의 관계를 제시했습니다. 세 번째로 믿음을 언급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났다면, 물론 이는 우리가 새로운 기질과 관점으로 출발함을 의미하며, 여기서 가톨릭적 견해와 복음주의적 견해의 근본적 차이를 보게 됩니다. 가톨릭적 견해는 거듭남과 중생을 강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를 기계적 의미에서 세상에서 벗어나게 하려 하며, 여러 규례들과 규정들을 만들어 실행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복음주의적 견해는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세상에서 벗어날 필요가 없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에 대한 새로운 관점이다. 너희에게 필요한 것은 그것에 관한 새로운 전망이다." 신약성경에 의하면 모든 문제는 세상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 여러분 속에 있는 정신과 여러분이 취하는 관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패에 대한 책임은 세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진정 우리 자신에게 있습니다. 두 사람이 감옥의 창살 밖을 내다보았습니다. 한 명은 진흙을 보고 다른 한 명은 별들을 보았습니다. 같은 감옥에 갇힌 두 사람이 창살을 통해 같은 세상을 내다보지만 그들이 실제로 본 것은 전혀 달랐습니다. "아름다움이란 보는 자의 눈 속에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세상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방식입니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핵심적 가르침입니다. 그것은 복음주의적 입장의 본질입니다. 그것은 세상을 보되 예수 그리스도가 보신 것처럼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내포합니다. 거듭난다는 것의 모든 의미가 바로 그러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벧전 1:4절"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인간적이고 육신적이며 죄악된 자로 사물을 보기보다 하나님의 눈으로 세상 만물을 봅니다. 그 얼마나 놀라운 교리입니까? 내가 있는 곳에서,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내가 있는 바로 그곳에서 나의 모든 관점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거기서 나를 올바로 이끄는 소망을 봅니다. 그것은 나를 본질적으로 올바로 이끕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항상 여느 때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세상 속에서 다른 사람이 됩니다. 나는 이제 거듭남으로 세상을 이기는 위치에 서 있습니다. 그것이 첫 번째 방식입니다.
3. 전환
요한은 계속해서 세상을 이기는 두 번째 방식으로 나아갑니다. 5절"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바로 그것입니다. 거기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달리 말해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세상을 이기게 하고 또한 더욱더 그렇게 하도록 만드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의 사역과 그분이 완수하고 이미 끝내신 일에 대한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한 복음주의적 입장 전체입니다. 그것은 단지 갖가지 규칙들을 실행하는 것이 아니며 의지력도 아닙니다. 우리는 바울이 골로새서 2장에서 이런 입장을 비난하는 것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는 거기서 수도원적 개념과 똑같은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시대에는 나름대로 성일들을 지키는 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이러저러한 일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골 2: 16-23“ 절기, 초하루나, 안식일, 천사 숭배, 자의적 숭배, 몸을 괴롭히는 것들은 아무 유익이 없다. 그것은 아무 소용도 없다. 그 모두는 육신에 속한 것이다. 그것은 새 것이 아니라 옛 것일 뿐이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바울의 주장에 의하면 그러한 것들은 그릇될 뿐만 아니라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들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골 2:9절"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그분 안에서 우리는 '완전하다' 결국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그분은 머리시며 모든 것이 그분으로부터 나온다. 너희의 철학이나 그릇된 금욕주의는 아무 소용도 없다. 몸을 상하게 할 필요가 없으며 세상을 이기기 위해 기계적 노력을 기울일 필요도 없다. 그런 것은 전혀 필요하지 않다. 너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 “세상을 이기는 자가 누구냐?" 이 질문에 그가 제시하는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이다. 그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며 그분이 하신 일이 무엇인지를 알며, 그 완전히 성취된 사역을 의지한다." 사도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갈 2:20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분과의 관계 안에서 사는 것이다. “.“ 그것이 바로 우리가 붙잡아야 하는 빙식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관계입니다. 내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면 다른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의 언급에 의하면 내가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면 모든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가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다면 그분으로부터 모든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그분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는 것은 거듭나는 것입니다. 내가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그분을 믿을 수 있는 것은, 그분에 대한 믿음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을 의지하며 그분의 충만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오직 내가 예수님의 새 생명을 받아 새로 태어날 때입니다. 나를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시킨다는 것은 이와 같은 거듭남에 관한 문제입니다. 나는 그분으로부터 나서 그분의 성품 즉 예수 생명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가르치는 세상을 이기는 두 번째 방식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입니다.
4. 대단원
세상을 이기는 마지막 방식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내게 일어난 일로 인해 믿음을 실천에 옮길 수 있으며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여러분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김"을 봅니다. 그러고 나서 4절"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는 말씀에 공감합니다. 달리 말해 중생으로 나는 믿음의 능력을 지니며 믿음을 실행에 옮길 수 있고 믿음으로 살 수 있습니다. 내가 싸우는 세상은 매우 강합니다. 세상은 그 속에 태어난 모든 사람을 다스리며 지배합니다. 사실 시51:5 “우리는 죄악 중에 출생했고 죄악 중에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신의 생명을 얻는 순간 세상이 우리 속에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읽어 보십시오. 믿음의 위인들, 족장들, 경건한 왕들과 선지자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모두 세상의 지배를 받았으며 한결같이 실패했습니다. 롬 3:10절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 그러므로 내가 그러한 세상을 정복하고 이기려면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게 해 줄 그 무엇이 필요합니다. 세상과 직접 싸우려는 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수도원 제도는 그렇게 하기 위해 생겨났으며 "세상으로부터 피하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중세 가톨릭이 실패한 이유는 수도원의 부패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 내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요? 나는 해방을 필요로 합니다. 스스로 갖지 못한 어떤 힘과 세력과 능력을 필요로 합니다. 내게 필요한 그 해답이 여기 있습니다. 나는 믿음을 얻습니다. 새로운 관점과 이해력을 얻습니다. 힘의 근원으로 나아갑니다. 나를 대적하는 모든 것보다 훨씬 더 큰 힘과 능력을 봅니다. 이 모든 것이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약성경의 본질적 가르침입니다. 그리스도인이란 또 다른 영역으로 안내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들 안에는 예전에는 결코 알지 못했던 그리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그 누구도 알 수 없는 힘이 있으며, 그 힘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새로운 성품과 관점과 기질과 이해력을 소유한 사람들이 여기 있습니다. 이 세상에 대한 나의 모든 관점이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본질적 사항입니다. 특정한 때나 시기뿐만 아니라 항상 그러해야 합니다. 주일뿐만 아니라 매일 그러해야 합니다. 우리는 새로운 마음과 성품, 새 관점을 지니고서 세상을 있는 그대로 직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나는 그분께 연결되어 있습니다. 믿음으로 그분 안에서 살아가며, 세상의 모든 방해를 이기고 정복하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의 능력을 그분으로부터 받습니다. 가정이나 거리나 직장 등 그 어디에 있든지 간에, 어떤 적대적 상황에 직면하든지 간에,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내 속에 있는 주님이 주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말미암아 승리할 수 있으며, 극복할 수 있다는 사실로 하나님께 감사드리십시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저와 여러분들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이길 수 있음을 선포하십시오. 예수 이름 의지하며, 기도하여 승리를 쟁취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