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heology Of Sacred Rhetoric(거룩한 수사법에 관한, 레토릭 설교) 존 캐릭 지음
1. 직설법: 기독교는 승리에 대한 직설법으로 시작. 기독교는 감정이나 열정이 아니라 사실에 토대를 둔 종교다. 기독교와 자유주의 간의 근본적인 차이점은 자유주의는 명령법인데 반해 기독교는 승리에 대한 직설법으로 시작. 자유주의는 죄인에 대한 그가 무엇을 해야만 하는 가를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되고 기독교는 죄인에 대해서 하나님이 이미 무엇을 행하셨는가를 이야기 하듯 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메이첸은 “자유주의 설교자는 우리에게 훈계를 제공하지만 기독교는 훈계가 아니라 복음을 제시한다.” “주의 천사가 무리들에게 선포하신 것은 기정사실에 대한 선포다” 메인첸은 “기독교는 정보에 토대를 두고 있다. 정보의 내용은 예수 그라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것이다” “이 정보는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에 대한 것이며 이것이 복음이다.” 직설법은 객관적인 사실을 단정적으로 나타낸다“ 직설법은 서술하고 이야기하고 설명한다. 반포하고 단언하고 설명한다. 기독교 신앙이 갖고 있는 역사상과 사실성을 강조한다. 복음의 중심성은 그리스도의 선재하심 성육신 대속적인 죽음 부활은 직설법으로 표현되어있다. 지성에 호소. 선언적, 교훈적, 해석과 분리 될 수 없다.
2. 감탄문: 감정을 표현하는 직설법. 감탄문은 빛뿐만 아니라 열도 전달한다. 지성과 마음에 호소. 감탄문이 잘 사용 되었을 때 감탄문은 항상 아름답다. 꾸밈없이 마음에서 흘러 나왔을 때다. 감탄문은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마음의 경건이며 그의 영혼의 에너지다. 워필드는 영국의 가장 위대한 배우였다. 그는 설교 할 때 마다 강력하고 살아있는 자연스런 한편의 드라마였다. 예수님은 화있을 진저! 오호! 얼마나! 또는 어떠한! 을 사용하셨다. 감탄문은 강조하거나 혹은 감정을 실어 이야기하는 문장. 감탄문이 반드시 하나의 문장을 구성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감탄문은 항상 감정적인 응집이 고양된 것을 전제. 어찌(how, 얼마나(what), 오(oh), 화있을 진저(woe) 감탄문은 종종 매우 단순하게 한 단어나 구문을 강조 적으로 내 뱉는 것을 통해 감탄 지시어들과는 아무 상관없이 독자적으로 감탄을 표현.(어찌 그리(how))
3. 의문문: 양심에 호소. 탐구적이며 입증적인 요소의 중요성을 드러냄. 알렉산더는 “의문문은 강연에 활기를 불어 넣기 위해 모든 강연자들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방법이다. 로이드 존슨은 적용은 훈계하는 형태로 할 수 있고 일련의 질문 형태로 취할 수 있다 고했다.
1). 수사적인 질문: 대답을 기대하지 않는다. 수사적인 질문은 구조적으로 의문문이지만 강력한 단어의 효과를 갖는다. 정보를 얻기 위한 질문이 아니라 효과를 누리기 위해서 물어보는 질문이다. 수사적인 질문은 단언적이다. 강력한 서술로서 역할이다.
2). 분석적인 질문: 분석적인 질문에 대한 대답을 활용함으로서 대답을 하고 반대 생각에 반박한다. 중심적인 강조점은 질문들에 있다가 보다는 반응에 있다. 질문의 목적은 청중을 자극하고 반응을 보이게끔 하는 것이다. 설교의 대화적인 특성. 설교자와 청중들 간에 반드시 발전되고 있어야만 하는 침묵의 대화. 진정한 설교는 항상 설교자와 청중들 간의 주고받은 침묵의 대화가 요구됨.
3). 탐구적인 질문: 질문 받는 사람들로부터 대답을 듣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분석적인 질문과 수사적인 질문과는 다르다. 분석적인 질문과는 달리 탐구적인 질문은 대답을 자극하지 않고 유도하지도 않으며 대답이 질문자를 통해 제공 되지 않는다. 수사적인 질문과 달리 탐구적인 질문은 이미 제시된 결론이나 자명한 질문을 갖고 있지 않다. 3가지 중에서 순수하게 대답을 도출해 내려고 하는 질문이다. 불확실성과 아직 결정하지 않는 미지의 모습이 이 질문의 본질이다. 이 질문은 개인적이다. 이 질문은 인간의 심성들을 탐구하고 조사하여 깨닫는 경향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알마틴은 “적용할 때 탐구적인 질문을 유용하게 활용하십시오. 모든 위대한 설교에서 활용된 레토릭적인 형태는 질문 묽음 들이다. 질문 묽음 들은 일련의 질문들로 구성되어있다. 하나가 나오고 그 뒤에 다시 또 다른 질문이 연이어 나온다. 일반적으로 형태상 서로 평행을 이루곤 하는데 이런 질문 묽음 들은 설교를 정점으로 치닫게 한다. 조나단 에드워드는 의도적으로 의문을 사용. 의문문은 적용의 중요한 부분으로 취부. 조나단 에드워드는 설교에서 공격적으로 나아갔던 것은 다름 아니라 바른 의문문이라는 방법을 통해서이다. 의문문을 지속적으로 사용. 의문문이 양심을 깨우는데 가치가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로이드 존슨은 일인칭 복수 형태의 질문 사용.
의문문은 직설법의 한 측면이다. 직설법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을 장려하지만 의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용을 장려한다는 차이점이다. 명령법처럼 의문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적용에 속한다. 탐구적인 의문문은 청중들로 하여금 자기반성과 자기 정검을 하게끔 하는 것이다. 의문문은 로이드 존슨처럼 공격이라는 요소의 한 측면으로 간주해야 한다. 강연은 지성에 호소 설교는 지성뿐만 아니라 양심과 마음에 호소. 고대는 하나님의 고발과 인간의 피고인. 현대는 사람의 고발과 하나님이 피고인 되었다.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재판 석으로 회복 되시고 사람이 피고석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게 해주어야한다. 설교는 사람들의 양심과 마음을 탐구하고 조사한다. 의문문이 설교자의 강력한 무기이다.
4. 명령법: 인간의 책임과 구속의 적용을 강조. 의지에 호소. 직설법 뒤에 명령법이 뒤따른다. 처음에는 예수님의 인격이나 사역을 강조하는 직설법이 나오고 뒤이어 죄인을 향해 회개하라. 그분을 믿으라. 명령하는 명령법이 나온다. 스타트는 선포 없이는 호소도 없다. 호소 없는 선포도 없다고 했다, 복음 선포 뒤이어 복음을 기꺼이 받아들이게끔 독려해야만 한다. 기독교는 승리한 것에 대한 직설법으로 시작했다. 기독교는 재촉하는 명령법으로 시작 되는 것이 아니다. 직설법에 우수성이 있다. 직설법이 초대적인 성격이 있다. 직설법은 항상 명령법을 향해 나아간다. 바울은 명령법을 계획하지 않고서는 결코 직설법을 쓰지 않았다. 직설법은 명령법과 함께 나타난다. 해석이 적용을 넘어서는 우수성을 갖고 있는 것처럼 선포(직설법)는 항상 호소를 넘어서는 우수성을 갖는다. 직설법 자체로는 불완전성과 불충분성 역시 존재한다. 직설법은 명령법이 공급 되어야만하고 보충 되어야만 한다.
직설법은 명령법으로 나아가야 한다. 명령법의 초점은 분명히 회개와 믿음이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초점을 맞추면서 그리고 이후에는 회개라는 부름을 던지면서 명령법을 사용. 명령법의 초점은 성화와 기독교 윤리에 대한 초점을 두고 있다. 명령법은 항상 직설법에 의존하고 호소한다. 직설법이 하나님의 주권이라며 명령법은 인간의 책임이다. 직설법이 인간의 행하심을 표현해야만 한다. must, 필요나, 강제, 그리고 의무의 개념에 나타내는 조동사이다. 사무엘 데이버스는 적용에 있어서 명령법이 탁월하게 사용. 명령법은 교회 역사에서 위대한 설교자들이 사용했다. 슈타우퍼는 신약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선포하는 직설법만이 아니다. 거기에 더해서 사람들에게 행동하도록 명령하는 명령법을 담고 있다. 자유주의자들이 직설법을 희생하면서까지 명령법을 강조했다면 객혁주의 교회는 어느 정도의 명령법을 희생하면서 직설법을 강조하는 죄악을 저질렀다. 존 오웬은 구약 성경의 본보기들은 신약 성경의 명령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이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의 모범이다. 자유주의자들은 나이브한 펠라기우스적인 모습으로 위험천만하게 모범이라는 개념을 지나치게 강도했다면 개혁주의 교회는 모법이라는 개념이 설자리나 역할이 전혀 없다.
구속주의 자들은 극단적으로 흘렀다. 모범이라는 단어에 지나치게 반응. 그라스도의 중심성은 맞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일원론을 틀렸다. 그리스도의 중심성은 모범 론을 배제하지 않는다. 구속사적 설교 론에는 명령법이 없다. 영광송의 특징이 있지만 권면, 명령, 규범을 희생 시킨 결과이다. 명령법적인 내용을 피하고 훈계와 적용을 억압하거나 저지하는 결과를 낳았다. 직설법을 강조한다. 회개와 상황의 결여가 두드러진다. 좋은 설교는 하나님 중심적이지만 사람 중심적이지 않는 설교다. 적용과 실천은 본질적으로 자유주의적이고 이상주의적 전제에서 비롯되었다고 비판한다. 구속 주의적 설교는 인간 요소를 경시한다. 구속주의 초점은 구속의 성취에 놓는다. 승리에 대한 직설법으로 묘사. 그러나 구원의 서정은 구속사의 적용에 초점을 맞춘다.(다양한 행동. 명령들을 포함) 구속파 설교자들은 구속의 서정을 희생해서 구속사를 강조한다. 구속파 설교는 명령법을 희생해서 직설법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진정한 설교는 직설법과 명령법이 균형. 진전한 설교는 선포와 호소를 다 포함. 해석과 적용을 다 포함. 직설법이 명령법을 배제하면 그 설교는 침묵주의나 도덕 폐기 론으로 치닫게 된다. 명령법이 직설법을 배제하면 그 설교는 도덕주의거나 율법적으로 치닫게 된다.
5. 직설법과 명령법의 균형이 중요. 제프리 톰슨은 적용이 결여 되어있는 설교는 현대 개혁주의 설교의 재앙이다. 2인칭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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