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본문: 눅14:15-24
2. 명제: 변명은 축복을 상실하는 큰 위험성이 있다.
3:제목: 변명의 위험성.
크게 생각하라 그리고 크게 이루라(D.J.SCHWARTZ 지음)라는 책을 보면 인간 연구에 깊이 파고 들면 성공하지 못한 사람들은 정신을 약화시키는 사고방식의 질병에 걸려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질병의 이름이 변명이다. 라고 합니다. 크게 성공한 비지니스맨, 군인, 세일즈맨, 전문가, 각계지도자들 가운데 자기를 변명할 만한 한 두 가지의 변명거리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루스벨트는 다리가 나쁜 것을 변명할 수 있었을 것이고 트루먼은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것을 변명할 수 있었을 것이고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심장병을 구실로 삼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잔치 비유를 통해서 구원의 진리를 성명하셨습니다. 어떤 주인이 큰 잔치를 준비해 놓고 많은 사람을 초청했지만 다들 여러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초청에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화가 나서 가까운 곳 먼 곳으로 가서 가난한자 병든 자 병신들을 데려와서 내 집을 체우 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면서 초청에 거절한자들은 한사람도 잔치의 맛을 보지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를 사용하여 자주 더 깊고 실제적인 영적인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본문의 어느 주인은 물론 하나님이십니다. 큰 잔치는 천국 잔치를 뜻합니다. 여기 큰 의미는 원어로 메가입니다. 여기에서 메가 마트의 메가가 나왔습니다. 메가 마트에 가보면 없는 것이 없이 다 준비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을 초청합니다. 그런데 초청 받은 사람들이 변명하며 거절을 합니다. 이 비유를 통해서 예수님은 변명은 하나님의 축복을 상실하는 큰 위험성이 있다고 하십니다. 왜 변명은 신앙생활에 큰 손해를 가져오는 위험성이 있는가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 때문입니다.
첫째 이유는 변명은 거짓에 기초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18-20)
주인의 초청에 세 사람의 변명을 보게 됩니다. 다 일치하게 변명함으로서 주인의 초청을 거절합니다. 첫째 사람은 받을 샀으면 불가불 못갑니다. 초청 받기 전 밭을 면밀히 살피고 샀습니다. 살 때 밭을 이미 확인하고 샀을 것입니다. 그런데 초청을 받자 밭 때문이라고 변명했습니다. 이 사람은 가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가고 싶지 않기에 변명을 늘어놓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은 소를 샀으며 불가불 못가겠다. 고했습니다. 소살 때 살피지 않고 소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초청 받자 소 샀기 때문이라고 변명합니다. 현대적으로 표현하면 새 차를 뽑았기 때문에 갈 수 없습니다. 이 사람도 사실 거짓말을 하고 있습니다. 셋째 사람도 장가들였기에 불가불 못 가겠다고 합니다. 성경은 결혼을 매우 중요하게 취급 합니다.그러나 결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입니다. 하나님은 장사하는 것, 돈 버는 것 나무라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 자신의 영혼입니다. 이 세상을 다 얻고도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리면 그것은 가장 바보짓입니다. 이 사람도 거짓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들 거짓말을 사용하여 자신을 변명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거절하기는 뭐하니까? 변명이라는 무기를 사용했던 것입니다. 변명은 사실 거짓에 기초하는 것이 많습니다. 변명은 가장 교묘한 인간의 죄의 특성입니다. 하나님께서 따먹지 말라 고 한 선악과를 따먹은 인간의 조상 남자 아담에게 왜 그러했는고 묻으시자 당신이 준 여자가 주었기 때문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았습니다. 여자 하와에게 왜 네가 죄를 지었느냐고 묻자 뱀이 때문이라고 돌려 됩니다. 변명은 자기 책임을 회피하는 거짓에 기초한 불신앙입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왜 주인의 초청을 거절했을까요? 무지해서 그렇게 했을 수도 있겠습니다. 또한 그 초청의 중요성을 몰랐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냥 가기 싫어서 일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일상생활에 매여 있기 때문입니다. 일상생활에 매임이 자신을 잃어버리는 지름길이 될 수가 있습니다. 우선순위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들이 밭 사고 소사고 장가들고 돈 벌고 공부하고 친구 만나고하는 일상생활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내영혼의 문제보다 영원한 하나님의 세계보다 더 가치 있게 생각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래서 변명은 축복을 상실해버릴 수 도 있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잃어버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변명은 대개 거짓에 기초한 경우가 많습니다. 거짓된 사실에 기초하여 자신을 세우면 쉽게 무너집니다. 따라서 변명과 구실을 못 박는 것이 신앙생활의 지름길입니다. 진리에 기초하여 내 인생을 세워야 견고해지는 것입니다. 변명을 무너뜨리는 것이 정직과 순종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직과 순종이 신앙 성장의 첩경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변명하지 말고 하나님 앞과 나 양심 앞에 정직하십시다. 변명하지 말고 순종을 배우십시다. 신앙생활은 순종을 배우는 길입니다. 예수님도 순종을 통해서 성장했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순종을 통해서 배우셨다면 하물면 우리는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통하여 만민이 구원을 얻을 길을 여신 것입니다. 변명을 정복하는 것이 순종입니다. 변명은 신앙생활에 큰 손해를 가져오는 위험성이 있는가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변명은 인격적인 관계 단절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16-17, 21)
비유에서 보면 주인은 참으로 인격적인 분이심이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16절 주인은 잔치가 있을 것인데 초청합니다. 라고 종을 보내어 미리 정중하게 초청했습니다. 첫 번째 초청입니다. 사실 초청받은 사람은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모두를 초청한 것은 아닙니다. 초청 받은 사람은 영광입니다. 청아 대에 아무나 초청 받지 못합니다. 초청은 원어의 문법을 보면 완료 수동태입니다. 초청자가 이미 정해졌다는 의미입니다. 잔치가 개설되기 전 이미 초청자가 정해졌습니다. 선택 되었다는 뜻입니다. 구원론 적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받은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창세전에 천국 잔치에 오도록 선택 받은 영광을 얻은 것입니다. 17절 “잔치 할 시간에” 두 번째로 또다시 종을 보내어 초청합니다. 두 번째 부르심입니다. 아무나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초청 받았던 그들을 정중하게 부르신 것입니다. 선택이 먼저고 부르심이 그 다음입니다. 왕은 매우 신사적인 분이십니다. 왕이 두 번씩이나 예의를 갖추고 초청하셨습니다. 이 주인 즉 왕은 우리 하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매우 인격적인 분이십니다. 천국 잔치를 여시고 미리 많은 종들을 보냅니다. 예수 믿으세요. 교회에 꼭 오십시오. 행복 나눔 축제 주일날 꼭 오십시오. 은혜 받으세요. 기도하세요. 양육 받으세요. 수개월 전부터 초대했습니다. 전화로, 심방으로, 선물을 보내고 정중하게 참석을 부탁했습니다. 사실 단한 번 초청에 예수 믿었던 사람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막상 그날이 되어 오십시오. 정중하게 초대를 하니 여러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변명은 사실 하나님의 인격적인 초청에 대한 거절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몸이요 전하는 분들은 예수님의 종입니다. 그 종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과 같습니다. 인격적인 하나님의 인격을 무시하고 변명하며 딱 거절합니다. 왕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무례한 짓입니다. 하나님의 정중한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순종입니다. 불순종은 하나님의 인격과 사랑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금이 가는 것입니다. 그 소리를 들은 하나님의 반응은 무엇이었죠? 21절"집 주인이 노하여“분노할 줄 모르는 인격은 참 인격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과 인내의 하나님이시지만 죄를 미워하시는 거룩하신 분십니다. 왜 주인은 화를 내었을까요? 인격적인 모독 감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어리석음에 대한 의로운 분노인 것입니다. 죄에 대한 분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 우신 분이십니다. 주님의 인내에도 한계가 있습니다. 하나님도 감정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분노할 때 분노할 줄 아는 것이 인격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인격을 모독하는 관계를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잔치를 베풀어 많은 사람들을 초청했을까요? 다른 성경은 이 잔치를 왕의 아들의 결혼식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예수님이십니다. 이분이 신랑입니다. 신부는 누구일까요. 초대 받은 우리 인생들입니다. 우리는 신부로 초대 된 것입니다. 그분은 세상의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아드님이시다. 그분의 신부 감으로 우리를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영광스런 예수님의 신부로 삼고자 잔치를 여시고 초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내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었습니다. 흥분이 되지 않습니까? 나를 하나님이 이렇게 귀하게 여기시다니 이 세상의 사랑 받은 단 한사람처럼 여기신다. 라고 어거스틴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런 초대를 거절한 것은 바보짓입니다. 복을 차버린 행위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짓입니다. 신랑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항상 복 받는 사람은 적습니다. 자신의 영혼에 무관심 한 것이야 말로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영원히 변치 않는 자신의 영혼에 관심을 가지는 것입니다. 영혼이 죄 때문에 죽어있습니다. 그 죽은 영혼을 살리는 것은 예수님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결혼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영접할 때 내안에 들어오십니다. 성령님이 내안에 들어오십니다. 내 모든 죄가 용서 받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신랑이요. 나는 예수님의 사랑 받는 신부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이 놀라운 영광을 잘 모르는 우리의 어리석음을 깊이 회개하십니다. 그리고 나를 예수님의 사랑 받은 신부로 삼으시며 감격하며 감사하십시다. 예수 믿는 나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나의 신랑으로 영접하니 신부로 삼아 주셨습니다. 은혜로 신부가 되었으니 신부는 신부답게 살아야합니다. 신부는 정결해야합니다. 정결하게 되는 길은 나의 정체성을 믿고 확신하며 주장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의 신부다, 주장하십시오. 믿으십시오. 그러면 더 정결한 신부로 변화됩니다. 그리고 둘째는 신랑에게 순종입니다. 변명은 관계 단절을 가져옵니다. 변명은 불신앙이요 불순종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신랑을 믿지 못하겠다니 신랑이 얼마나 섭섭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변명하면 할수록 신랑과의 관계는 멀어집니다. 신랑은 죽기까지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말씀은 나를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변명을 십자가에 못 박고 순종하면 할수록 신랑의 사랑을 더 누리게 될 것입니다. 한번 크게 외치십시다. 나는 예수님의 거룩한 신부이다. 변명을 떠나가라! 오직 신랑에게 순종합시다. 어미 꿩이 새끼들에게 늘 이런 주의를 주었습니다. 얘들아, 너희들은 땅위에서 먹이를 찾아 먹을 때, 입으로는 먹이를 먹되 귀를 열어서 내 음성이 들리는지 주의를 기울여라. 내가 망을 보고 있다가 너희를 해치려는 짐승이 나타나면 크게 소리를 칠 테니 내 목소리가 들리면 지체 말고 나무위로 날아오너라. 너무 멀리가면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테니 멀리가지마라. 그래서 꿩 새끼들은 엄마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먹이를 찾으면서 입으로는 먹이를 먹고 귀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활짝 열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마리는 엄마의 말을 귓전으로 흘려버렸습니다. 꿩 새끼 한 마리는 맛있는 먹이를 먹는데 정신이 팔려 형제들과 떨어져 멀리 갔습니다. 꿩 새끼들이 한창 먹이를 먹고 있을 때 여우 한 마리가 꿩 새끼들을 발견하고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새끼들이 위험하게 된 것을 본 엄마 꿩이 소리를 지르자, 새끼 꿩들은 엄마의 목소리를 듣고 위험이 다가온 줄을 알고 일제히 나무 위로 날아갔습니다. 그러나 엄마 꿩과 멀리 떨어져 있던 꿩 새끼는 위험을 알려주는 엄마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여 그만 여우에게 잡혔습니다. 너희가 하늘의 별같이 많았을지라도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남는 자가 얼마 되지 못할 것이라. (신28:62) 순종이 사는 길입니다. 아멘! 왜 변명은 신앙생활에 큰 손해를 가져오는 위험성이 있는가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유들 때문입니다.
3. 변명은 축복을 놓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21-24)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구원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다 준비 해놓으시고 초청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초대에 순종만 요구됩니다. 나는 빈손 들고 가면 됩니다. 구원은 전적인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입니다. 왜 왕은 오라고 명령하십니까? 하나님의 독자이신 자기 아들과의 혼안 잔치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생명과 관련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중요한 경우에만 성경에서 하나님은 명령하십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선물을 안 받겠다면 그 결과는 자신이 책임져야합니다. 24절“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변명은 축복을 놓치는 것이 됩니다. 잔치에 오지 않는 사람은 잔치의 즐거움을 맛볼 수가 없습니다.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이 내리시는 하늘의 은혜의 단비를 마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혼의 양식인데 안 들으면 믿음이 생기지 않는 것입니다. 초청 받은 사람은 많지만 오는 사람은 적습니다. 선택 받은 사람은 많지만 구원 받은 사람은 적습니다. 누구나 축복의 기회를 받았지만 실제 그 축복을 누리는 사람은 적습니다. 구원의 책임은 인간 자신에게 달려있습니다. 천국 잔치에 오는 결단은 인간 자신이 해야 합니다. 밥은 자신이 먹어야합니다. 은혜받기 위해 오는 것은 자신의 몫입니다. 안 오는 사람은 하나님이 베 푸시는 잔치의 맛을 볼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구원 받는다는 만인 구원론은 비 성경적입니다. 그러나 처음 초청 받은 사람이 오지 않는다고 해서 하나님이 손해 보시지 않습니다. 그 축복을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 보내십니다. 21-23“21 종이 돌아와 주인에게 그대로 고하니 이에 집주인이 노하여 그 종에게 이르되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 하니라 22 종이 가로되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 23 주인이 종에게 이르되 길과 산울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 하나님의 축복을 어떤 사람에게 전하라고 합니까?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까지 더 어려운 지역까지 가서 데려오라고 종에게 명령합니다. 종에게 요구되는 것은 어떤 환경 가운데서도 순종입니다. 가까이 사는 사람, 먼 곳에 사는 사람 중 가난한자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고 했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문제 있는 사람들입니다. 문제가 있기 때문에 가난한 마음을 가지기가 쉽습니다. 천국은 마음이 가난자의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 나는 할일이 많은 사람이요 하면서 거만을 피우는 사람은 은혜 받기 어렵습니다. 전도의 전략을 놓치면 안 됩니다. 부자 보다 가난한 사람, 성한 사람보다 병든 사람이 전도의 대상입니다. 오늘 본문의 처음 초청 받은 사람은 유대인을 염두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일상생활의 바쁨이라는 핑계로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이 복음이 이방인에게 전파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축복을 빼앗기지 마십시다. 나에게 임한 축복을 내가 관리를 잘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돌아갑니다. 항상 마음이 가난한자들만이 하나님의 축복을 소유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왜 왕께서 먼 곳까지 가서 강권하여 집을 채우라고 하실까요? 주님의 마음은 모든 지역과 사람들이 다 구원 받기를 구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마음은 넓으십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이 구원 받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나만 구원 받으면 되었지 이것은 이기적인 신앙입니다. 주님은 많은 사람들이 천국 잔치에 참여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협소한 선교 마인드는 주님을 슬프시게 합니다. 이기적인 신앙생활을 깊이 회개하십시다. 하나님의 초청을 거절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놓치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인생에 문제 있는 사람이 전도의 대상입니다. 사실 인생의 문제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따라서 누구나 다 전도의 대상입니다. 전도자는 이 사람이 안 믿어도 낙심하지 말고 또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는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