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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회의감에 빠질 대

wordlove 2020. 11. 7. 09:12

1.본문: 73

2. 명제: 성경적인 관점에서 고난을 바르게 이해해야한다.

3. 제목: 신앙의 회의감에 빠질 때

 

1. 갈등, 나의 믿음의 기초가 흔들거립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고자 애쓰는 아삽이라는 사람의 노래가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그는 교회에서 성가 대장으로 봉사하는 참으로 경건한 신자였습니다. 아삽은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선을 베 푸시며 그 중에서도 특별히 마음이 깨끗한 자에게 선을 베 푸시는 분으로 확신하며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날 그의 믿음의 뿌리가 흔들리는 깊은 신앙의 회의감에 빠졌습니다. 무엇 때문이라고요? 그의 독백을 들어 보십시오. 이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가만히 보니까 자신의 믿음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소위 하나님을 안 믿는 악인들이 너무 잘되는 것 같습니다. 그들의 형통을 보니까 자신의 마음에 질투심마저 생깁니다. 그들은 일평생 아무런 고통도 없이 건강하게 호의호식하며 지냅니다. 다른 사람들과 같이 어려움을 당하거나 병으로 고생하는 일도 없습니다. 교만을 목걸이로 삼고 폭력을 옷으로 삼아 사는 악한 인생들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악을 토하고 그들의 탐욕은 하늘 높은 줄 모릅니다. 그들은 남을 조롱하며 악한 말을 하고 거만을 부리며 은근히 남을 위협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들은 입으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을 대적하고 혀로는 땅에 있는 사람들에게 악담을 퍼 붙습니다. 그들은 입을 열어 "하나님이 어떻게 알겠는가? 가장 높으신 분이라도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알 수는 없다"라고 비아냥거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악인들은 언제나 편안한 생활을 하고 그들의 재산은 날로 늘어만 갑니다. 만사형통합니다. 그들의 모습에 아삽의 심사는 질투심으로 끌어 오르고 과연 하나님은 의로 우시며 공평하신 분이신가에 대한 회의감으로 그의 신앙은 비 뜰 거리고 있었습니다.

 

2. 갈등 심화, 깨끗한 양심을 지키며 사는 것은 하사로구나

아삽은 두 주먹을 불끈 쥐면서 지금까지 내가 깨끗한 마음으로 살고 하나님 앞에 죄 짓지 않고 양심적으로 살려 고 했던 모든 행동들은 다 허사였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잠도 오지 않으며 바보 멍청이 같은 삶을 살아 왔다고 생각하니 손해의식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뜰 리기 조차합니다. 죄 짓 기를 밥 먹듯이 하면서 사는 악인들은 저렇게 형통 하는데 믿음으로 바르게 살려 고 몸부림치는 아삽 자신은 종일 괴로움을 당하며 아침마다 벌을 받으니 이 얼마나 불공평한 일입니까?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신 것인가? 아삽은 깊은 신앙의 회의감에 빠졌습니다. 지난 세기의 성자로 칭송 받는 테레사 수녀도 한때 하나님은 안 계신 것이 아닌가라는 깊은 신앙의 절망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아삽이 겪는 절망감과 회의감이 이런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삽은 마음에 담겨있는 모든 의심을 다 뱉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만약 다른 성도들이 그의 말을 들었다면 저 사람이 과연 하나님 믿는 백성 맞아 어떻게 저렇게 불신의 말을 함부로 하지 그런 의혹의 길을 주었을지도 모릅니다. 아삽은 악인이 잘되고 믿음으로 살고자 애쓰는 자신은 오히려 온갖 고초를 다 당하는 이 현실을 도저히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아삽과 비슷한 고민을 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믿음이 좋은 분들 가운데서고 종종 나타나는 현상이기도합니다. 하나님도 안 믿고 죄를 낙으로 삼는 자들은 오히려 잘되는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나는 왜 이 모양이야! 이러한 신앙의 의심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분들도 있는 것이 또한 현실입니다.

 

3. 전환, 내가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갔을 때,

아삽은 의심의 나날을 보내며 절망 가운데 메 달려 있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는 하나님의 성전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 자기 고민을 털어 놓기 시작했습니다.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엎드려 자신의 고민을 하나님 앞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기도하는 아삽에게 하나님께서 어두운 아삽의 눈을 열어 셔 서 놀라운 관경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렇게 떵떵거리면 살던 교만한 악인들의 최후를 보여주셨습니다. 천년만년 형통하게 살 것처럼 보였던 악인들의 최후는 과연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미끄러운 곳에 두셔서 파멸에 밀어 넣으시니 그들이 순식간에 넘어져 끔찍한 종말을 맞이하는 것입니다. 마치 그 악인들은 아침이 되면 사라지는 꿈과 같은 허무한 신세로 전략하고 말았습니다. 침묵 하시는 것처럼 보였던 하나님께서 일어나시니 악인들의 존재는 꿈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말에 권불 십년이라 했고 3대 부자도 없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평생 권력을 잡고 있을 것 같았던 김일성이 어느 날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박 대통령도 자기의 고추 친구의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고 다들 놀랐습니다. 박원순 시장도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에 다들 놀랍니다. 건강하다고 자랑하던 친구가 쓰러져 병석에 누어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생무상을 느낍니다. 정말 인생은 안개와 같이 허무합니다. 아무도 자기 인생을 자랑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우리 인생이 당하는 고난에 대한 두 가지 큰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기복적인 견해입니다. 우리 한국인의 혼에는 기복적인 신앙이 깊이 뿌리 박혀있습니다. 예수를 믿어도 아직도 이 기복 신앙의 뿌리에 근거한 신앙을 가진 신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이 기복 신앙은 일시적이고 현실적인 축복을 근거로 고난을 이해합니다. 교회안의 형통 신앙도 비슷합니다. 만사가 잘되는 형통만을 축복으로 생각합니다. 반면 고난은 하나님의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런 기복적인 신앙을 가진 교인들은 고난을 만나면 자신은 하나님으로부터 저주 받은 자라고 부끄럽게 여기며 자신을 정죄하며 자학하기도 합니다. 이 기복 신앙은 윤리 의식이 결여 되어있습니다. 옳고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고 아무튼 잘 되었는가 못되었는가에만 관심이 집중 되어있습니다. 본문의 아삽이라는 사람도 이런 신앙을 가진 것으로 보입니다.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고는 질투하고 어려움 당한 자신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합니다. 그러고는 깊은 신앙의 회의감으로 몸부림칩니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적인 견해가 아닙니다. 둘째는 성경적인 견해입니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고난을 보는 견해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평생 형통하게 살 것 같은 악인들의 마지막을 보십시오. 악인은 마지막 날에 반드시 심판 받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으로서 반드시 인간의 선악간의 행실에 대해 심판을 하십니다. 고후 5:10“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 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오늘이 아니면 내일 이 땅에서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 살 때 반드시 심판 받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의롭고 공평하신 분이십니다. 끝까지 기다려 보아야합니다. 또한 성경은 이 땅에서의 고난은 의인이 입어야 할 마땅한 옷으로 봅니다. 왜 이 땅에서 예수님을 진실로 믿는 의인들에게 고난이 많습니까? 어둠 움은 빛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참 빛이 이신 예수님이 오시자 어두움은 예수님을 싫어했습니다. 자기 죄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에서 예수님도 많은 고난을 받으셨다가 마침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참 빛을 안고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역시 어두운 세상은 예수 잘 믿은 사람들을 본질적으로 싫어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사도들의 삶도 마찬 가지입니다. 고전 4장 바울의 고백을 들어 보십시오. 고전4:9 내가 생각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4: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되 우리는 비천하여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4: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4:13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마지막 말씀을 보십시오. 바울 사도는 우리는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라고 고백합니다. 사도들은 왜 이런 고난을 당했습니까? 참 빛이신 예수님 편에 서있기 때문이요. 또한 빛이신 이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선전하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믿음 생활 잘하는 사람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그 분의 믿음이 진실하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예수님 편에 서있다는 확신한 증거인 것입니다. 고난이 없다는 것은 결코 자랑할 것이 못됩니다. 나는 예수님 편에 서지 않기 때문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참 축복은 이 땅이 아니라 하늘에 준비 되어있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여러분 이 땅의 축복 예를 들면 재물, 건강, 자식 등은 다 일시적이요 찰나적이며 곧 없어질 것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참 축복은 없어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하늘에 속한 축복인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이요 하나님의 관계로부터 오는 영적인 축복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땅보다 하늘에 더 큰 상이 있음을 약속하고 계십니다. 5:11”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계시록에 보면 주와 복음을 위하여 수고한 자들을 위한 큰 상이 마련되어있다고 말씀하십니다. 22:12”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일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 주님은 의로 우시고 공평하신 분이심으로 이 땅에서 주를 위해 수고한 모든 자들의 행위들을 기억하시고 언제 가는 갚아 주시는 분이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짧은 이 땅에서의 시간표를 따라 판단하지 마시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시간표를 가지고 보면 결코 억울하고 분하지가 아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던 아삽은 마침내 믿음의 눈이 열린 것입니다. 악인의 최후를 보았고 하나님의 의로 우심과 공평하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참 복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어리석음과 무지함을 깊이 회개하기 시작했습니다.”내가 어리석고 무식하여 주 앞에 짐승같이 되었습니다. “ 하나님을 의심하며 세상의 형통을 질투하며 믿음의 향기를 드러내지 못했던 자신의 불신을 깊이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는 이제는 하나님의 눈으로 고난을 보며 세상을 보는 큰 믿음의 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경적인 관점에서 고난을 바라 볼 때 우리가 만나는 고난을 바르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멘!

 

4. 대단원, 하늘에서는 나에게 주 밖에 없나이다.

드디어 아삽은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쁨으로 노래하기 시작합니다. 늘에서는 나에게 주밖에 없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있는데 이 세상에서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내 몸과 마음은 쇠약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며 내가 필요로 하는 전부입니다. 주를 멀리하는 자는 망할 것입니다. 주께 신실치 못한 자를 주는 멸망시키셨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것이 정말 좋은 일입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았으니 주께서 행하신 모든 일을 널리 전하겠습니다. 이 아삽의 고백과 노래가 저와 여러분의 고백과 찬양이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