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시 73:21-22
2. 명제: 회개는 진정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알게 해준다.
3. 제목: 하나님의 면전에서
아삽이는 성소 즉 하나님의 면전에 들어가서 악인에 대한 생각과 하나님에 대한 생각 그리고 왜 자신이 잘못되었는지를 알았습니다. 무엇보다 아삽은 자신의 어떠함을 발견하고 진정한 회개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인생의 문제는 자신을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창조주 하나님을 믿지 않고 자신을 구원하려 오신 구주 예수님을 안 믿는 것입니다. 자신을 잘 모르기 때문에 온갖 문제의 늪에 빠져 살고 있는 것입니다. 회개는 진정 자신이 어떠한 자인지를 알게 해줍니다. 아삽이가 성소 즉 하나님의 면전에서 진정한 회개의 결과 발견한 것이 무엇인지를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아삽이가 발견한 첫 번째는 자신의 고통 거리의 대부분은 자기 자신에서 비롯된다는 것입니다. 아삽이는 성소에서 자기의 고통이 전적으로 주변 환경과 악인들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었을 발견한 것입니다. 21“내 마음이 산란하며 내 양심이 찔렸나이다” 킹제임스에서는 “그래서 내 마음이 근심에 찼고 내 신장 속에서 찔렸나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 신장은 즉 콩팥은 고대 심리학에 따르면 감정과 정서를 가리킵니다. 21절은 “내가 내 마음을 찔렀나이다.“ 라는 뜻입니다. 아삽이는 자신의 마음을 자극하고 있었고 자기 자신의 고통을 일으키고 있었으며 자기 자신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삽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가기까지는 모든 문제가 세상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문제는 세상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문제라는 것을 아십니까? 똑 같은 환경 가운데 사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고통스러워하며 슬퍼하며 불평과 불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조용하고 행복해 합니다. 무엇이 다른 것입니까? 그들에게 일어난 일은 똑 같습니다. 그들 자신 속에 있는 어떤 것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이런 시가 있습니다. ”감옥 창문을 통해 두 사람이 밖을 내다보고 있다. 한 사람은 진흙 창을 보고 또 한 사람은 별들을 바라본다.“ 아삽이는 이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자기가 고통 거리를 만들고 확대시키며 더 크게 만들었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찔렀던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밖에 있는 외적인 요인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일에 대한 우리의 반응입니다. 이런 타입의 사람은 ”그는 언제나 두더지가 파놓은 흙 두둑에서 산을 만들어 낸다,“ 즉 두더지가 파놓은 흙 두둑을 아주 거대한 산으로 만들어 버리는 사람입니다. 그리하여 자신은 산과 같은 고통거리를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에 대한 또 다른 표현이 있습니다. 항상 일을 크게 확대시킵니다. 자신이 나타내는 반응이 받는 반응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균형을 이루지 못합니다. 바른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너무나 예민한 상태에 놓여있는 사람입니다. 알레르기적 반응을 나타내는 사람입니다. 아삽이는 자기 자신이 자신의 예민함을 더 부추겼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악인들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가졌습니다. 악인들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다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삽은 자신이 자신의 마음을 어리석게 만든 것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에 대하여 자신이 불쌍하다는 생각이듭니까? 그렇다면 여러분도 아삽이처럼 예민성을 증가 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스스로가 고통스런 체험을 준비하고 있는 셈입니다. 바로 그것이 자기 학대입니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 있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자신을 괴롭게 하는 일종의 왜곡된 즐거움을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말 기이한 일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비참함을 즐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말씀하고 있는 반복된 모습과는 정반대입니다. 빌 4:11-13”빌 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빌 4:1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바울 사도는 극도로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었지만 과민하지 않았습니다. 능력 주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어떠한 형편에 있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라“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져야 할 태도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결코 그렇게 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마치 화약통과 같습니다. 아주 작은 충격만 주어도 폭발합니다. 혈압의 3대 요인이 첫째는 스트레스 둘째는 예민함 셋째가 비만이라고 합니다. 지나치게 예민한 반응이 혈압을 올린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큰 고통을 느낍니다. 그가 자신 때문에 과민한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마 16:24”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자아를 먼저 부인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삶속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웟 자리에 놓고 살기 때문에 균형을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비추어서 우리 자신을 정 검 해 보십시오. 우리의 근심과 어려운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오해와 부당하다고 느끼는 모든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면 모든 것이 다 부풀려져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흙 두둑에서 큰 산을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가 내 자신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에 놀랍지 않습니까?
아삽이가 발견한 두 번째는 자기가 어리석었다는 것입니다.
22“시 73:22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나”을 흠정역은“내가 그렇게 어리석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바보스럽다는 의미입니다. 회개하기 전 아삽이는 이성이 없는 짐승처럼 바보스럽고 무모하고 어리석게 행동한 것입니다. 아삽이는 “내가 주 앞에 짐승이오니”라고 고백합니다. 우리는 아삽이의 정직함과 신실함에 주목해야 합니다. 아삽이는 자신을 전혀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의 실체를 알았습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니” 아삽이는 무엇보다도 본능적으로 행동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짐승과 사람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최고의 은사는 이해력 논리력 생각하는 능력입니다. 짐승도 이기적일 수는 있지만 짐승에게 참된 본질과 기능을 가진 이성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짐승은 본능적으로 행동할 뿐입니다. 동물적인 행동은 주어진 자극에 대한 본능적인 반응인 것입니다. 아삽이는 자신이 그렇게 행동해 왔다고 고백합니다. 어리석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감정에 휘둘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앞뒤를 연결시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아삽이는 불순종의 때에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마음 즉 감정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즉 동물처럼 행동했습니다. 동물은 자극에 대해 즉각적으로 반응하고 생각할 틈도 없이 기계적으로 행동합니다. 우리도 이처럼 행동하기가 얼마나 쉬 운지요. 이것은 불신자의 특징입니다. 믿는 자도 자아가 주인 되어 불순종가운데 살면 불신자와 똑같은 모습을 보입니다. 그리스도가 주인 되어 다스리는 참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의 차이는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자극과 반응 사이에 간격을 둔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을 다른 맥락 속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곧 바로 결론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 일을 자세히 따져 보아야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논리적으로 생각하고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표시입니다. 무엇보다 그리스도인은 영적으로 생각합니다. 그 모든 것을 성경에서 제시하는 진리의 차원에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짐승은 다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함으로 주 앞에 짐승이오니” 본능 즉 감정이 지배하는 이러한 행동은 짐승과 같으면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어린아이는 깊이 생각하지 못하며 얼른 결론을 내립니다. 어린 아이는 자극에 대하여 짐승처럼 반응합니다. 아삽이는 하나님의 면전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발견한 것입니다.
아삽이가 발견한 세 번째는 경건한 삶에 대한 매우 거짓된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아삽은 믿는 자는 항상 만사형통해야만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불평을 했습니다. 13-14“시 73:13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시 73:14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우리들은 만사가 잘되면 즐거워하다가도 잘 안 되면 불평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왜 내게 이렇게 행하는가? 왜 이런 일이 내게 일어나야 하는가?” 우리는 감사에는 더디고 불평 하는 데는 빠른지요. 그것이 바로 짐승과 같은 모습입니다. 짐승은 먹을 것을 주면 좋아합니다. 그러나 짐승은 버릇을 고쳐 주려고 하면 싫어합니다. 이것이 또한 어린 아이의 모습입니다. 어린아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다 취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어린아이가 원하는 것을 빼앗으면 매우 화를 냅니다. 그것이 바로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모든 복을 취할 권리가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언제나 그러한 것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것이 주어지지 않을 때 의문을 표시합니다. 아삽이는 자신에 대하여 “나는 경건한 사람이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런데도 고통 거리가 생겼다. 나는 악인들과 다른데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아삽이는 자신은 이해하지 못해도 하나님은 이유를 가지고 계심이 틀림없다는 결론에 이르러야 했습니다. 왜냐 하며 하나님은 이치에 합당하지 않은 일을 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은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어떠한 고통도 겪어서는 안되며 태양은 우리 주변에서 눈부시게 비춰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반면에 불신자들은 항상 고통을 당하고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그런 것을 약속한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아삽이도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며 주 앞에 짐승이오니” 우리는 짐승처럼 언제나 훈련 받기를 싫어합니다. 하나님께 연단을 받을 때마다 의심을 품고 하나님의 사랑과 선하심까지 의심합니다. 아삽이가 자신이 짐승처럼 행동했다는 말이 바로 이 의미입니다. 본질상 인생은 훈련을 싫어합니다. 통제 받기를 싫어합니다. 이것이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 같은 그리스인의 특징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태도에 대하여 히 12:8“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면 틀림없이 연단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 속에 죄가 있으면 우리는 연단 받아야 합니다. 우리를 일으켜 세워서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게 하 기 위해서 시련과 환난 속으로 우리를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의 자녀 사랑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통을 싫어합니다. 만일 우리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라면 그 고통을 인하여 감사해야 맞 땅 합니다. 시 119:71“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참 그리스도인의 표시는 고통과 징계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을 통하여 그의 자녀들을 하나님께로 가까이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아삽이가 발견한 네 번째는 자신의 무지함입니다.
아삽이는 악인의 참 모습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무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경건한 삶의 전체 목적에서도 대해 무지하였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무지합니다. 무엇에 대하여 무지합니까? 성경이 말하는 구원의 목적과 경건한 삶에 대해 무지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다루시는 방식에 대하여 불평한다면 그것은 성경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우매 무지함으로” 아삽이는 나는 무지한 자로서 행동했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했습니다. 나는 과거의 역사에 대해 읽어 보지 못한 것처럼 행동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의 모습입니다. 우리 자아가 나를 다스리면 마치 하나님 앞에서 짐승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행동합니다. 이것을 아삽이는 발견한 것입니다.
아삽이가 발견한 마지막은 자신의 모든 행동들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행하고 있었다고 고백합니다. “주 앞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하나님을 바로 인식을 한다면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면전에 있습니다. 모든 행동은 하나님 면전에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연 공정하신 분이신가라고 불평한다면 하나님 앞에서 하고 있음을 아십니까? 주 앞에서 아삽이는 하나님의 크심을 망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인식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의심하거나 불평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우리는 땅에 있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특별히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아삽이는 어리석고 미련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사 그분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시어 나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수치와 능욕을 당하게 하신 분이시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침내 아삽이는 참되게 회개한 것입니다. “내가 이같이 우매 무지하여 주 앞에 짐승이오니” 우리 인생은 짐승처럼 어리석습니다. 우리는 부패한 내 자아가 옛 사람이 나를 다스렸습니다. 옛 사람은 자신만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 가면을 벗기십시다. 우리 자신에게 정직합시다. 그리고는 은혜로 우신 하나님께 나아가 우리가 하나님 앞에 벌레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합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받을 권리도 없음을 인정합시다. 그러한 빛에 비추어 자신을 점검해 봅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을 딤전 1: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라고 고백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같은 사람을 용서할 수 있다는 것을 아주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위대한 사도로 부름 받아 복음을 위해 전 삶을 희생했지만 여전히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반응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 그리스도 주 안에 있는 사랑을 놀라워했습니다. 이런 나를 여전히 사랑하시고 용납하시고 또 기회를 주셔서 사용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앞에 엎드렸습니다. 이 사랑의 주님 앞에 엎드려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나의 추한 마음을 정결케 하옵소서! 라고 우리가 진실로 기도한다면 주님은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서 우리 자신을 더 알게 하시고 정결케 하사 주님과 더 가까이 다가가는 축복을 주실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을 알게 하는 생명의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