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갈 5:16-17
2. 명제: 육의 삶은 결코 승리하지 못한다.
3. 제목: 육의 삶
1. 갈등, 우리가 승리하지 못하는 이유
예수님은 우리가 더 선한 삶을 살도록 하 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승리와 평강 그리고 기쁨의 삶을 허락하셨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그것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승리의 삶을 살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어떤 동기로 하나님께 헌신하기로 다짐을 합니다. 그러데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 정죄 감을 느끼면서 다시 새롭게 헌신하고 또 다시 침체에 빠지는 그런 악순환을 반복한 경험들이 있습니다. 동기가 충만 할 때는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이든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습니다. 그런데 그 열심을 내다가 시간이 지나면 지치곤 합니다. 그러면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 받을 수 없어 나 같이 일관성이 없는 사람을 하나님을 사용하시지 않으실 것이야 하며 깊은 침체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새로운 동기가 부어지면 또다시 하나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자 이제 나는 그분 앞에 새로운 삶을 사는 거야라고 다짐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들에게 재 헌신 하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자기를 부인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마 16:24“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승리의 삶을 방해하는 것은 자족하는 마음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는 마음입니다. 빌립이란 제자가 예수님에게 하나님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요 14:9-10“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10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이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이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2. 갈등 심화, 영의 삶
우리는 죄를 나의 힘으로 이기기 위해 애를 써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를 이기는 비결은 보여 주셨는데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의 생명으로 만 가능함을 말씀하십니다. 바울 사도는 갈 5:16-17“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바울은 두 가지 길을 보여 줍니다. 영의 삶은 예수님 안에서 거하는 삷 입니다. 나 안에 계신 생명이신 성령을 의지하는 삶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통해 사시도록 내가 항복하는 삶입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유일한 방법은 내 자신을 예수님 즉 내 안에 계신 성령님께 복종시켜 그분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시도록 허락하는 것입니다. 자신을 복종시키는 것은 나의 의지로 하는 것입니다. 무엇이 당신을 움직이게 합니까? 바로 예수님의 생명이신 성령님이십니다. 그분이 나를 통해서 나타내면 나는 육의 삶이 아니라 은혜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의 삶이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내 안에 거하시는 것입니다. 당신이 예수 믿으면 당신 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이것이 승리의 삶을 살기에 충분한 원동력을 제공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아침에 일어나셔서 오늘은 하나님을 위해서 어떤 일을 좀 할까라는 태도를 보이시지 않으셨습니다. 요 5:17“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예수님은 아침에 일어나 오늘 하루를 하나님께 드리고 그분을 온전히 의지하여 아버지의 생명이 자신을 통해서 나타나도록 간구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하신 일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한다는 것은 내 의지로 그분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항복하고 그분의 생명이 나를 통해서 나타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의 삶이요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법을 배우면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렇지요.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이 모든 것을 행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영을 쫓아 사는 사람은 감사와 기쁨으로 삽니다.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나는 제대로 하는 것이 없으니까 주님이 나를 좋아하지 않을 거야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예수님 안에 있다면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감동을 받으실 것입니다. 믿는 자가 인생에서 승리하는 비결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믿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의 삶이요 은혜의 삶입니다. 하나님은 행위로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십니다. 그분은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3. 전환, 육의 삶입니다.
육이란 성경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살면서 각자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스스로 발전시켜 온 기술 혹은 능력을 말합니다. 즉 우리가 자신의 삶을 관리하는 기술을 말합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육을 가지고 우리 스스로의 능력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우리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육을 가지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의.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전적으로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육의 삶은 정반대로 자신의 능력을 관리하여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방법을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육은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살려고 애쓰는 삶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은혜의 삶이 아니라 육의 삶을 살기 때문에 좌절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육은 마치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스스로 열심히 노력해서 천국에 가겠다고 애쓰는 것과 같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승리의 삶을 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은혜의 삶 대신 육의 삶을 사는 사람은 겉으로는 괜찮아 보입니다. 육적인 것은 결코 역겨운 것만이 아닙니다. 육은 긍정적일 수도 있고 부정적일 수도 있습니다. 육적인 삶은 겉으로 아주 보기 좋게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육적인 삶의 양식을 보다 다양하게 개발하며 삽니다. 어떤 사람들은 육적인 것을 자랑합니다. 사도 바울도 자랑할 것이 많았습니다. 바울 사도의 화려한 인생 스펙을 보십시오. 빌 3;5-8“빌립보서 3장 5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바울 사도는 탁월한 육적인 자랑거리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은 긍정적인 요소이기는 하지만 여전히 육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육을 뛰어넘는 놀라운 진리를 가르쳐 주기 전까지 즉 예수님이 가장 귀하신 것임을 깨닫기 전까지는 그가 해왔던 일들은 종교 행위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는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홀로 자족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그 모든 것은 심판 날에 연기처럼 사라질 것입니다. 믿는 자의 삶은 예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아 사는 삶입니다. 이것만이 영속적인 가치를 지닙니다. 육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이 어떤 일을 얼마나 잘하고 있는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습니다. 육의 특징은 자기 자랑이요 자기 과시입니다. 보통 육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신에게 매우 가혹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끊임없는 정죄 감과 좌절감 속에서 삽니다. 결국 육체를 따라 사는 사람은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살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육체로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계속해서 내가 무언가를 더해야 한다는 느낌을 가지면 우리는 육적으로 더욱 열심히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을 하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일단 이것은 긍정적인 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자족하는 마음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그리스도인의 삶의 승리를 맛볼 수 없게 되며 결국 우리는 좌절하게 됩니다. 그 결과 마음에 쓴 뿌리를 가지게 됩니다. 눅 15장에 두 아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여기서 둘째 아들은 자기 유산을 미리 받아 가지고 집을 떠났습니다. 그는 허랑방탕한 생활로 자기에게 주어진 재산을 다 날려 버린 뒤 거지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그때 아버지가 어떻게 맞이했습니까? 눅 15:20"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 하나님의 사랑을 지금보다 더 많이 받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편 큰 아들도 밭에서 일을 하고 돌아오는데 집 가까이 이르렀을 때 음악 소리와 춤추면서 노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큰 아들이 집의 종에게 물었습니다. 눅 15:27-32”27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그의 건강한 몸을 다시 맞아들이게 됨을 인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28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29 아버지께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기와 함께 먹어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찐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31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32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 탕자는 아버지로부터 멀리 떠났기 때문에 비참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면 우리 인생은 비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도 그분과 관계가 단절된 체로 살아간다면 비참하게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한편 큰 아들은 자기 스스로 아버지를 위해 무언가를 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큰 아들은 오늘날 교회 안에서 주님을 충성스럽게 섬기고 있지만 내면은 비참한 삶을 살아가는 육적인 그리스도인으로 상징되는 것입니다. 큰 아들은 집을 떠나지는 안 했지만 탕자와 마찬가지로 아버지를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 대한 왜곡된 시각을 즉 내가 아버지 집에서 여러 해 동안 섬겼고 바른 일만 했기 때문에 아버지는 나를 더 사랑할 거야 라는 사고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돌아온 탕자에게 동생이라고 부르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탕자를 위해 잔치를 여는 것이 아닙니까? 이 얼마나 억울했을까요?
4. 대단원, 하나님의 마음
섬김이란 무엇입니까? 섬김이란 우리가 예수님과 맺은 관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나타나는 결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모든 섬김은 하나님께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즉 무슨 일을 하던 사랑이 동기가 되지 않으면 하나님께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말입니다. 큰 아들의 항의에 대해 아버지의 반응은 지극한 아버지의 사랑을 보여 줍니다. ”얘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너의 것이다. 내가 가지 것이 다 네 것인데 너는 살찐 송아지 몇 마리로 잔치를 베풀었다고 화가 났구나! 내가 송아지를 원하느냐? 저기 들판을 보라. 수천 머리의 소가 있지 않느냐? 저것들이 다 네 것인 줄 알지 못하느냐? “?“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마음을 품고 계십니다. 그분은 자신의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 넉넉히 마음을 열어 놓고 계십니다. 하지만 교회 안에는 자신이 하나님께 얼마나 용납받는 존재인지 모르고 살아가는 신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열심히 섬기지만 큰 아들처럼 마음 한 구석에는 불만이 가득 차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불행한 삶입니까? 육의 삶은 옳은 일을 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 있습니다. 그러나 은혜의 삶은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맺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예수님을 처음 영접할 때를 기억해 보십시오. 그런데 우리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예수님과의 친밀함을 잃어버립니다. 친밀한 관계를 가지는 대신 규율과 법칙에 얽매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존재 가치보다 행위에 초점을 두게 되었습니다.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아버지는 잔치를 베 풀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하나님 아버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율법주의는 잘못된 과거의 행위를 들추어서 꾸짖습니다. 은혜는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즐기게 하는 반면 율법주의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잘못된 행위를 들춰내고 정죄합니다. 사람들은 보다 영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성장하기를 원할 때 더 노력하겠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제 그것이 노력으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 왔습니까? 얼마나 많이 헌신해 왔습니까? 이제 그런 헛된 노력 즉 자신의 힘으로 사는 노력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의지하겠다고 고백해야 합니다. 오랫동안 우리는 더 노력하는 것이 승리의 열쇠라고 믿어 왔습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앞에서 지적한 동기 부여, 정죄 감, 재 헌신의 악순환을 기억하십니까? 이것들은 육으로 사는 삶입니다. 율법적인 삶의 한 형태인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올바른 정체성을 찾아야 합니다. 그분 안에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분 안에 거하는 삶이 육체에 대해서 이기는 열쇠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이러한 믿음이 승리를 가져옵니다. 이것은 세상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그렇다면 그러한 육체를 어떻게 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육은 마치 문어 다리와도 같습니다. 질투, 쓴 뿌리, 종교적 행위, 등 이 모든 것은 육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잘라 내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나 이들은 잘라도 다시 자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강해집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육을 이길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승리할 수 있도록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우리도 함께 못 박혔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또다시 새롭게 헌신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주님! 이제 스스로 애쓰고 노력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더 잘해 보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에 지쳤습니다. 더 잘해 보려고 애쓰는 것에 진력이 납니다. 저 자신의 힘으로 해 보려는 몸부림을 끊어 버리고 이제 더 이상 발버둥을 치지 않겠습니다. 주님께 빈손 들고 나아갑니다. 저의 모든 삶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이 내 안에서 하시고자 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행하소서. 그래서 내 육의 삶을 끊어 주옵소서. 우리가 주님 안에 거한다는 것이 무엇이지 점점 알아 갈수록 주님은 당신이 승리를 경험할 수 있도록 허락하실 것입니다. 헌신을 반복하지 마십시오. 이미 많이 해 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별로 소용이 없다는 것을 잘 알지 않습니까? 이제 자신을 부인하고 예수님께 삶을 드리십시오. 그분의 은혜로 살아가십시오. 그분의 사랑을 붙자고 생명 되신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가십시오.. 그러면 예수님은 여러분을 통해 능력의 삶을 사실 것입니다. 오늘 말씀에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내 안에 계신 나의 생명 되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 안에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의 삶이요. 그리스도인의 승리하는 삶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