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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진 삶(수정본)

wordlove 2020. 11. 17. 08:25

1. 본문: 12:24

2. 명제: 내 육이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3. 제목: 깨어진 삶

 

1. 깨어진 삶이란 무엇인가요?

성경에서 육이란 자족하는 삶인데 이것이 예수님의 넘치는 은혜를 받아들이는데 가장 큰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믿는 자들의 삶은 생수의 강이 흐른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많은 믿는 자들이 예수님이 약속하신 생수의 강을 경험하지 못하며 게다가 그 중요성조차 모르고 사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족하는 마음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열심을 다해서 승리하는 신앙생활을 소망하지만 실패를 경험한 적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실패를 통해서 우리 육체의 한계를 깨달도록 하나님을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우리 자족의 한계에 부딪쳤을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육체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육적인 생활 즉 자족하는 삶을 회개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인간 조상 아담과 하와가 지녔던 문제였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 안게 거하는 대신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먹었을 때 그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과 독립적으로 살아가겠다는 움직임이 시작된 것입니다. 바로 그 이후로 인생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독립하여 살아가는 자족하는 삶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육의 삶의 시작인 것입니다. 그것은 좌절과 근심으로 가득 찬 삶의 시작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어 그분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하나님과 떨어져 사는 삶을 선택합니다. 성경을 이것을 육의 삶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육의 삶을 정리하도록 인도 하십니다. 우리가 육의 삶에서 깨어지는 자리로 나아오기 전 까지는 하나님이 온전히 우리를 사용하실 수가 없는 것입니다. 즉 우리는 은혜의 삶을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깨어짐의 중요성이 나오는 것입니다. 깨어짐과 절대적인 순복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깨어짐은 우리의 육의 능력을 의지하는 것을 포기할 때 생기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삶을 스스로 주관하려는 의도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한편 절대적인 순복이란 주님께서 나를 완전히 맡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면 어떤 일이든지 내게, 나와함께, 내속에, 혹은 나를 통해 주님이 마음대로 하실 수 있도록 나를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내어 드리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절대적인 순복이란 내 삶을 주님께 드려 그분의 뜻을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곧 그분께 완전히 항복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순복하는 과정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은혜 생명을 경험하기 위한 필수적인 단계인 것입니다. 하지만 순종에는 고통이 동반하기 때문에 쉽지가 않습니다. 우리 안에는 온전히 순종하기를 거부하는 불신과 교만이 있습니다. 두 손 들고 하나님께 항복하기 전까지는 우리 육은 어떻게든 스스로의 능력을 동원해서 살아보려고 합니다. 일단 우리 능력으로 먼저 해보는 것입니다. 이것이 육의 성품입니다. 어떤 교인이 등산 중에 낭떠리지에서 미끄러져 나뭇가지 하나만 겨우 붙들고 있었습니다. 밑을 내려다보니 까마득하기만 하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거지 누구 없어요?그 때 하늘에서 천둥소리가 났습니다. 그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단다. 손을 놓아라 내가 너를 보호해 주마. 하나님이 내려다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다시 위를 보며 아니 거기 다른 사람이 없어요?‘ 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처럼 위급할 때조차도 즉각적으로 온전히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지를 못합니다. 8:35 “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 말씀에서 목숨을 잃는다는 것은 마지막으로 잡고 있는 나뭇가지에서 손을 떼는 것입니다. 즉 자신이 기댈 수 있는 것도 모두 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온전히 주님을 의지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분이 우리를 채워 주십니다. 하지만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특별한 상황을 허락해 연단시키는 것입니다. 그분은 모든 일의 결국을 아시는 분이십니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은 우리가 자족하는 마음을 내려놓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 한계를 깨닫고 주님을 신뢰하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역경을 통해서 하십니다. 고난에 부딪쳤을 때 우리는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자신에게 쓰라린 실패를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들을 통해 우리가 의지하고 있는 자족하는 마음을 없애는데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그분만이 우리의 생명인 것을 알게 하십니다. 성경속의 많은 인물들도 이러한 과정 속에서 깨어졌습니다.

 

2. 하나님이 고통을 주시는 이유는 무엇이죠?

하나님이 쓰신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깨어짐의 쓰라린 과정을 겪었습니다. 모세도 마찬가지입니다. 깨어짐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소망을 포기한 상태를 말합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기 위해 겪어야만 하는 필수 과정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의미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12: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예수님은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땅에 심겨진 씨는 일단 죽어야 합니다. 껍질이 벗겨지고 죽어야 그 안에 있는 생명이 움터 나서 땅위로 솟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자족하는 마음이 죽어서 생명의 열매를 맺기 원하십니다. 그렇게 해야 자신을 의지하는 삶의 방식과 전략을 멈추고 새로운 생명으로 때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 신화에 피닉스라는 새가 나옵니다. 이 새는 끊임없이 날아다닙니다. 잠시라도 날개 짓을 멈추면 육지에 떨어져 불타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새는 육지에 발을 내려놓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맞이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불에 타 형체가 사라진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새로 탄생하여 날아올랐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가 바로 주님이 우리로 하여금 내려오라는 자리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원할 때 바로 그곳이 하나님이 당신을 초청하는 자리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남기 위해서 계속해서 날개를 퍼덕입니다. 우리는 아무리 피곤해도 끊임없이 날고 자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우리가 지치고 상해 모든 것을 포기할 때까지 기다립니다. 우리의 모든 자아가 불타 버릴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이런 식으로 일하시는 이유를 이해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즉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를 실망시키고 고통을 통해 단련시키며 끝까지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는 생해 초기 40년을 애굽의 궁전에서 보냈습니다. 거기서의 40년은 화려한 세월이었습니다. 이 기간에 그는 자신의 육을 발전 시켰습니다. 삶을 관리하고 헤쳐 나가는 기술들을 개발하여 유능한 청치 인이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은 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가는 비젼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 백성을 구원코자하는 열정이 넘쳐 혈기를 부려 자기 동족을 괴롭히는 애굽 인을 죽였습니다. 살인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세는 도망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애굽의 궁전에서 광야로 내 모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세는 광야에서 떠나 40년을 보냈습니다. 거기서는 과거의 화려함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목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풍족함을 누리던 삶에서 들판의 궁핍함으로 옮겨진 삶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섬김을 받는 자리에서 양들을 돌보는 초라한 목자로 전략한 것입니다. 모세에게 광야는 하나님의 새로운 훈련의 장이었습니다. 이 과정이 끝날 즈음에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고 나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모세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필요한 준비를 끝낸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서 일하실 수 있는 자리에게까지 모세를 끌어내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계속해서 나로부터 무언가를 빼앗아 가시는 것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이 때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는구나. 하나님은 내 문제에 관심도 없고 나를 도와주시지도 않는구나. 이것은 사탄이 주는 거짓말입니다. 사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너무 관심이 많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같이 지키고 계십니다. 주무시거나 졸지도 않으시며 우리를 보호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상실의 마음과 그에 따른 고통을 경험하도록 허락하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자족하는 것을 멈출 때까지 그렇게 하십니다. 그렇게 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하는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행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광야에서 모세를 찾아와 지팡이를 던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지팡이는 모세 자신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전부였습니다. 그것은 목자로서 타고난 능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육의 능력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그에게 독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던 모세에게 이 사실을 깨달도록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지팡이를 던졌을 때 그것이 뱀이 되는 기적을 체험하였습니다. 모세는 자신을 더 이상 신뢰 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뱀을 잡으라고 하셨고 그가 잡았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기회나 능력을 빼앗아 가십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자족하기를 중단하고 하나님께로 나아오게 하기 위한 그분의 깊은 사랑의 조치입니다. 그리고 모든 일이 우리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됨을 깨닫게 하십니다. 4:20“애굽으로 돌아가데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았더라.” 라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날 이후로 그 지팡이는 더 이상 모세의 지팡이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스리는 지팡이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서 언제든지 원하시는 것을 가져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깨어짐을 통해서 우리가 육의 능력을 더 이상 신뢰하지 않기를 원하십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그러한 과정을 겪게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40년을 지내는 동안 실제로 일어난 최상의 일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시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십니다. 때때로 하나님은 그 기도를 진지하게 받아 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훈련시키십니다. 하나님이 누군가를 쓰기기 위해서는 연단이 필요합니다. 삶 가운데 일어나는 여러 가지 사건을 통해 우리의 자족하는 마음에 한계 상황을 맞게 하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쓸 수 있도록 이끄십니다. 이런 일이 진행되는 과정은 즐겁지 않습니다. 이런 때는 상황이 갈수록 악화 됩니다. 이것은 고통스러운 과정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주님께 사용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고통은 반갑지가 않지만 때론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가 되기도 합니다. 위기에 빠졌을 때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고통은 우리의 가장 친한 친구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지속 시켜 자족의 한계에 이르게 하시거나 혹은 다른 목적을 성취하기 원하십니다. 이런 기회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이 더욱 분명해지며 그러한 원인을 더욱 명확히 알게 됩니다. 이렇게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훈련 학교를 졸업합니다. 고후 1:8-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9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바울 사도의 고백입니다. 왜 하나님이 고통을 하락하시는지에 대한 이유가 설명되어있습니다. 바울은 자기가 만난 고난을 자기를 의뢰하지 않도록 하 기 위함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만약 당신이 지금 고통 중에 있다면 그러한 깨어짐은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경험 할 수 있는 곳으로 가는 문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습니다. 모세에게 깨어짐은 너무 비참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바로의 궁궐에서 보낸 첫 번째 40년은 화려한 삶이었습니다. 그 다음 광야에서의 40년은 비참한 삶이었습니다. 한편 그의 생의 마지막 40년은 기적의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자신의 육체에 대한 우월감을 깨지 않고는 궁궐의 삶에서 기적의 삶으로 옮겨갈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훈련이 필요했습니다. 변화된 모세가 애굽으로 내려갔을 때 그는 더 이상 자신의 힘으로 무언가를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제는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만 가능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이 깨우쳐 주시고자 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이 몰아치더라도 속지 마십시오. 그럴 때 사탄은 하나님이 나를 거절하는 증거라고 속삭일 것입니다. 절대로 그것을 믿지 마십시오. 빈틈을 보여서는 안 됩니다. 사탄의 거짓말은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어떤 사업가가 이런 깨어짐의 과정을 격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고집을 꺽지 않고 있었는데 그의 포기는 시간문제처럼 보였습니다.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게 되면 우리는 그야말로 어쩔 수 없이 포기합니다. 그 포기야말로 주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직면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천하 만물을 다스리는 하나님이요 개인적인 삶에서 세밀한 부분까지 보고 계십니다. 정말 힘들 때는 성경을 믿기가 어렵습니다. 말씀대로 살아야 할 순간이 올 때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으십시오. 그분은 만물을 다스리시고 당신을 개인적으로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최선의 것을 주고 싶어 하십니다. 하나님은 여러분들로부터 영광 받으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실 수 있도록 당신 스스로 붙들고 있는 삶의 모든 짐을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그 모든 수고를 주님께 맡기십시오.

 

3. 깨어진 삶을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은혜의 삶을 누리면 산다는 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은혜의 삶은 예수님이 우리 삶 가운데 임재하시도록 초청하는 것입니다. 그분의 생명이 나를 통해 나타나시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산다는 것은 도덕적인 삶을 초월해서 사는 것을 말합니다. 구원 받지 못한 사람도 도덕적인 삶을 추구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불신자보다 훨씬 더 많은 능력 즉 기적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방해하는 것이 육인데 육은 자족함을 원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삶에 역사하셔서 우리가 자족하는 자족함을 포기하는 자리로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충만한 삶을 경험하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부분입니다.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자리에 가 본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을 친밀하게 아는 자리에 나가 본적이 있습니까? 날마다 주님과의 친밀한 관계 안에서 머물렀던 적이 있습니까? 예수님이 당신을 통해 살아가는 삶을 경험해 본적이 있습니까? 많은 사람이 은혜의 삶을 잘 모르고 율법적인 삶을 삽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뜻인 은혜로 흘러 넘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에 그분 자신을 채우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살길을 원하십니다. 이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노력하고자 하는 행위를 그치고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주님! 나는 나 자신을 비우기를 원합니다. 그 자리를 주님으로 채우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그리고 나를 통해 주님이 사시시오. 이것이 성경의 가장 핵심적인 말씀입시다. 예수님이 여러분을 통해 사실 수 있도록 결단하시지 않겠습니까? 그분이 허락하시는 은혜의 삶을 선택하시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