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롬 14:17
명제: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제목: 의와 평강과 희락
1. 갈등
하나님 나라에 관한 오해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순전히 외형적으로, 사회적이거나 정치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종교나 종교생활과 혼동합니다. 여러분은 종교인이면서도 그리스도인이 아닐 수 있으며,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 아닐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롬 14:17절에서“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지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는 구절에서 하고자 하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도대체 왜 이렇게 말한 것일까요? 문맥이 아주 중요합니다. 바울은 혼란에 빠진 로마 교회의 구성원들에게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다음과 같은 것을 두고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무슨 요일을 주일로 지켜야 하는가? 한 주의 첫날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마지막 날이어야 하는가? 토요일과 일요일 중 어느 날에 안식해야 하는가? 양쪽 모두 자신이 옳다고 확신했습니다. 결국 교회 전체가 분열되었습니다. 또 다른 문제가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에는 이방 신전들이 있었습니다.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은 회심하기 전에 이 신전들에서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들은 이방 신전에서 이방 신들에게 바쳐진 고기를 먹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인이 되었으므로 어떤 사람들은 그 고기를 먹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고, 어떤 사람들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도 논쟁하고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사실상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의 문제라고 생각합니까? 그것이 기독교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늘에서 이 땅에 내려와 살고 죽고 부활하신 것은 단순히 이런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는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 입니다." 주님을 반대했던 유대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이들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이들은 종교를 주님의 메시지보다 우선시했고 주님이 틀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유대교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종교는 기독교의 가장 큰 적일 수 있습니다. 기독교는 단지 예배 자리에 참석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주일 아침에 예배 자리에 나와서 "나는 신앙인이다!"라고!" 말합니다. 이들은 주일 아침에 교회에 가는 것이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종교일 뿐이지 기독교가 아닙니다. 또한 어떤 이들은 성찬식 집례자가 어떤 옷을 입어야 하며, 포도주는 발효된 것과 발효되지 않은 것 가운데 어느 것을 사용해야 하는가를 두고도 논쟁합니다. 이런 특정한 의식과 양식이 아주 중요해지면 결국 이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나눠지고 분열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를 "먹는 것과 마시는 것”으로 바꾸는 짓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어느 날 오후 우물가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의 문제였습니다. 그 여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요 4:20절“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여인은 어디서 어떻게 예배해야 하는지를 놓고 논쟁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닙니다.
2. 갈등 심화
또 어떤 이들은 기독교를 일종의 도덕으로 혼동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독교를 마치 금지와 규제를 합쳐 놓은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이 아주 많습니다. 로마 교회에 바로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먹지 마시오. 저것도 먹지 마시오. 이런저런 것을 지키시오." 사람들은 금지와 규제에 대해 전문가였으며 그런 것을 꼼꼼하게 따졌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와 정반대입니다. 기독교가 도덕과 혼동됩니다. 그것은 단지 윤리와 도덕에 지나지 않습니다. 부정적이며 차갑고 비참한 종교, 항상 모든 것을 금지하고 결코 그 무엇도 주지 않는 종교일 뿐입니다. 주일을 즐거움이나 기쁨이 없는 날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들에 따르면, 기독교는 사람들을 비참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항상 실패자라고 느끼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나아지려고 노력하지만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가련한 마르틴 루터가 힘겹게 씨름했던 문제였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선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그는 지옥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혼자 힘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수도원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희망이 없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부정하면서 똑같이 해보았으나 아무런 기쁨도, 아무런 자유도, 아무런 평안도, 아무런 행복도 얻지 못했습니다. 노력하고 땀 흘렸지만 모든 것이 헛수고였습니다.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일 뿐이었습니다. 이들은 서로를 괴롭히고, 논쟁하고, 비교하고, 비판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 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전환
하나님 나라는 어떤 것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라고 말하는 모든 것에 항상 첫 번째 기준을 적용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크고 심오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외형이나 의식이나, 예식과 관련된 작고 고상한 것 정도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 righteousness라는 큰 물음에서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히 의로우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의롭고 공정하시며, 선하고 참되십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좋습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싶은 것은 따로 있습니다. 당신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입니까?"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가 바로 의입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 무엇을 하라고 교육받았느냐 하는 것만이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서는가라는 질문과 맞닺드린 적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우리가 이것과 저것을 하면 전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이들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전혀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의는 우리로 하여금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생각하게 합니다. 의는 우리의 행동이나 사상이나 예배나 의식이나 그 외 잡다한 것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의는 이렇게 말합니다. 욥 9:2절”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하나님이 우리를 거룩하고 의로운 방법으로 심판하시리라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이제 세상은 의로 심판받을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형상으로 우리를 지으셨고 우리에게 그분의 거룩한 율법과 길을 따라 살기에 충분한 재능과 능력과 기질을 주셨으므로 우리가 그렇게 살기를 기대하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으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에 순종하는 삶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에 빛 가운데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이것은 의의 삶입니다. 모든 사람이 이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과연 이런 삶을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은 이것을 바리새인들에게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눅 16:15절“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을 매우 선한 사람들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이들은 매주 금식했고, 자기 소유의 십 분의 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했습니다. 이들은 신앙이 독실해 보였습니다. 이들은 시장에 서서 자신들의 놀라운 선행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주님의 평가를 다시 한번 보십시오.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결론은 이렇습니다. 이것은 의의 문제입니다. 나는 하나님 앞에 서야 합니다. 그런데 내가 한 일을 보십시오. 내가 범한 죄와 악은 어떻게 됩니까? 나는 무언가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습니다. 인간은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의 마음이, 인간의 지성이, 인간의 영혼이 완전하게 창조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의 행동도 완전해야 합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것을 최고의 우선순위로 삼으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의에 관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이것을 깨닫는 순간 교회 출석을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창녀들과 술주정꾼들보다 얼마나 더 나은지 말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중요합니까? 교만하고 자고했던 다소의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자신이 율법에 대해 의로우며 하나님의 계명을 어느 누구보다도 잘 지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정으로 의를 깨달았을 때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하면서,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빌 3:9절“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일단 의를 하나님이 규정하신 대로 이해하면, 우리의 모든 선은 하찮은 것이 됩니다. 배설물과 쓰레기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고후 5:21“5:21 “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정벌을 대신 받고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그분을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그분에게 돌려졌고 우리에게서 제거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값없이 용서받았습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죄의 권세, 곧 악한자의 본성입니다. 나는 새로운 피조물이 되고 싶고, 죄악된 생각과 삶과 욕망을 버리고 싶습니다. 내가 하나님과 영원히 살 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을 깨끗하고 정결하게 해야 하며 의로운 본성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나 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그리스도께 돌리실 때,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돌리십니다. 너무나 놀랍지 않습니까?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의 것입니다. 그분은 새로운 분이며 나는 그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분 안에서 그분의 의를 입은 나를 보십니다. 예수여, 당신의 의와 피,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여러분과 저의 작은 선이 아닙니다. 기독교는 제가 무엇을 행하느냐와 행하지 않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을 잊고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분을 믿으면, 그분의 의가 여러분에게 주어지고 여러분은 그분의 의를 입게 될 것입니다. 기독교는 “평강” 입니다. “의와 평강”입니다. 의에는 필연적으로 평강이 따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람들이 자신의 영혼을 염려할 때, 어떻게 그들에게 평강(평안)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죽음 뒤에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죽음을 두려워할 때, 어떻게 그들에게 평강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된 진리를 믿고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이어 로 믿는 순간, 곧 모든 것이 바뀝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이롭게 되으므로 하나님과 화목(평화)하게 됩니다.” 루터는 우리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는 완벽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그에게는 노력, 고뇌, 불안, 고통 등 모두가 헛수고뿐이었습니다! 그때 루터는 갑자기 깨달았습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순간, 그의 영혼에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그가 결코 할 수 없는 것을 그리스도께서 이미 그를 위해 해 놓으셨습니다.. 이것을 깨달았을 때, 그의 영혼에 평안이 넘쳤습니다. 내가 이것을 깨닫는 순간, 나는 하나님과 화목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체험을 토대로 이것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당신 안에서 쉼을 얻기까지 우리 마음은 쉴 수 없나이다.” 안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십시오. 하나님과 화목하고, 내면의 평안을 누리십시오. 이웃과도 화목하십시오. 그들도 우리와 똑같으며, 우리와 똑같은 것이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더 이상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나 이웃이나 모두 정죄받고 잃어버린 자들이라면, 우리가 이웃보다 낫다고 말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그들과 화목하십시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평강을 찾으셨습니까?
4. 대단원
하나님 나라는 어떤 곳입니까? “성령 안에 있는 ……… 히락이라.” 여러분을 행복하게 하지 못하는 기독교는 기독교라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신약성경이 굳게 믿는 하나님 나라는 기쁨으로 넘칩니다. 오순절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들이 얼마나 행복했던지 사람들은 그들이 술에 취한 줄 알았습니다! 왜 그렇게 말했습니까? 그들은 고무되어있었고 의기양양했으며 승리의 확신에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권합니다. 빌 4:4“4:4 “ 주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여러분이 기뻐하지 않는다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이 기쁨은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닙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한결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주는 기쁨은 왔다가 사라지며, 내 마음이 변하면 따라 변합니다. 전쟁의 위협이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세상이 주는 기쁨은 사라지고 공포에 휩싸입니다. 성령의 기쁨은 자기 죄가 용서되었음을 아는 사람들의 기쁨입니다. 여러분이 자신의 죄가 용서되었음을 안다면 매우 행복한 사람이 분명합니다. 반대로, 행복하지 않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그 기쁨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아직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되려고 애쓰고 있다면, 여러분은 아직 성령의 기쁨을 갖지 못한 것이며 영원히 갖지 못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절대로 행복해지지 않습니다! 거기서 행복을 찾으려 한다면 가장 깊은 절망에 빠질 것입니다. 수도원 운동은 절망을 안겨 줍니다. 유대교도 마찬가지입니다. 거짓 기독교는 절망을 안겨 줍니다. 거짓 기독교는 사람들을 비참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아는 것이라고는 이런저런 것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이들은 이런저런 것을 행하지 않으려 애쓰며 더 나아지려고 애쓰지만 결국 비참해집니다. 항상 자신과 자신의 어린 영혼과 자신의 죄를 걱정합니다. 비참함과 가련함은 하나님 나라와는 정반대입니다. 그러나 단지 나의 죄가 용서된 것만이 아닙니다. 나는 내가 새로운 관계에 들어가 있음을 압니다. 나는 용서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그분의 가족으로 입양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이 사실에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면 기독교를 전혀 모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음을 정말로 믿는다면 그 사실을 온 세상에 알리고 기쁨이 충만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며 여러분 속에 하나님의 성령이 계십니다. 이것이 “성령 안에 있는…… 희락"입니다. 그분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히 13:5절“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그분은 정말로 우리를 버리지 않고 떠나지 않으십니다. 그분의 백성이, 그분의 성도들과 순교자들과 고백자들이 교수대에서도 찬송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너무나 놀라운 것은 기독교가 골 1:27절"영광의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빌 1:21절“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이 기쁨은 꺼질 수 없고, 사라질 수 없으며, 빼앗길 수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어떻게 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여러분을 죽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여러분을 사랑하신 분, 이제 여러분이 사랑하는 영광스러운 분 앞으로 즉시 옮기고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성령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이것만이 기독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