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 마 6:1-4
2. 명제: 바른 동기를 가지고 구제를 행할 때에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다.
3. 제목: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예수님 그리스도기 오시기 이전에는 병자나 가난한 자 고아를 위한 집이 없었습니다. 그 시대는 노역과 가난 사생아 노예 극심한 부의 편재 그리고 철저한 무관심의 시대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후로 신자들은 서로를 사랑으로 희생했습니다. 성도들 간의 사랑이 가난한자를 돌보는 것 병원 여성의 지위향상 노동법의 개정 노예제도 폐지 등으로 이어졌습니다. 초대 교회의 이와 같은 모습이 고대 세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AD 125년 아테네 철학자 아리스테테스는 하드리안 황제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들은 간음이나 음란함을 범하지 않으며 거짓된 증언을 하지 않으며 청탁을 거부하며 자기 소유가 아닌 것을 탐내지 않습니다. 그들은 부모를 공경하며 이웃에게 선을 행합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며 과부에게 등을 돌리지 않으며 불쌍한 고아를 구하며 그들에게 도울 만한 풍부한 재물이 없으면 2-3일간 금식하면서까지 가나한 자를 도왔습니다.” 이런 문서들을 통해서 초대 교인들의 구제 활동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크게 충격을 주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구제는 기독교와 더불어 이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구제를 바른 동기를 가지고 행할 때에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바른 동기를 가지고 구제를 행하도록 돕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바른 동기를 가지고 구제를 행할 때에 하나님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을 받기위한 구제 생활의 바른 동기는 무엇일까요?
1. 구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생활임을 알아야 합니다.
1절“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1절에서는 구제라는 말 대신 의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는 의로운 생활 3가지가 나옵니다. 구제, 기도, 금욕이 그것입니다. 구제, 기도, 금식은 모든 종교에서 중요하게 생각하는 종교 행위들입니다. 랍비의 교훈에 의하면 “ 구제하는 자가 제사 즉 예배드리는 자보다 더 위대하다 ”라는 교훈이 있다고 합니다. 구제를 그 만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단지 형식적인 의무 행위로써 행하는 종교적인 행위들은 하나님 보시기에 가치가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어려운 사람을 돕는 구제를 귀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잠 14:21“ 그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 ” 잠 29:7“ 의인은 가난한 자의 사정을 알아주나 악인은 알아줄 지식이 없느니라 ” 천국 백성이 자기 가족을 부양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태도는 합당하지 않은 태도입니다. 가난한 사람에게 베풀지 않는 것은 큰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청지기로 맡기신 것을 주지 않음으로서 궁핍한 사람들의 몫을 빼앗는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구제를 의라고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중요하게 여기시는 명령임을 가르치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은 의로운 행동일 뿐만 아니라 자비로운 행동인 것입니다. 구제는 헬라어로 동정심을 품는 것 혹은 자비롭다는 어원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구제란 단순히 물품이나 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주는 사람의 자비롭고 동정에 찬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구제는 의로운 행동입니다. 참된 구제는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복종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 사도를 도운 것은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재정정적으로 궁핍하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헌금을 해서 보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바울을 끝까지 도왔습니다. 로마에서 감옥에 있을 때도 도왔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루살렘 교우들의 어려운 형편을 호소했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빌립보 교인들은 경쟁적으로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고린도 교인들에게 알립니다. 자기 밖에 모르던 사람들이 전혀 모르는 사람들에게 마음과 물질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 우리의 바라던 것뿐만 아니라 그들이 먼저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 그들은 먼저 주 예수의 사랑을 만났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자신을 드렸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에게도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구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생활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상을 받기 위한 구제 생활의 바른 동기는 무엇일까요?
2. 사람 앞에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1-2절“ 1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그렇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느니라 2 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저희는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나쁜 동기로 구제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좋은 동기로 시작했다가 동기가 변절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선행 후에 불평이 있으면 이것이 바로 동기가 변절 된 경우입니다.. 동기가 좋지 않거나 중간에 변절되면 피곤이 찾아옵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의를 행치 않도록 주의하라. 왜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제를 잘못하는 것은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것은 자신을 기쁘게 하려는 의도가 있습니다. 인간은 본능 상 하나님의 칭찬보다 사람의 칭찬에 더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고 있거나 아니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있거나 둘 중의 하나라는 것입니다. 여기 주의하라는 말씀은 교만을 조심하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천국 백성에게 은밀한 교만을 품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교만이란 자기 자신을 높이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바리새인이 범한 죄입니다. 라오디 기아 교인들이 범한 죄입니다. 천사가 타락하여 마귀가 되도록 만든 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어떻게 우리의 교만을 경계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엄격한 자기반성을 통해 경계해야 합니다. 둘째는 진지하게 양심의 가책을 살핌으로써 교만의 죄를 경계할 수 있습니다. 교만의 죄를 늘 회개하는 것이 요구됩니다. 셋째는 이 죄를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교만의 죄를 범치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헤롯은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을 자기가 차지함으로써 벌레에게 먹힌 바 되었습니다. 벧전 5: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넷째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신 것을 묵상함으로써 교만한 죄를 경계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내 죄 때문에 죽었다는 것을 자각할 때 겸손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동기 즉 마음의 숨겨진 생각에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5장에서 살인과 간음도 마음으로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부당한 분노는 마음의 살인입니다. 구제의 문제도 은밀한 생각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에 대한 갈망은 바리새인들에게 끊임없이 나타나는 죄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구제를 공개적으로 하는 것을 비웃었습니다. 성전에서 헌금하다가 가난한 자들에게 구제하다가 거드름 피우는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앞에는 팡파르를 울리며 군중들의 주의를 끄는 나팔수들이 행진을 합니다. 칼빈은 ” 틀림없이 그들은 그것이 가난한자를 부르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 그러나 그들이 칭찬과 갈채를 갈구하고 있었다는 것은 매우 명백했다 “ 스펄전은 ” 한 손에 동정을 들고 다른 손에 나팔을 들고 서 있는 것은 외식이다 “외식의 헬라어 후포크리테스은 배우라는 뜻입니다. 배우는 자신의 참된 정체를 버리고 거짓 정체로 가장 합니다. 그는 더 이상 자신이 아니며 변장하여 다른 사람인척 합니다. 그는 가면을 쓰고 있습니다. 신앙적인 외식의 문제는 고의적으로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것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가장 독선적이고 교만한 사람으로 구제를 함으로 자신들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헌신적인 사람이라고 자랑했습니다. 경건한 모양 되에 이기적인 욕심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들은 구경꾼이 많이 모인 곳에서 구제를 행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강도 만난 강도 비유에서 강도 만나 사람이 길거리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대제사장과 레위인은 그냥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면 그냥 지나갔을까요? 아마 사람이 많았다면 보란 듯이 간호하고 보살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제사장과 레위 인을 외식 자라고 지적한 이유를 알 것 같지 않습니까? 외식자란 위선자라는 뜻입니다. 사람을 기쁘게 하려는 구제는 이미 사람의 상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상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상을 받기위한 구제 생활의 바른 동기는 무엇일까요?
3. 오른 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해야 합니다.
3절 “ 너는 구제할 때 오른손이 한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아버지가 갚아 시리아 ”구제의 올바른 방법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 앞에 자신의 나팔을 불지 말고 세상에 공포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덧붙여 오른손이 한 것을 외손도 모르게 하라. 즉 은밀한 중에 자신의 행위를 장부에 기록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너희는 하나님께 감동을 받고 성령의 인도를 받아 어떤 일을 했다면 그것을 모두 잊어버리라는 것입니다. 마 25장에서 ” 내가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내가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그들이 대답합니다. ” 우리가 어느 때에 이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 일은 다 기록되어있다 “고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장부를 가지고 계십니다. 주님은 ” 너는 이것을 모두 은밀하게 행하였으나 나는 너를 사람 앞에 다 보상하겠다. 내가 이 세상에서 너를 공중 앞에서 보상하겠다. 그 때는 모든 사람의 비밀이 다 드러나겠고 큰 책이 펼쳐질 것이며 온 세상 앞에 최후 선언이 있을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행한 모든 일을 선포되고 공포될 것이다. 나는 명예와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될 것이다. 그리도 나는 너희에 말한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 할지어다 ”라고 말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눈을 들어 이 궁극적인 소망을 바라보십시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행동을 보시며 우리의 온갖 생각을 보십니다. 시편 기자는 “ 주께서 나를 감찰 하나이다 ” 하나님은 모든 것을 보시고 모든 생각을 아십니다. 아침에 일어 날 때 즉각 나는 하나님 앞에 있음을 상기해야 합니다. “ 오늘 내가 행하려고 하는 모든 것을 하나님이 아신다. ”이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변화될 것입니다. 시편 기자는 “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내가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 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기억한다면 우리의 위선과 아첨은 사라질 것이며 우리가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다는 죄도 사라질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을 다 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십니다. 하나님 앞에 숨길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칙으로 삼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원칙을 실천하다면 부흥의 역사는 일어날 것입니다. 우리의 변명, 허풍, 합리화를 생각해 보십시오. 모든 문제 해결의 열쇠는 하나님 앞에 우리가 있다. 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람은 곧장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와 그의 용서를 구하며 은혜를 구하면 도움을 얻기 위해 성령을 충만히 구할 것입니다. 구제할 때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자기 칭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정입니다. 옛날 중국에 파송된 한 미국 선교사가 홍수를 만나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중국 사람이 선교사를 구출해 주었습니다. 선교사는 너무 고마워서 이름을 알려주면 평생 동안 기억하면서 살겠다고 했습니다. 그 중국 사람이 “ 성경에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름이 나옵니까? ”하며 그냥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은밀한 중에 이루어져야 하나님이 기억하십니다. 만일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신다면 “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희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보상에 대해 못마당 하게 생각합니다. 상 받기 위해 봉사하나 라고 시꺼둥합니다. 그러나 신약 성경은 상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 심령이 청결한 자는 목이 있나니 너희가 하나님을 볼 것이요 ” 히 12:2에서 바울은 예수님도 ”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더니 “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심판에 대해서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적게 매 맞는 사람도 있고 많이 맞을 사람도 있다. 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의 행함이 나무인지 풀인지 또는 은인지 금인지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러므로 우리는 보상과 심판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전혀 보상을 바라지 않는 자에게 보상이 있다. 고 말씀하십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행한 구제만 선행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구제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보상을 원하는 선행은 율법적 관계로 들어갑니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동기에서의 선행은 은혜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똑 같은 선행으로 보이지만 율법적 관계와 은혜적 관계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은혜적인 관계에서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 감사 할 뿐입니다. 주고도 모자라고 희생하고도 부족한 것뿐입니다. 바울 사도는 종일 죽임을 당하더라도 갚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고통을 당하더러도 내가 받은 바 은혜를 갚을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봉사하면서 우리가 불평과 불만이 있는 것은 그것은 율법적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적 관계에서는 내가 이렇게 수고 했는데 누가 좀 알아주지 않나 또는 내가 남보다 수고를 했는데 왜 저 사람에게만 상을 주나 하는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사랑만이 동기여야 합니다. 그러나 가다가 변절 되어 원망으로 끝나기도 합니다. 신령한 사랑의 동기에서 나온 구제는 하늘로부터의 보상이 있는 것입니다. 어떤 보상입니까? 첫째 만족의 보상입니다.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마음에는 만족이 있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떠난 수고에는 마지막에는 허무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적으로 행할 일에는 항상 만족이 따릅니다. 참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만족이 따르지 않으면 그것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이 만족은 외적인 만족이 아니라 내적인 만족인 것입니다. 둘째는 더 큰 역사를 허락해 주시는 것입니다. 마 25:14에서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에게 돈을 더 맡겼습니다. 그러니까 더 큰 책임을 맡기는 것입니다. 작은 일에 충성했기 때문에 더 큰 것으로 맡기는 것입니다. 열심히 공부한 학생에게는 더 열심히 공부할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충성된 자에게 축복은 더 큰 일을 맡기고 더 많은 일을 맡기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연합하는 하늘나라의 축복을 받습니다. 이것은 최고의 기쁨이요. 최고의 축복입니다. 구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심령이 하나님의 마음을 전달하는 의로운 선행입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구제를 기뻐하시고 상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