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마 5:5
2. 명제: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받는 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3. 제목: 세 번째 복/온유한 자가 받는 복
일상생활 가운데서도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길 것 같지만 결국 패자가 되는 수가 많습니다. 약육강식에서 강자만이 살아남을 것 같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큰 물고기가 중간 고기를 잡아먹고 중간 고기가 작은 고기를 잡아먹습니다. 그런데 멸종의 위기에 있는 것은 고래와 상어들처럼 큰 고기이지 작은 고기가 아니라고 합니다. 동물의 왕 사자나 호랑이는 점점 줄어가고 있지만 토끼 같은 작은 동물의 개체 수는 증가한다고 합니다. 자연 세계에서도 꼭 강자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닌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자신을 표현하며 자신의 세력과 능력을 나타내면 나타낼수록 성공한다고 말합니다. 세상은 복을 힘과 능력과 공격성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합니다. 그들이 땅을 차지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 번째 복은 온유 한자가 땅을 기업으로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한 번 팔복은 세상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질의 차이 본질의 차이입니다. 이 예수님의 말씀은 당시 유대인들이게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구하는 복은 물질적일 뿐만 아니라 군사적 천국 관을 가지고 있었고 메시아는 그들을 전쟁의 승리로 이끌어 줄 분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생각을 물리쳤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와 같지 않다. 온유한 자가 땅을 물러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세상과 죄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를 위해 싸우는 거대한 조직을 만들자는 오늘날의 교회의 사고방식과도 반대입니다. 거대한 교회 건물을 지어서 세상에 보여 주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논리와도 정 반대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온유 한자를 승리자로 만드십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온유한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를 소개하여 최종 승리의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해서 이 말씀을 전하려고 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은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1. 온유한 사람은 유약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온유한 사람은 기운 없는 태도로 말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약함이나 무력함이나 비겁함을 의미하는 것도 아닙니다. 온유한 자는 태만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무기력을 말하지 않습니다. 온유는 친절하거나 부드러운 면은 분명히 있지만 그러나 친절한 것이나 부드러운 것이 성경이 말하는 온유는 아닙니다. 천성적으로 온순하게 보이는 사람이 성질내면 더 무섭습니다. 온유는 싹싹하거나 부드러운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대게 제비들이 싹싹하고 부드럽습니다. 제비들은 온유한 자가 아니라 사기꾼들입니다. 자 모두 부드럽게 즐겁게 행복하게 해 봅시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수가 많습니다. 마는 이런 사람이 성경이 말씀하는 온유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유약한 사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은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2. 하나님께 내려놓고 사람에게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온유를 뜻하는 헬라어 ‘프라에이스’‘프라에이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 앞에 전적으로 내려놓는” 즉 하나님의 뜻에 길들여진 것을 의미하는 것과 “항상 화평함과 화평하게함”을 가리킵니다. 칼빈은 “온유한 자는 부드러운 태도로 살며 모해에 쉽사리 노하지 아니하며 보복하고자 하지 않으며 자기에 대한 악의를 길이 참는 자다”라고 정의했습니다. 빈센트는 “온유한 자는 하나님께 절대 순종하고 사람에 대해서는 선의를 베푸는 사람이다” 바클레이는 “분노할 때 분노하며 분노해서는 안 될 때 결단코 분노하지 않는 자다”라고 해석했습니다. 당시 헬라어에는 주인의 통제를 잘 받을 줄 아는 훈련된 동물을 온유하다고 표현했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 앞에서 복종하고 신뢰하는 태도를 온유한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시편 37편에서 온유한 자를 인용하셨습니다. 시 37편에서 온유한 자는 누구입니까?? 여호와를 의뢰하며 여호와 안에서 기뻐하며 여호와께 길을 의탁하며 여호와 안에서 안식을 누리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으로 모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물 같은 우유 같은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올바른 때에 올바른 분노를 했습니다. 모세의 누이 미리암이 모세를 원망하기를 “ 여호와께서 모세에게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하셨느냐 ”라며 교만을 품고 모세를 비방하기 시작합니다. 그때 이스라엘의 지도자 모세는 부인인 삽 보라가 죽자 구스인 여자와 재혼을 했습니다. 그녀는 오늘날 이디오피아 출신인 흑인이었습니다. 그러자 모세의 형 아론과 누이 미리암이 반기를 들었습니다. 이들은 모세의 아내의 인종적인 특성과 피부 빛깔이 자신들과 다르다는 것을 이유로 모세를 비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미리암에게 “ 네 피부 색깔은 갈색이다. 이 소녀는 검은색이다. 그런데 네가 더 하얗다고 생각하는구나 그러면 지금보다 더 하얀 피부를 한번 가져 보라 ”미리암이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 안에 인종적인 차별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이 때 모세는 미리암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리자 하나님은 모세의 기도를 들으시고 미리암을 고쳐 주셨습니다. 모세는 자기를 비방하는 사람들에게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또 자신을 변호하지도 않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 하나님의 변호를 받았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종교 개혁자 존 칼빈도 참으로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젊었을 때 스트라스버그에 공부하러 가는 길에 스위스 제네바에 잠깐 들렀습니다. 그 때 제네바에 있던 월리암 파렐과 교인들이 그에게 함께 일하자고 간청을 했습니다. 칼빈은 자기는 스트라스버그에 가서 공부해야 한다고 거절을 했지만 교인들은 그가 꼭 필요하다고 강권했습니다. 칼빈은 여기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자기 뜻을 굽히며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열심히 일하고 양심으로 설교를 3년이나 했습니다. 그런데 3년 후에 제네바 의회는 칼빈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는 여기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으리라 믿고 아무 말없이 물러갔습니다. 3년 후에 제네바에서 칼빈이 꼭 필요하다며 간청하며 또 초청을 했습니다. 칼빈은 이번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고 인간적인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수락을 하고 남은 인생을 스위스 제네바에서 목회를 했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물론 최고로 온유하신 분은 주님이십니다. “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자 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라고 성경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욕하고 비난하고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하셨습니까?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하나님 자신이었지만 동등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특권을 주장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스스로 하나님 아버지 앞에 겸손한 종같이 되셨습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위대한 능력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의 수호자였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진리를 굳게 믿기 때문에 진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사람이었습니다. 순교자들은 온유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결단코 약하지 않았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입을 통제하며 말하고 싶은 것을 말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온유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에 대한 태도와 행동에서 표현되는 자기에 대한 올바른 표현입니다. 예를 들어 참회의 기도 시간에 하나님! 불쌍한 이 죄인 이라고 자신을 부르는 것은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배를 끝내고 다른 사람이 나를 보고 불쌍한 죄인이라고 부른다고 가정한다면 여러분의 기분은 어떨까요? 아마 그 사람의 코를 한번 쥐어박고 싶을지도 모릅니다. 다시 말해 나는 방금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떤 사람이라고 인정한 것을 다른 사람이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으로는 받아들일 준비는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본적인 위선이 있습니다. 온유한 사람에게는 위선이 없습니다. 온유가 어떻게 가난한 심령과 애통에 뒤이어 나오지 않을 수 없는가를 보십시오. 사람의 심령이 가난하지 않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 없습니다. 자기가 악한 죄인임을 보지 않고서는 결코 온유할 수 없습니다. 나의 죄 성 때문에 가난한 심령과 애통을 통하여 자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갖게 될 때에만 교만은 없어질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겸손한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에게는 어떤 의미에서 자랑할 만한 것이 없다고 느낍니다. 동시에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자기를 표현하라 자기를 주장하라고 하지만 온유한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를 위해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지 않습니다. 자기의 신분이나 특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를 올바로 볼 때에만 다른 사람이 자기를 아무리 나쁘게 말해도 그것을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을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하든 그것에 대해서 오히려 고맙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기변명이 없습니다. 이것이 온유의 본질입니다. 온유는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행동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항상 배울 자세를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자신과 자신의 능력을 아무 것도 아님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성령의 인도를 사모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항상 배울 준비 자세를 갖추고 있는 것입니다. 온유는 겸손의 영입니다. 비록 어린 아이에게도 혹시 주님의 가르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면서 귀를 기울이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맡기는 것입니다. 부당하게 고통을 당할 때 특히 그러합니다. 바울 사도는 “ 원수 갚는 것이 내가 보상하겠다고 주께서 말씀하신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원수 갚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손에 맡기면 되는 것입니다. 주께서 원수를 갚아 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자는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땅을 기업으로 받은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3. 최종 승리자입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상속받으리라는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요? 롯 또 복권 125 억 원 일등에 당첨된다는 뜻일까요? 롯 또 복권 당첨하고 나서 대게가 불행해지는 사람이 많다고 합니다. 땅을 기업으로 얻는다는 말은 그 땅에 대한 권리를 즐길 줄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단칸방에 살아도 즐거움으로 사는 자는 그 집을 다스리고 있는 사람입니다. 대궐 같은 집에 살아도 늘 불평하는 사람은 그 집을 소유하고 있으나 진정 자기 집이 아닙니다. 그 집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만이 즐거움으로 다스릴 수 있는 것입니다. 늘 남편과 자식에게 불평을 늘어놓으며 함께 살아도 내 남편 내 자식이 아닌 것입니다. 자족하는 마음은 온유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특권인 것입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받은 가장 큰 축복은 만물을 다스리는 축복이었습니다. 하지만 죄를 지음으로 그 축복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빼앗긴 그 축복을 다시 회복시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를 믿어 예수님의 성품인 온유한 자가 되면 다시 소유권을 회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고전 3:23“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고 ” 고후 6:10“ 우리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지만 모든 것을 가진 자 ”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요. 하나님의 것은 나의 것입니다. 천지만물이 하나님의 손에 있고 동시에 나의 손에 있는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이미 이생에서 땅을 얻었습니다. 참으로 온유한 사람은 항상 만족을 얻는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 같으나 모든 것을 소유한자 ”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 나는 비천하게 살 줄도 알고 부유하게 살 줄도 압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안에서 나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족하는 마음이 땅을 기업으로 얻은 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온유하면 모든 것은 이미 우리의 것입니다. 이미 땅을 얻었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족하는 사람이며 따라서 부족함이 없는 인생을 가리킵니다. 온유한 사람을 자기를 통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바울 사도가 그런 사람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승리자입니다. 이 사람이 땅을 기업으로 얻은 복된 사람인 것입니다. 동시에 이 약속은 미래적인 것입니다. 고전 6장에서 바울은 ” 성도가 세상을 심판하시리라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라고 말씀합니다. 성도들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천사들도 심판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성도들은 땅을 얻게 될 것입니다. 롬 8장에 바울 사도는 성도를 ” 하나님의 자녀이며 상속자라 “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것이 땅을 소유하게 될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할 사람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 우리가 고난을 받으면 또 그와 함께 왕 노릇하게 될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디모데야 고난당함을 염려하지 말라 너는 온유하며 고난을 받으라 그러면 그와 함께 왕 노릇 하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상속자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기 때문입니다. 현세에서는 슬픔도 있습니다. 가난도 고난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그와 함께 통치할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최후 승리자입니다. 나는 온유할 수 없습니다.라고. 절규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아무리 노력해도 사람의 힘으로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온유한 사람은 천성적인 성품이 아닙니다.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한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들을 온유한 자로 만들어 주시기 위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참 기독교인은 이미 성령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온유하지 못함에 대한 어떤 변명도 할 수 없습니다. 불신자의 특징은 자기변명입니다. 온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참 그리스도인은 결코 변명할 수 없습니다. 성령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만드는 성품이 온유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온유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참 온유하신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분 앞에 나 자신을 바로 보십시오. 내 심령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가난한 심령이 되도록 하시시오. 그리고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나의 죄 때문에 애통하십시오. 나 자신을 하나님 앞에 바로 보는 것만큼 온유한 사람으로 성령님께서 만드십니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요. 그래서 세상을 다스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을 최후 승리자로 만드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