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마 5:1-9
2. 명제: 화평께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다.
3. 제목: 일곱 번째의 축복/화평께 하는 자의 복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 제자들은 자신들도 박해받지 않을까 두려워하여 뿔뿔이 흩어졌다가 은밀히 다시 모였습니다. 문을 굳게 닫고 은신하고 있었던 제자들 사이에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습니다. 좌절과 갈등과 패배의식이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때 갑자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일성이 요 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었습니다. 샬롬 즉 평화가 당신에게 함께 하시기를 하는 것이 오는 날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그곳 사람들에게서 여전히 들을 수 있는 인사말이라고 합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인생살이가 그렇다고 생각됩니다. 우리는 만날 때마다 안녕하세요. 밤새 안녕 하셨습니까? 라고 인사합니다. 그만큼 우리 역사도 거센 격랑의 시절을 지나왔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두려움과 좌절 속에 주저앉아 있었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의 기대를 뛰어넘어 다시 사셔서 그들 앞에 등장하신 스승께서 외치시는 부활의 메시지는 얼마나 감격과 능력으로 그들에게 다가왔을까요? 사실상 제자들은 그날 참된 의미에서의 평화를 처음으로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평화를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이 제자들에 의해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산상 수훈의 일곱째 복은 “화평께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그렇다면
1. 무엇이?
화평이란 말은 히브리어로 샬롬이라고 합니다. 샬롬이란 말은 ‘갈등이 없다’ ‘싸움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기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정의하기를 “ 이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서 건강함과 온전함의 상태를 뜻한다. ”단순히 말하자면 화평을 하나님의 축복은 온전히 경험하는 삶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레26장을 보면 이 샬롬의 축복을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샬롬의 축복은 땅이 풍성한 열매를 맺는 복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샬롬의 축복은 이 열매를 거두어 드디어 내 삶의 필요가 공급되는 복이라고 말합니다. 또 샬롬은 내 삶의 안전이 보장되는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 샤롬의 축복은 애급 땅에서 구출받고 자유를 얻어 나온 그 백성들이 이제는 곧고 올바른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백성다운 바른 삶을 사는 축복을 받는다. 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은 이런 삶에서 드러나는 온전한 평화에 대해 말씀합니다. 이 평화는 메시아가 가져다줄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렸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아에 대해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사 9:6 “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드디어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그날 천사들은 예수님 탄생의 기쁜 소식을 이렇게 전합니다. 눅 2: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평강의 왕으로 오신 것입니다. 세상에는 전쟁이 계속될 것입니다. 시련과 갈등은 계속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은 이 메시아 때문에 평강을 체험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역사의 흑암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평강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이 평강은 메시아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존재 양식 혹은 그리스도 자신의 삶의 양식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바울 사도는 “ 그리스도는 우리의 화평이시다 ””라고 말합니다. 화평이란 무엇일까요? 이것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 주님의 삶의 양식. 바로 주님 자체이신 평안. 이 평안이 바로 주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평안인 것입니다.
2. 왜 화평이 필요할까요?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약속이 무엇입니까? 히 13:20“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양의 큰 목자이신 예수님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은 바로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하나님이 평강의 하나님이기 때문에 우리의 삶을 온전케 하기를 소원합니다. 이 온전함의 축복이 평강의 축복인 것입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에게 평강 주시기를 기뻐하십니다. 평강의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평화를 기대합니다. 왜 우리가 평화를 소유하고 평화를 추구해야 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기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참으로 평안을 소유하고 추구할 때 성경은 이렇게 약속합니다. “ 화평께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하나님께서 평화를 소유하고 평안을 추구하는 우리를 가리켜서 진정으로 그분의 자녀 즉 하나님의 자녀라고 인정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는 화평을 추구하는 예수 믿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은 세상 사람들의 기대요 요구입니다. 역사적으로 사람들은 평화를 실세 없이 추구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평화를 소유하지 못하고 계속 평화에 도전과 위협을 받아왔습니다. 우리의 평화가 위협을 받을수록 평화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은 더욱 절실했습니다. 성경은 바로 그러한 염원을 가진 화평케 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는 놀라운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드리는 예배 의식에 별로 큰 감동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의 긴 기도에 깊은 인상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가진 뛰어난 성경 지식에도 감동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가 부른 찬송에도 감동을 받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이 참으로 평화를 추구할 때 그들은 우리를 가리켜서 “ 저들이야말로 진실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라고 평가할 것입니다.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
3. 어떻게 화평께 하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화평의 주님을 영접함으로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왜 사람들
이 화평을 소유하지 못할까요? 왜 사람들이 화평을 경험하지 못할까요? 왜
사람들이 화평 없이 인생을 경영할까요? 성경은 그 깊은 내면의 근본 원인
은 바로 죄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죄가 우리에게 화평을 빼앗아갑니다. 죄
가 나와 이웃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죄가 부부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죄가 친구 관계를 갈라놓습니다. 죄가 우리에게서 평화를 앗아갑니다. 우리에게 평화를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은 그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허물과 죄를 담당하고 돌아가셨습니다. 그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영접하고 그분을 나의 구원의 주님이심을 믿은 그 순간 그 보혈의 거룩한 피는 죄에서 나를 자유케 합니다. 그 순간에 내 마음속에 하늘의 평화가 임하는 것입니다. 지난번에 마음이 청결한 사람의 복에 대해 생각해 보았습니다. “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다음 복이 무엇입니까? “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이 순서를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으면 화평할 수 없습니다. 청결한 마음에만 임할 수 있는 복이 하늘의 평화 곧 주님 자신의 평화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 사함을 받은 청결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어지는 놀라운 평안이 바로 하나님의 평화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화를 소유한 사람이라야만 이웃들에게 평화를 나누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들만이 평화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화평을 추구하는 사람을 살기 원하십니까? 화평의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화평의 복음을 증거 해야 합니다. ‘화평’이란 단어는 오늘날 정치적 술어로 변질되었습니다.. 물론 평화를 만드는 정치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정치만으로 평화가 올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정치에서 평화에 기대를 걸었지만 정치는 번번이 우리를 실망시켰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정치가 우리에게 온전한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복음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줄 수가 있습니다.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에게 진정한 평화를 줄 수가 있습니다. 고후 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인을 믿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선언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만’ 성령으로 새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창조물이 될 것입니다. 거듭나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주어진 중요한 책임 하나가 있습니다. 고후 5:19“ 곧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아니하시고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주님은 하나님과 화목하고 하나님의 평화를 경험한 우리들에게 이 화목의 메시지를 전할 책임을 부탁하셨습니다. 평화를 전하는 그리스도의 사신, 평화의 복음을 전하는 그리고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평화의 사신이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가 가는 곳마다 부딪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전해야 할 메시지는 하나밖에 없습니다. “ 하나님과 화목하십시오. 하나님 앞에 돌아오십시오. ” 그리고 “ 죄용서함을 받으십시오. ” 이것이 우리가 가진 복음의 메시지입니다. 세상은 이 복음을 통해서만 진정한 평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화평을 만드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화평의 복음을 증거 함으로 화평의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셋째로 화평케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삶이 복음을 뒷받침 하지 못한다면 그 화평의 복음은 설득력을 잃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복이 있습니다. 우리는 내가 처한 모든 상황 속에서 평화를 만들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은 적당히 타협하고 절충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결코 바리새인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와 불의의 모든 피해자들을 주께서는 그 가슴에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용서하시고 치유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는 사람마다 평화를 경험했고 주님이 가는 곳마다 평화가 임하셨습니다. 주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평화를 선물해 주셨습니다. 주께서 가는 곳마다 평화가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가 가는 곳에 이 평화가 만들어져가고 있습니까? 우리는 이 평화를 증거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앞에 나오는 모든 사람에게 주께서는 약속하십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 우리가 예수님 앞에 달려 나와 그분을 구주와 주님으로 의지하는 순간 주께서는 우리를 의롭다고 해 주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화목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립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하며 나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내 삶 속에 성령님이 오셔서 새로운 생명과 능력을 주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일어난 가장 놀라운 사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된 것입니다.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라 “ 여기 구원은 구원의 완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덕분에 구원의 기쁨을 누리며 구원의 능력 안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서 나아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롬 5: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시작일 뿐입니다. 이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 나는 주님이 주시는 평안으로 날마다 그분 안에서 즐거워하며 평안을 만드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삶을 주시기 위해서 주께서 무덤을 이기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의 승리인 것입니다. 한 형제 때문에 직장이 완전히 바뀐 일이 있었습니다. 그 직장의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이구동성으로 이 점을 인정합니다.. 그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 도대체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었습니까? “이 형제는 마지못해 주일에 출석하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직장에서 갈등과 반목이 가득 찼습니다. 그는 직장에 나갈 의욕이 없었다고 합니다. ” 내가 계속 이 직장에 나가야 하나 그만둘까? ”직장을 포기할까라는 생각까지 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교회에서 들었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는 내용이었습니다. “ 정말 주님이 살아계시고 나와 함께 하실까? “라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그는 어느 날 직장을 포기하기 전에 이런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 그러면 정말 주님이 살아계시고 주님이 정말 나와 함께하신다고 생각하고 하루만 더 견뎌보자 “ 그래서 딱 하루만 더 견뎌 보자라는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직장에 출근해서 직장 동료들과 말할 때에도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을 의식하면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러게 하니까 그의 말과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동료들이 ‘너 왜 그러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기분 좋게 마쳤습니다. 그래서 그다음 날에도 도움을 청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 주님, 어제는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주님, 오늘도 저를 도와주십시오. 오늘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요? “ 또 주님을 의식하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 어제 보다 좀 더 나아지고 내친김에 애라 삼세번이니까 하루를 더 버티 보자”하고 그 다음날에도 그렇게 살아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날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직장에 와서 “ 주님 나를 지켜 주신 것 감사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순간 울컷 하고 마음이 뜨거워졌습니다. 그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지고 교회 다닌 후 처음으로 정말 살아계신 자기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의 입에서 찬송이 터져 나왔습니다. 자기 생애에 없었던 유쾌한 하루 놀라운 하루가 전개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그런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직장 동료들이 그의 변화를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는 직장 동료들을 주께 섬기듯이 섬기기 시작했고 이 형제를 통해서 직장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직장을 바꾸기 전에 하나님은 먼저 그 형제를 바꾸셨습니다. 무엇이 이런 변화를 만들었을까요? 살아계신 주님이 그 형제의 삶의 장에 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었던 것입니다. 동일한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가는 곳곳마다 화평을 만들어 하나님의 자녀라는 소리를 듣는 복된 여러분의 삶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