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마 19: 27~20:1-16
2. 명제: 은혜 의식이 봉사 정신의 원리이다.
3. 제목: 봉사 정신
1. 갈등, 먼저 온 자들이 와서 더 받을 줄 알았더니 저희도 한 데나리온씩 받은지라.
찜질방을 전전하며 중학생 아들 하나와 사는 한 40대 가장의 고달픈 인생살이를 소개하는 사연을 TV를 통해서 본 적이 있습니다. 사업의 실패로 가정이 풍지 박산이 되었고 이제 일용직 노동자로 전략되어 하루하루를 입에 풀칠하기도 바쁘게 살아가는 고달픈 삶이었습니다. 그분의 관심사는 아침 일찍 사무실에 나가 하루 일감을 얻는 것입니다. 일감이 있는 날에는 기분이 상쾌합니다. 없는 날에는 깊은 한숨만 나옵니다. 내일 먹고 살 길이 막막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렇게 하루하루를 어렵게 사는 이웃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어렵게 사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지주들은 더 많은 일꾼을 필요로 했고 일용직 일꾼들은 품을 쉽게 팔아 생기를 유지했든 것 같습니다. 해가 뜨기 전 아침 6시경에 일꾼들이 시장터로 나갑니다. 지주가 필요한 일꾼을 수시로 뽑아갔습니다. 그 시대는 보통 노동자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습니다. 근무 시간은 아침 6시에서 오후 6시까지였습니다. 아침 9시에도 일감을 구하는 일꾼들이 시장터에 서성거립니다. 아마 손바닥만 한 자기 밭일을 얼른 끝내고 좀 더 벌어야 살 수 있었기 때문에 좀 늦게 나온 것 같습니다. 주인이 그 사람도 데려갔습니다. 물론 일꾼은 벌써 3시간을 까먹었기 때문에 하루 일당을 다 받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의 처분에 맡기는 것입니다. 몇 시간이라도 일깜을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입니다. 12시, 오후 3시 심지어 하루일 파하기 1시간 전 오후 55시경에도 몇몇 일꾼들을 주인이 뽑아갔습니다. 그 시대 선한 지주는 소위 노불 로스 오불리제 정신의 구현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일감을 주어 선행을 행했다고 합니다. 오후 6시 정각이 되자 주인이 자기 종을 시켜 나중 온 사람부터 임금을 지불하는데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소위 오후 5시에 온 사람에게 하루 일당 일 데나리온을 지불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당사자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게 왠 떡이냐? 1시간 일하고 12시간 일한 하루 품삯을 받다니 얼마나 기뻐겠습니까?? 주인의 은혜에 얼마나 감사했겠습니까? 그것을 가만히 보고 있던 먼저 온 자들이 얼른 계산을 해 보았습니다. 난 다섯 시간 일했으니 그러면 5일분 받겠다. 아침 6시에 온자들은 난 12시간 일했으니 12일분 받겠네. 그들도 다들 큰 꿈에 부풀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웬 글. 모두에게 똑같이 일 데나리온을 주는 것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 주인의 행위가 이해가 됩니까? 사람 차별하나 왜 이렇게 해. 먼저 온자일수록 입이 돼지 입처럼 쑥 튀어나왔습니다.. 처음의 감사는 사라지고 불평만 늘어놓습니다.
2. 갈등 심화, 받은 후 집주인을 원망하여 가로되.
마침내 그들의 불만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주인님! 우리는 아침 일찍 해가 뜨기 전에 나와서 해질 때까지 12시간을 땀 뻘뻘 흘리면 수고했는데 11시간밖에 일하지 않는 자들과 동일한 임금을 줍니까? 이럴 수가 있습니까? 악덕기업가가 아니고서야 이런 불평등한 대우는 할 수 없습니다. 선한 주인을 악한 주인으로 매도하기 까지 합니다. 그러자 주인이 그중의 한 사람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 친구여 내가 네게 잘못한 것이 없노라.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네 것이나 가지고 가라.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 내 것을 가지고 내 뜻대로 할 것이 아니냐. 내가 선하므로 네가 악하게 보느냐. 이와 같이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사실 교회 안에서도 먼저 온 일꾼처럼 불만과 불평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습니다. 특별히 오래 믿었던 사람 가운데 많이 있습니다. 열심히 교회를 봉사하는 일꾼 가운데도 많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특별히 직분을 가지 사람들 가운데 하나님께 불평불만을 하면서 봉사 생활하는 사람도 많이 있는 것도 현실입니다.
3. 전환,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그런데 왜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셨을까요? 그 배경을 알 수 있는 근거가 마 19장 27절로 30절까지 말씀입니다. 다 같이 읽어 보십시다. 어느 날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가 다른 12제자들을 대표해서 예수님께 이런 요구를 했습니다. “ 주님!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았사오니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주님! 우리들은 주님을 쫓아 따른다고 모든 것을 희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실 것입니까?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이 베드로의 질문에 소위 포도원 일꾼 비유를 하시면서 천국도 이와 같으니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도 먼저 죄는 수도 많으니 조심하면서 봉사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참 봉사 정신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제직은 섬기는 직분이여 교회의 봉사자요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러운 일꾼들입니다. 제직은 교회에서 여러 모양으로 봉사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정신으로 봉사해야 할까요? 참 봉사 정신은 무엇일까요? 예수님이 포도원 일꾼 비유에서 그 해답을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참 봉사 정신의 원리가 아닌 것부터 살펴보십시다. 공로 의식은 참 봉사 정신이 아닙니다. 오늘 비유에서 먼저 온자들이 주인에게 자신들을 항변하면서 자기가 더 많이 수고했다고 은근히 자기 공로를 자랑합니다.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곳은 세상의 원리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모이면 다 자기 자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런 공로 의식이 남아있습니다. 우리는 주를 위해 많은 희생이 있으니 마땅히 다른 사람보다 더 대우를 받아야 마땅하겠지요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나 교회에서는 자기 공로를 자랑하는 사람이 제일 못난 사람입니다. 나는 이 교회에서 한 일이 많아, 내 없이는 교회가 안 돌아가 이렇게 자기 공로 자랑 많이 하는 사람은 실상은 하나님의 나라를 넘어지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에서 나중 될 사람입니다. 공로 의식은 참 봉사 정신이 아닙니다. 또 비교 의식도 참 봉사 정신이 아닙니다. 비유에서 먼전 온 자들은 나중 온자들과 비교를 했습니다. 먼저 온 우리는 나중 온자들보다 더 많이 수고를 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당연히 먼저 온자들은 나중 온자 보다 더 받을 줄 알았다라고 했습니다. 나는 오래 이 교회 다녀 수고했으니 최근에 온 당신보다는 내가 기득권이 더 있어 은근히 자기주장을 하며 텃세를 합니다. 비교하는 봉사는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합니다. 먼저 된 자도 나중 되고 맙니다. 공로의식이나 비교의식에 기초한 봉사는 교회 성장 학자 피터 와그너에 의하면 교회 성장을 갉아먹은 영적 암과 같다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천국의 참 봉사 정신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은혜 의식입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예수님의 비유 말씀 속에서 이 일꾼들은 주인 만나기 전 어떤 자였습니까? 일할 것도 없어서 빈둥빈둥 노는 불쌍한 인생들이었습니다. 주인이 불쌍히 여겨 백수인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었습니다. 이들은 주인으로부터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처음에는 감사가 넘쳤습니다. 이처럼 저와 여러분도 하나님도 모르고 죄 가운에 살 때에 일방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부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제직으로 삼아주셨습니다. 엡 2:8-9“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2:9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예수님이 죄로 말미암아 죽었던 나를 십자가 희생의 피로 값 주고 사셨기에 예수 믿은 우리는 이제 예수님의 것입니다. 주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의 종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이 구원의 은혜를 깨닫고 얼마나 감사했습니까? 6시나, 9시나, 12시나, 오후 3시나, 오후 5시에 온자들은 다 똑같이 주인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할 수 있었듯이 비록 우리가 남보다 먼저 부름 받아 먼저 예수 믿고 더 많이 수고해도 이것은 다만 주님의 크신 은혜일 뿐입니다.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예수님의 사랑의 종 된 저와 여러분은 어떤 자세로 봉사해야 할까요?? 예수님께서 이런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눅 17:7-10 “ 17:7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17:817:8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시중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17: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17:10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한 종이 밭에서 일하고 왔어는 주인의 밥상을 먼저 차려주고 주인의 수발을 다 한 후에 먹습니다. 주인의 명한 대로 다했다고 해서 종에게 감사해요 수고했어요라는 소리를 주인이 하겠는가? 다만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 우리가 할일을 한 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마탕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사랑의 종이 된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은 특별히 교회의 일꾼으로 부름 받아 제직이 된 일꾼들의 봉사 정신은 오직 은혜 의식에 따라 겸손히 봉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혜 의식은 항상 열심히 봉사하고 나서도 그저 무익한 종이 마땅히 할 일을 한 것 밖에 없습니다.라고 감사하며 겸손한 자세를 잊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자랑 할 것이 없는 오직 사랑의 빚진 자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주님의 은혜 의식이 실종되고 자신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라기에 당연히 주님으로부터 인간적인 큰 대가를 기대했던 것 같습니다. 제자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도 예수님을 찾아 와서는 주님이 왕이 되시면 우리 아들 요한이는 좌의정으로 야고보는 우의정으로 삼아 주십시오. 역시 큰 육적인 대가를 기대한 것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으로부터 받을 만한 자격이 있고 공로가 있는 것처럼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은혜 의식이 희미하였든 것입니다. 주님은 은혜 의식을 잃어버린 제자들에게 경고하시기 위해서 이 천국 비유를 하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들도 교회에서 조심하면서 봉사하십시다. 신앙의 타락은 주님이 나에게 베푸신 은혜 즉 첫 사랑을 잊어버림으로 시작되는 것입니다. 진리를 고수하고 고난 가운데서도 믿음을 잘 지켰던 에베소 교회를 향해 주님이 책망하신 것도 주님의 첫사랑을 잊어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계2:2“ 2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2:32:3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 2:42:4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2:52:5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과의 첫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초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이 말씀의 의미는 구원에서 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더 이상 주님이 쓰시지를 않겠다는 뜻입니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주님의 은혜받는 자입니디.. 아멘! 따라서 은혜 의식에 기초하여 봉사할 뿐입니다. 자랑 할자랑할 것이 있다면 오직 은혜 주신 주님만 자랑할 것 밖에 없는 것입니다. 자랑하려거든 오직 주안에서 자랑하라고 바울 사도는 역설합니다.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불러 주시고 주님을 위해서 봉사 할 수 있는 제직의 직분을 주신 것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주를 위해 봉사할 때 어떤 대가를 바라면서 봉사하는 것아 아닙니다. 주님이 주신 시간 물질 재능을 본래의 주인을 위해서 희생함으로 드리는 것이 봉사입니다. 누가 알아 주든지 안 알아주든지 상관하지 아니하고 예수님만 바라보면서 봉사합니다. 봉사할 때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하듯 합니다. 끝까지 봉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봉사합니다. 일방적으로 날 구원하신 은혜 의식이 봉사 정신의 원리입니다. 은혜 의식에 감사해서 섬기는 그 신앙과 그 교회가 먼저 되는 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계속 쓰시겠다는 것입니다.
4. 대단원, 이와 같이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 사랑하는 여러분이여!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붙잡으십시다. 먼저 된 자가 나중 된다면 얼마나 비극입니까? 위대한 바울 사도도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조심했습니다. 주님께서 더 이상 너를 쓸 수가 없구나. 나는 너를 더 이상 쓰지 않겠다. 이렇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중도에서 용도 폐기당한다면 그 얼마나 가련한 인생일까요? 오직 한 가지 의식으로 충만하면 그런 일은 나에게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고백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고전15:10“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 로라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은혜의식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의식으로 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은혜 의식에 충만하여 봉사하십시오. 항상 감사함으로서 봉사하십시오. 겸손으로 봉사하십시다. 그러면 나중 된 자도 먼저 될 것입니다. 먼저 된 자는 더 크게 쓰임 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