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1:15-17
2. 명제: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기에 부끄러워할 수 없다.
3. 제목: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갑오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기도하는 가운데 2014년 한 해 동안 우리 섬김의 교회의 주제 말씀으로 롬 1:16절을 정했습니다. 이 말씀의 주제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자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로마 교인들에게 너희에게도 복음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선포했습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말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당시 세계 최고의 국가인 로마 제국의 수도인 로마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오늘날 세계 최고의 선진 문명을 자랑하는 미국의 뉴욕 한복판에 가서 복음 전하기를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저는 2014년 섬김의 교회 표어를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자라고 정했는데 그 이유를 본문에서 찾아 여러분에게 소개하여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한 해가 되기를 소망함으로 이 말씀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 이유는 복음은 좋은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복음이란 말은 기쁜 소식이란 말입니다. 우리 인생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건이 바로 복음입니다. 더 간단하게 말하면 예수님이 바로 복음입니다. 1절에서는 ‘ 하나님의 복음 ’이라고 말합니다. 9절에서“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여기서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이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만든 복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우리 인생에게 영원히 좋은 기쁜 소식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바울 자신은 우리 인류에게 가장 영광스럽고 놀라운 소식을 전하는 전령이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둘째 이유는 복음은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의 의미는 ‘ 안전 ’ ‘ 치료 ’ ‘ 어떤 것으로부터 건짐 받는 것 ’ ‘ 위에서 구원 ’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 세상은 헬라 철학이 지배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철학은 죄 가운데 빠져 있는 사람들을 구하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지식의 비극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구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도는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의 메시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단순한 관념이 아니라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구원이라는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죄가 어떠한 것인지를 이해해야 합니다. 창 3장에 보면 에덴동산에서 우리 인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았습니다. 그 사람은 완전 무죄한 상태로 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마귀의 시험을 받아 불순종의 죄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죄는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계명대로 인간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아니하고, 섬기지도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도 아니하며, 이웃을 내 몸 같이 사랑할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 죄의 결과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구원은 죄의 결과로부터 사람을 건져내는 것을 말합니다. 죄로부터 구원 받음에는 상중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먼저 죄의 책임 즉 죄책으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우리 모든 사람은 죄책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에 의해 다 정죄받았습니다.. 율법의 정죄 아래에 있습니다. 사람이 죄에 떨어지자 하나님의 진노가 들어왔고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형벌을 받게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건짐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 회개하라! ”의 첫 음성은 우리 사람이 죄 사함 받기 위해 회개의 세례가 필요함을 촉구한 것입니다. “ 이 악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아라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이 말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의 필수입니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으며 하나님의 진노는 멸망과 파멸을 가져오며 그래서 우리는 지옥의 멸망에서 건져낼 필요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그 죄책 즉 죄의 형벌에서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은 구원을 통해서 그 죄책에서 해방될 수 있기 때문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구원은 죄의 세력에서 건짐을 받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인생은 죄의 형벌뿐만 아니라 죄의 노예로 죄의 지배 아래에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탄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다. 사람은 에덴동산에서 자유를 잃어버렸습니다.. 사탄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자유를 누렸지만 사탄의 말을 듣는 순간 자유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인간은 이 세상 신인 마귀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인생은 “ 공중의 권세 잡는 자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 들 가운데 역사하는 영 ”의 노예인 것입니다. 인간은 죄의 지배와 세력과 폭압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인생이 된 것입니다. 인간은 이런 죄의 세력을 모르니 구원의 필요성을 모르는 것입니다. 처음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은 우리 인간은 죄의 세력 안에 있지 않았습니다. 타락한 결과 스스로 인생은 마귀의 집에 들어왔습니다.. 그는 스스로 마귀의 집에서 탈출할 수 없습니다. 바울 사도는 구원은 죄의 책임과 죄의 세력으로부터 건져 낸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구원은 죄의 오염에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의 문제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죄의 오염입니다. 베드로는 벧 후 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죄는 오염시켜 썩게 만듭니다. 죄의 오염 또는 썩어짐이 세상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오염이 우리 인생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밖에서 오는 시험도 있지만 우리 자신 안에 내 본성 자체가 왜곡 되어있고 뒤틀려 있다는 것입니다. 나를 죄로 끌어당기는 것은 내 속에 있습니다. 내 자신이 오염되어 있고 썩어 있고 거룩하지 못합니다. 이처럼 구원은 우리를 죄의 형벌, 죄의 세력, 죄의 오염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삼중적인 구원 즉 전체적인 구원입니다. 우리는 죄의 책임으로부터 건짐을 받을 뿐만 아니라 마귀와 그 모든 시험으로부터 건져 냄을 받을 것입니다. 그 결과 예수 믿는 우리에게 ” 점이나 주름 잡힌 것이나 그러한 것이 없는 “날이 올 것입니다. 유다서에 ” 그 영광 앞에 흠 없이 “ ” 흠 없이 즐거움으로 “하나님의 영광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줍니다.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께 대하여 철저하게 화해시키는 것입니다. 우리와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마치 죄 사함만을 뜻하는 것으로 나타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죄 사함은 구원의 시작에 불과합니다. 사람이 타락하기 전에 하나님과 교제했습니다. 타락과 죄로 말미암아 사람은 그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회복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아닙니다. 구원은 우리들에게 영광의 소망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영생을 줍니다. 구원은 우리에게 영광의 소망을 줍니다. 구원은 모든 충만한 영광을 가지신 하나님의 면전에서 영원토록 보낼 축복을 가져다줍니다.. 그리고 시간적으로 표현하면 우리는 이미 구원받았습니다.. 바울 사도가 “ 십자가의 도가 멸망당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구원을 이미 받았습니다. 롬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예수님을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이러한 일이 이미 이루어졌습니다. 믿으시기 바랍니다. 롬 6장에서 ”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리스도인은 이미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그는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죄나 율법이 더 이상 예수 믿는 나의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롬 8:1” 그러므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예수님이 나 대신 십자가에서 죄의 형벌을 받으셨기 때문에 이 예수님을 믿는 자는 결코 정죄함이 없습니다. 이점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파하기를 자랑하는 이유입니다. 예수 믿는 우리의 죄는 이미 용서받았습니다.. ” 그는 이제... 정죄함이... 없나니 “죄의 죄책 문제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끝났습니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낸 바 되었으며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 죄에 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물론 이미 구원을 받았지만 완전하지는 못합니다. 구원받은 신자도 죄를 범할 수가 있습니다. 신자의 삶 속에 아직 죄의 세력이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구원을 받은 과정에 있습니다. 이 구원은 점진적입니다. 롬 7장에서 ”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 “구원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롬 6:14“ 그런즉 어찌하리오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오 그럴 수 없느니라 ”점진적이고 계속적인 성화 구원의 요소를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 구원을 말합니다. 또 구원은 장래에 일어날 입니다. 롬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오“미래적인 차원에서 말합니다. ”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리노니 “완전한 몸의 구속은 장래에 속한 것입니다. 그것을 고대하고 있습니다. 롬 13장에서 ” 이에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었을 때 보다 가까웠음이라 “어거스틴에게 다가온 위대한 말씀이 바로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완벽한 구원은 우리가 처음 믿을 때 보다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영화 구원이라고 말합니다. 고전 1:30절에서 바울 사도는 “ 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구원의 전체가 다 묘사되어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다. 칭의 구원입니다. 우리는 거룩함을 입어야 합니다. 성화 구원입니다. 영화롭게 될 필요가 있습니다. 영화 구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다 우리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완전무결한 구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구원, 하나님과의 화해, 영광의 소망, 영원한 복락 등 모든 것이 포함된 구원을 자랑합니다. 완전한 구원 때문에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까?
셋째 이유는 구원의 방식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 방식을 표현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구원은 사람이 자기 노력을 다해서 얻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 하나님께서 ’’ 행하신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선포가 바로 복음입니다. 바울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것을 자랑합니다. 율법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을 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죄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것을 할 수 없게 막습니다. 얼마나 자주 우리는 작심삼일의 경험을 합니까? 인간은 죄의 능력을 이길 힘이 없습니다. 율법은 구원을 줄 수 없고 정죄 밖에는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 죄 아래 ’’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롬 8:3절에서“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구원의 역사를 성취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복음은 우리 인생이 구원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말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이 어떻게 구원을 얻는지를 말해 주는 것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입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어디서든지 누구에게나 복음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성경 전체가 바로 이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합니다. 성경에서 활동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사람이 어떠한 일을 하는지 알았습니다. 사람이 행하는 일은 죄 가운데 떨어져서 계속 죄를 짓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더 낮은 차원으로 떨어져 비참과 절망에 처하게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입니다. 성경은 도덕책이 아닙니다. 복음은 하나님의 선포입니다. 인간 역사를 통해서 계속 일하시는 분이 하나님입니다. 그분이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한 민족을 세웠습니다, 여러 왕을 세운 분도 하나님입니다. 선지자를 보내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 때가 차매 하나님이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여자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분 ”도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사람으로 예수 믿어 구원시키시는 일을 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찾아오셔서 복음을 듣게 하시고 예수 믿어 천국 백성으로 삼으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사랑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고 그 모든 일을 최종적으로 완벽하게 이루어지기까지 그 일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그것은 좋은 소식입니다. 구원이란 말은 가볍게 경박하게 사용될 수 있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고 자랑하면서 죄를 짓는 것은 부끄러운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나는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음을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러나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말이 무엇인지를 생각하면서 사용합시다. 우리는 여전히 구원받고 있음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구원은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알아야 합니다. 영화 구원은 이 세상 너머에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내세에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이미 구원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또한 구원을 받고 있습니다. 또한 최종적으로 완전히 철저하게 구원받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에게 완전한 구원 위대한 구원 하나님의 구원을 주시는 이 복음을 바울 사도처럼 우리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자랑하는 2014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