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12:1-2
2. 명제: 이 세대를 본받지 않으려고 하다가 범하기 쉬운 위험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3. 제목: 이 세상을 본받지 않음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은혜로 의롭다 함을 받아 칭의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 구원이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한국 교회 교인들의 최대의 비극은 은혜로 칭의 구원받은 것에 머물러 있고 성화 구원에는 무관심하다는 것입니다. 초등학교에 입학을 한 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로 수준이 자라가야 하는데 평생을 초등학교에 머물려 있는 자녀를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 마음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지 않습니까? 한국 교회 교인들의 모습이 이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지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지 아니하고 세상을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정체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모든 삶의 가치와 삶의 방식이라고 말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귀를 따라가는 삶이 바로 이 세상을 본받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은혜로 구원 받은 천국 백성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항상 하나님인 말씀인 성경의 가르침의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사고방식에 복종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 단수한 문제가 아닙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고 하다가 이 세대를 본받는 만큼의 큰 후유증을 일으킨 것이 교회 역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고 하다가 범하기 쉬운 위험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고 하다가 범하기 쉬운 위험성은 무엇이며 어떻게 하는 것이 이 세상을 본받지 않는 바른 정신일까요?
첫째는 전통주의에 빠지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전통주의의 잘못은 “ 새로운 것은 모두가 잘못이다. 내가 듣지 못한 것은 잘못이다 ”라는 입장을 취합니다. 이것이 전통주의의 극단입니다. 세상 주의와 전통주의의 양극단에 빠지는 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성경적인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적인 입장을 가져도 모든 일마다 그렇게 간단하게 맺고 끊을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어떤 형태의 전도 방식도 반대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세상 사람과 접촉을 하는 것은 세상을 본받는 일이 된다고 생각한 것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형태의 율법주의입니다. 이런 생각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내 방식만을 고집하겠어라는 태도가 있습니다. 이런 완고한 수구적 정신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극히 조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어떤 경고를 하십니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반응 방식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세리들과 죄인들에게 가까이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예수님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놀라서 눅 15:2“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 눅 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예수께서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다니 이런 일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런 일을 처음이야 우리가 하지 않는 일을 예수는 해! 그들의 비난은 주님께서 오신 전체 목적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기 방식만 고집한 결과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한 것입니다. 그것이 바리새인들의 잘못이었습니다. 그 후 유대주의 자들은 바울 사도를 가는 곳마다 따라다니면서 이방인과 만나는 바울 사도의 태도를 무섭게 비판했습니다. “ 그들은 저 바울이란 사람은 잘못하고 있어 이 사람은 전에 우리가 하지 않았던 일을 하고 있어 이방인과 어울려 "라며 비판했습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위대한 설교자 조지 휘필드가 노천 즉 교회 건물 바깥에서 설교하는 것 때문에 고통을 받았습니다. 그들은 노천에서 설교하는 것을 불경건하다. 당시 교인들은 복음 전도는 거룩한 구별된 건물 안에서만 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교인들은 밖에서 복음 전도하는 휘필드를 반대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이 하지 않는 짓을 한다고 비난한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주의의 위험성입니다. 다시 말하면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다가 바리새인들처럼 전통주의자들의 정신에 쉽게 빠질 위험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적인 가르침과 방식에 지배를 받아야 합니다. 자신의 선입견이나 전통에 지배 받지 말아야 합니다. 나의 견해가 나의 방식이 성경적임을 입증할 수 없거든 말하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합니다. 설교를 꼭 교회 건물 안에서만 해야 한다는 성경의 말씀이 어디 있습니까? 자신들이 하지 않은 일을 했다고 남이 하는 것을 배척하는 것이 전통주의의 위험성입니다. 시편 이외의 어떤 노래도 불러서는 안 된다 그래서 복음 송을 부르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성경으로 자신의 주장을 입증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점을 성경으로 입증하기는 어렵습니다. 우리는 세상을 본받지 않으려고 하다가 엄격하고 완고한 전통주의에 빠지기 쉬운 위험성을 경계해야 합니다.
두 번째 위험성은 율법주의적인 자세입니다.
“ 너희는 이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 이 말을 하면 목사님 그럼 산에 들어가 살아야 합니까? 사업을 하면서 어떻게 세상을 본받지 않을 수 있습니까? 길은 하나 밖에 없죠. 세상을 떠나 사는 거죠라고 말합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극단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세상을 본받지 않은 유일한 일은 세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생각은 극단적인 태도입니다. 성경의 가르침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는 말씀을 실천하려고 하면 마귀는 즉각 율법주의자로 넘어가게 만들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언제나 쉬운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규칙이나, 법칙, 원칙을 좋아합니다. “ 은혜 아래 있는 것보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것이 ”더 쉽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 여기 원칙이 있습니다. 이것을 지키십시오. 얼마나 간단합니까? 그러나 이것은 신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 아래에 있습니다. 물론 이 말을 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율법 없는 방종의 삶이 허용된다는 뜻이 아니라 율법의 지배 아래에 있지 않고 은혜의 지배 아래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율법이 왕이 아니라 은혜가 왕이 되는 삶이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뜻입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17세기에 스위서 목사인 메노파가 창시한 메노파가 있었습니다. 미국의 펜실바니아의 메노파 사람들은 “ 이 세대를 본받지 말라 ”는 말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철저하게 그 해석대로 살기로 결심을 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것은 무슨 것이든 다 세상적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들은 전기, 커튼, 사진, 티브이, 전화, 자동차 같은 것을 결코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교회에 가기 위해 자동차를 타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보고 우리는 웃을 수도 있지만 그들은 정말 정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율법주의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토요일에 할 수 일을 주일에 하는 것은 나쁘다는 생각으로 토요일 밤에 장화를 신고 잠을 잤습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일은 세상을 본받는 위험성이 아니라 자신들이 정한 법을 깨뜨리지는 않을까라는 두려움의 정신 때문에 세상을 본받는 것에 대한 과격한 반작용으로 순진한 율법주의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약 성경은 율법주의를 정죄하고 있습니다. 마귀가 하는 일은 한 가지 일을 떼어 내어 그것에만 관심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일에 대해 균형을 가지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자동차, 전기, 컴퓨트를 사용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비난하지 않습니다. 비난 받아야하는 것은 인간 자신의 고정관념과 전통과 선입관과 규례 등입니다. 여러분이 율법주의적인 태도를 취하면 세상을 닮아가는 그리스도인만큼 나쁜 입장에 있는 사람이 됩니다. 율법주의의 또 다른 나쁜 점은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항상 남에게 비판적인 정신을 가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율법주의는 항상 다른 사람을 정죄합니다. 자기 기준으로 남을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판단 기준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 성경밖에 없음을 꼭 기억하십시오.
세 번째 위험성을 무 율법주의입니다.
도덕 폐기론 자라고 부릅니다. 이 관점은 은혜로 구원 받은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도덕적인 법에 복종할 필요가 없다는 관점입니다. 이들은 앞에서 언급한 메노파와는 정반대의 태도입니다. 이들은 사람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행위는 이제 문제가 되지 않는다라는 식입니다. 할 수만 있으면 세상과 가까워지려는 태도가 마치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인 것처럼 세상적인 정신을 드러내는 자세입니다. 사실 이런 자세는 무 율법주의 태도입니다. 가장 교활한 무 율법주의는 세상을 본받으면서도 복음주의에 관심을 가지는 척한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관점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상 사람들에게 기독교를 매력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여자들은 온갖 정장을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기독교를 보여 주기 위해서 세상의 화려한 건물보다 더 멋진 교회당을 지어 보여 주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의식 속에 살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닮아가는 것이 복음전도를 위한 가장 큰 영향력을 주는 것처럼 가면을 쓰고 자신을 과시하고 싶은 욕망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리스도인은 세상과 다르기를 원합니다. 그러면 세상을 본받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요? 몇 가지 원리를 제시합니다. 먼저 요일 2:15의 말씀대로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정체를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반역하는 모든 삶의 방식과 가치관들입니다.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면 결국 마귀를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둘째는 살 전 5:22 에“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 우리 모두가 그릇된 것으로 알고 있는 어떠한 것이 있습니다. 성경이 미워하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것들은 행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것을 행하면 세상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죄악적인 것은 생각조차 하지 말아야 합니다. 거부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이 세상의 유행에 지배를 받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행의 특징은 외향과 허식입니다. 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그것입니다. 언제나 세상은 소위 겉치례와 허식이 문제입니다. 머리 모양, 패션, 체하는 체면 문화 등이 그것입니다. 달세 방에 살면서 비싼 차를 굴리며 부자 인체 하는 체면 문화를 그리스도인들은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 주변의 눈치를 보고 이 일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렇게 하면 불리하게 작용하지는 않을까? 라는 두려움에 빠져 있다면 여러분은 이미 세대를 따라가 있는 셈입니다. 참 그리스도인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단 한분 사람을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만 두려워할 뿐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은 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유행에 속한 부분을 뽐내는 방식으로 과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결코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들의 옷단을 넓게 했던 바리새인들이 그러했습니다. 마 23:5“ 그들의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나니 곧 그 경문 띠를 넓게 하며 옷술을 길게 하고 ”바리새인들은 항상 자신들이 하는 일을 드러내고 과시하고 싶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세상이 자기들이 하는 일을 보고 감탄하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자신을 과시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세상을 본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이 거의 본능적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술주정뱅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코 수염을 길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이웃들이 놀렸습니다. 코 수염이 너무 길다. 코 수염을 좀 깎아라 라는 말에 다투고 싸우기가 일 수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교회에 나왔습니다. 코 수염이 깔끔하게 깎여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물었습니다. 누가 코 수염을 깍하라고 했습니까? 그러자 이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더 이 이상 그런 모습을 좋아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저더러 수염을 깍아라고 말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가 오늘 아침 세수를 하다가 거울에 비친 나 모습을 보면서 내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 코 수염은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 아니야. 그리고는 가위로 내 코 수염을 자르고 면도를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의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빌 1: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에게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한마음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여러분의 행실이 복음에 합당합니까? 내가 믿는 복음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에 걸맞고 조화를 이룹니까? 그리스도인은 자기 속에 본능 적으로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 안에 계신 성령님의 역사인 것입니다. 성령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떠벌이지 않습니다. 그는 나팔 불기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다만 위대한 복음에 합당하게 살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항상 절제입니다. 중용입니다. 그는 극단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복음을 전하고 싶은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단아하고 단정한 모습을 띄어야 합니다. 술을 거절할 때도 예의 바르고 정중해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정중하고 예의 발라야 합니다. 조용히 사양하십시오.. 그러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은 무언가가 다르구나라는 의문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방식입니다. 그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방식입니다. “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나를 구원하신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적인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기이한 모습을 띄어서도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절제하고 온유한 사람입니다. 복되신 우리 주님을 닮아가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계셨을 때 아무도 모르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을 떠벌리지 않으셔도 사람들은 알아보았습니다. 사 42: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그러나 그의 빛은 밝게 비추어졌습니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가야 하는 길입니다. 예수님을 닮고 싶습니다. 예수님의 성품을 즉 성령의 열매를 주옵소서. 이 거룩한 소원의 지배를 받는 동안에는 이 세대를 본받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이것이 은혜로 구원받은 천국 백성이 성화 구원을 이루어 자신의 몸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산제물이 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