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12:1-2
2. 명제: 성화 구원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써만 가능합니다
3. 제목: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
1. 갈등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천국 백성은 하나님 나라의 구원 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다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화 구원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을 성화 구원이라고 부릅니다. 성화 구원은 신약 성경의 위대한 주제입니다. 물론 성화 구원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 이 성화 구원은 그리스도인에게 사활이 걸린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욕을 많이 얻어먹는 이유는 바로 이 성화 구원에 실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롬 12;1-2절 두 구절에서 성화 구원의 교리에 대한 서론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하심 때문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리는 삶 죽 성화 구원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촉구하는 것입니다. 성화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먼저 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본받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했습니다. 마귀의 영향력 속에 있는 이 세상의 사고방식을 쫓아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이어서 2절에 “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는 “ 이 세대를 본받지 말 ”고 “ 변화를 받으라 ”고 말하고 있습니다. “ 오직 변화를 받아 ”라는 말의 의미는 고후 3:18에서 바울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내려올 때 사람들이 모세의 얼굴을 보고 두려워했다고 기록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이 빛났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교제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영광이 그 얼굴에 나타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야 한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계속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에 속한 무엇이 우리 속에서 나타나야 하며 나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고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이웃으로부터 저분은 예수 냄새가 나고 또는 예수 모습이 보이는 것 같해라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나요? “세상을 본받지 본받지 말라는 말과 변화를 받아”라는 말은 성화 구원에 있어서 열쇠 같은 구절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을 살면서 세상적인 방식으로 산다면 마치 어울리지 아니하는 콧수염을 기르고 있는 배우와 같습니다. 그런 경우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본질과 존재를 표현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사람은 세상에 속한 사람인양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럼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참되게 나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모순 되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그 정반대로 하라. 참되고 진실되고 내면적인 본질이 비취도록 하라. 그것을 명백히 보여주라. 그것을 나타내어라. 우리 주님께서 변화상에서 보여 주신 것처럼 말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음을 알라. 그것을 보이라. 너희는 변화를 받으라 ”예수 믿는 그리스도인은 변화를 받아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2. 갈등 심화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미 변화를 받았음을 아십니까? 그것이 바로 거듭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내 구세주와 주님으로 믿을 때 하나님의 생명이신 성령님이 오심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 태어났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변화를 받으라 ”이 말의 의미는 이런 뜻입니다. “ 네가 어떠한 사람인지 그 모습 그대로 보이라 ”너희는 이미 변화되었다. 그러니 그 때문에 너희 자신을 변화시키라.. 어떤 의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 만일 너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세상의 가치와 사고방식에 따라서 삶을 살고 있다면 너희는 지금 부자연스러운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 그렇게 하지 말고 자연스럽게 행하라. 너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이라. 가면을 벗어라 그 가면은 더 이상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여기 위대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거듭난 사람이며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리스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까요? 답은 “ 너희 행실로부터 시작하지 말라 ”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행실로부터 시작함으로써 그 행실의 문제를 다루는 사람이 아닙니다. 물론 아직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들은 회개 즉 하나님 앞으로 돌아와서 예수님을 먼저 믿어야 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이전 행실을 단순하게 수정하거나 개선하는 차원에서 생각하는 것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합니다. “ 목사님 제가 이 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까요? ”답은 이러합니다. “ 그 특별한 죄나 문제 거리를 일단 잊어버리십시오 ”그리스도의 삶은 특별한 문제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세상의 도덕적 교훈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행실을 고치라고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마음 즉 성품의 변화를 요구하십니다. 세상 도덕은 행실과 행동의 개선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 구원의 비밀입니다. 만일 어떤 죄 문제를 해결하면 모든 것이 다 잘될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문제가 해결되어도 또 다른 문제가 뒤따라오는 것입니다. 성경은 예수 믿는 자신이 누구인지 어떠한 사람인지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여러분 자신에 대한 전체 진리로부터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이것저것을 잘못하는 사람으로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떠한 사람인지 인식해야 합니다. 먼저 어떤 난제들을 거론하거나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여러분의 삶을 분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도덕입니다.
3. 전환
당신의 마음 즉 사고방식을 먼저 바르게 하십시오, 그리스도인은 마음 즉 심령을 다루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이 “ 저는 같은 죄를 계속 짓고 있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라고 묻는다면 저는 그 사람에게 죄에 대해서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누구이십니까? 당신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물론 아직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먼저 과거의 삶을 회개하고 하나님 앞에 돌아와 예수 믿으라고 권면합니다. 그러나 이미 믿고 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그 사람의 자신의 본질에 대해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미 하나님 안에 있는 신분의 사람이요 예수님 안에 있으며 성령 안에 있는 천국 백성입니다. 그러니 심령 즉 마음을 새롭게 하십시오. 바울은 엡 4;23“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여기 심령으로 새롭게 회심한 한 사람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항상 같은 지성 즉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지의.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 예수 믿었다고 해서 그가 갑자기 천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수완과 능력이 거듭날 때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전에 가지고 있든 능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다소 사람 사울이 예수 믿어 바울 사도가 되었습니다. 사도는 회심 전 가지고 있었던 이지를 그대로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는 일 등급 두뇌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가 변화될 필요가 있는 것은 몸의 기능이 아니라 심령 즉 마음입니다. 심령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세상에는 명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놀라운 두뇌를 가지고 야비하고 무가치한 목적을 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점이 오늘날 인생의 비극입니다. 하나님을 모독하고 어리석은 말을 하는 사람이 지성적이지 않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이들에게 지성의 능력에 문제가 아닙니다. 그들의 문제는 마귀 적으로 영리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고통 거리는 지성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의 문제는 마음의 정신입니다. 그것이 바로 핵심입니다. 다른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궁극적인 중심 세력이 인간의 마음입니다. 생각의 모든 과정을 결정짓는 내면적인 원리 즉 마음이 새로워져야 합니다. 사람의 이성 즉 지성이 문제가 아닙니다. 그 이지의 방향이 조정되고 변화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 삶을 풀어 나가야 하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지성적인 사고방식을 새로운 방향으로 바르게 연결시켜 생각해야 합니다. 이제까지 한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여러분의 이지의 사고를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해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믿기 전 다른 모든 사람을 능가하는 방법으로 교회를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 마음이 새롭게 되자 그가 가진 능력이 예수의 복음 전하는 일로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마음의 방향이 바뀌자 자신이 가진 능력이 마귀를 위해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화 구원을 이루어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데 있어서 열쇠는 바로 마음이 새롭게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생이 하나님께 죄를 지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인류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계명을 불순종 것에 불과합니까? 그들이 특별한 죄를 지은 것에 불과할까요? 그렇지가 않습니다. 에덴동산에서 일어난 진정한 일은 아담과 하와의 마음과 심령의 변화였습니다. 그때까지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들의 생각은 선하고 사랑스러웠습니다. 그러나 마귀가 왔습니다. 마귀는 단순히 선악과 열매가 좋다고 떠벌리며 그 열매를 매혹적으로 만든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그렇게 했죠. 그러나 마귀가 실제로 했던 것은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집어넣은 것입니다. 창 3:1절에서“ 그런데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 뱀이 여자에게 물어 이르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마귀는 하나님이 ....하나님이.... 라 하시더냐?라고? 유혹하면서 하나님께서 너희가 하나님 같이 되지 못하게 하려고 그렇게 말씀하신 거야라고 마음에 불신을 심었습니다. 단순히 열매를 따먹는 문제가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먹기 시작하기 전부터 하나님에 대하 불신이 그들의 마음속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 먹은 일은 하나님과 그들 자신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불신이 불순종으로 무서운 변화가 일어난 것을 외향적으로 나타낸 것뿐이었습니다. 그들은 같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능력을 통제하는 마음이 잘못되어 갔습니다. 창 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노아 홍수 심판 이전의 사람들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타락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악하게 된 것입니다. ” 그 사람의 생각 “바로 그것이 새롭게 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떠난 그 죄로 인하여 육신적 육체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인생의 문제의 본질입니다.
4. 대단원
이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바로 거듭남입니다. 다른 어떤 것도 이 문제를 건들릴 수가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기독교 교훈을 아직 거듭나지 않는 이 세상에는 적용할 수 없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항상 사람들의 행동과 행실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평화주의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인 “ 오른뺨을 맞거든 왼뺨도 돌려대라 ””라고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세상 사람들도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노력은 실패했습니다. 기독교 교훈을 가지고 세상에 적용시키는 일은 실상 복음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요 3:7” 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놀랍게 여기지 말라 “거듭나야 한다고 말합니다. 문제는 행하는 것이 아니라 ” 그 사람 자체 “가 문제입니다. 바른 일을 하려면 그 사람 자신이 바로 서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 믿어 거듭날 때 새로운 능력을 받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마음을 받습니다. 우리 인생을 주도하는 새로운 원리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기능과 능력들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입니다. 먼저 새로운 마음 즉 생각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새로운 생각이 새로운 행동을 낳습니다. 생각이 행동을 자극합니다. 잠 23:7”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네게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의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하는 호소는 기계적인 방식으로 어떤 행실을 본받으라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 자 너희가 회심했으니 이것저것을 해서는 안 된다. 이것 저것을 해라 ”이것은 율법주의입니다. 새로운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것은 " 너희가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 때문에, 그러므로 “여러 원칙과 규례들을 세워놓고 지키라고 말하지 말고 ”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며 누구라는 사실을 기억하라 ””라고 말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행한다고 해서 무조건 따라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그렇게 해야 될 이유를 이해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성경은 항상 내면적인 상태를 문제로 삼습니다. 마음의 변화를 문제로 삼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의복을 걸쳐 입는 것과 같습니다. 속에 있는 것을 외면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와 도덕의 차이는 기독교와 외식과의 차이와 같습니다. 외식 자들은 겉을 꾸입니다. 외식 자들이 나타내는 것은 속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나타낸 그대로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행실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데서 자라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견해의 변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 진리를 알고 진리에 사로잡히고 동화되었다는 뜻입니다. 부분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전체가 변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실이 바꿨었다면 그것은 삶의 방식 일부분만 변화 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달라진 것입니다. 그 사람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착하지만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참 그리스도인만큼 훌륭하게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더 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나타난 면에서만 그렇습니다. 눅 16:15“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은 하나님 앞에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심령에 있어서 도덕적인 사람과 다릅니다. 마음의 중심 그 삶의 중심에서 차이가 납니다. 고후 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예수 안에 있는 나는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의 백성임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 안에 계심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답게 행동하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또한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인도하실 것입니다. 육신의 소욕을 따르지 말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묵상하십시오. 그 말씀대로 내 생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여러분을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변해야 행동이 변하고 행동이 변할 대 운명이 바뀌는 것입니다. 그럴 때 성화 구원을 이루어 여러분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산 제물로 드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