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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마음을 가져라(수정본)

wordlove 2021. 4. 1. 07:41

1. : 12:15-16

3. 명제: 그리스도인의 동료 그리스도인에 대한 태도는 달라야 한다.

3. 제목: 같은 마음을 가져라

 

1, 갈등

14절에서 핍박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고 권면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번에는 즐거워하거나 우는 자들에 대한 문제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과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어렵습니까? 언뜻 보면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더 쉬워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두 가지 중에서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 은 다소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울고 있으면 누구니 쉽게 같은 감정을 가지게 됩니다. 본성적으로는 아무라 악인이라도 울고 있는 모습을 보고 모종의 반응을 느낍니다. 어려운 입장에 처에 있는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지기는 훨씬 쉬운 일입니다. 즐거워하는 사람보다 어려워하는 사람에게 동정심을 가지는 것은 훨씬 쉬운 일입니다. 어째서 그렇습니까? 모든 인간에게는 교만의 문제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의 자아는 항상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또 자기 자신이 크고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타락이 본성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남자든 여자든 거만하게 되었고 자기중심적인 존재가 되었습니다. 물론 교만 속에는 질투와 시기심이 들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즐거워하고 있을 때 그 사람은 어떤 이유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성공하였거나 아니면 어떤 행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을 고양시키는 어떤 좋은 일들이 일어나서 들떠 있는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매우 즐거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모습을 보고 질투심을 가지게 됩니다. 우리 자아 속에 가장 악한 것이 바로 이 시점에 함께 수반되어 나타납니다. 그러니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하는 것은 틀림없이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체험 속에서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이 훨씬 쉽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고통을 당할 때 속에서 일어나는 동정심 때문입니다. 실패와 성공을 하지 못함과 또는 어떤 사람을 주저 앉게 만든 어떤 일이 그 사람을 나와 경쟁하는 상대에서 제외시킵니다. 진실로 한동안 우리는 저 우는 사람보다 더 나은 입장에 있다는 느낌을 가집니다. 우리는 울고 있지 않은데 그 사람은 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양되어 있는데 그 사람은 침체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과 함께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일이 다소 더 자연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2. 갈등 심화

이어 사도는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복된 사람들을 시기하지 말라 시기심은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계속됩니다. 다른 사람이 성공 했을 때 즐거워하는 것은 매우 예외적인 일입니다. 모든 것 중에서 가장 큰 난제는 질투심과 시기심입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덕목은 시기심을 배제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합니다. 사람들은 자기들 마음속에 시기심을 내 보이지 않을 단계까지 어는 정도는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것과 속으로 그것을 느끼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그런 시기심까지 느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동료 그리스도인이 즐거워 할 때 적극적으로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러분이 진실로 그 행복에 들어가야 하며 그 성공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 이웃이 즐거워하는 이유가 무엇이든지 간에 함께 기뻐해야 합니다. 시기심을 다루는 여러 방식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일종의 초연함을 개발했습니다. 소위 많은 수양을 통해 시기하지 않는 초연함의 단계에까지 도달했다고 자랑합니다. 그들은 인내심으로 어느 정도까지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소극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 ”라는 말의 의미를 모릅니다. 그들은 오직 시기심을 보이지 않게 처세하는 태도를 개발한 것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속으로는 원한이 있습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인은 소극적인 수준뿐만 아니라 적극적으로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적극적으로 함께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다시 말합니다. 우리 인간 스스로는 결코 이런 단계에 도달할 수 없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인위적인 미소를 띨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인의 마음으로는 결코 이룰 수가 없습니다. 그 일이 가능하게 하는 것은 한 가지 유일한 방식이 있는데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역사로만 가능합니다. 어떻게 성령께서 그 일을 행하십니까?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영광입니다. 성령께서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는 것과 새로운 성품을 주심으로 가능하게 하십니다. 새로 태어남이 우리 인간의 자아의 문제를 해결하는 유일한 방식입니다. 다른 일은 그 일을 해 낼 수 없습니다. 복음은 자아를 수정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듭남 새로움 새로운 존재 새로운 인격의 교리를 가르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구원의 복음만이 우리의 자아를 구원시킬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우리를 자아로부터 건짐 받을 뿐만 아니라 다른 무리들과 동질화가 되게 만듭니다. 이것은 기이한 일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우리는 같은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 예수님의 몸에 속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12:1-2“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롬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본받지 말라 뿐만 아니라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감화 아래서 성령의 작용으로 새로운 성품을 받게 되었고 그 성품은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오늘 권면을 순종하도록 능력을 주는 것입니다. 고전 12:26 “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우리가 참된 그리스도인이라면 독단적으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구원을 계획하실 때 그것을 정하신 것은 하나님입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한 몸이 되게 만드십니다. 다른 이에게 일어나는 일이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감화를 끼칩니다. 그러니 한 지체가 존귀함을 받으며 우리 모두 그와 함께 즐거워합니다. 그 일은 그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 몸에게 일어났고 그것은 머리에게 일어난 일이고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위대하시고 영광스러우신 머리 되신 주님과 함께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고후 11장에서 바울 사도는 이 점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이 겪은 고통거리와 난제들과 염려거리들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27-29“ 고후 11: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후 11:28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고후 11:29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바로 이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나는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로 애타고 있으며 누가 실족하게 되며 애타고 있다 ””라고 말합니다. 바울 사도의 성품을 잘 들어내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 고백의 시금석을 알아보는 것 중에서 그리스도인은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느끼는 이 능력보다 더 철저한 시금석은 없습니다. 거듭나게 하시고 우리를 그리스도의 몸에 연합시키시는 성령의 위대한 교리가 바로 여기에 함축되어 있습니다. 엡 4: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우리가 이 교리를 믿는다면 그 교리들을 일상생활 속에서 구체화되어야 함을 알지 못한다면 그 말씀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초대교인을 향해서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비웃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들이 피차 얼마나 사랑하는가 보라 는 욕설이었지만 동시에 큰 칭찬이었습니다. 그것은 초대 교인들의 삶이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였든 것입니다. 신앙과 실천을 나누지 마십시오. 교리와 실천은 항상 같이 갑니다. 교회사를 보면 마귀는 이 말씀을 실천하지 못하도록 방해했습니다. 믿음을 위해서 열심 내든 사람들이 이면에서 실패했습니다.

 

3. 전환

이어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을 실천하도록 도와줍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그리고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이 모든 것은 서로 깊은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는 우리들에게 앞에 있는 권면들을 실천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입니다. “ 서로 마음을 같이하라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같은 것들을 생각하고 서로 간에 마음을 합하고 감정과 관심과 또 관심의 대상에 있어서 연합되는 것을 뜻합니다. “ 너희 중에 그 어떠한 불화도 있지 못하게 하라 자신에 관해서 가지는 바로 그 견해를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처럼 다른 사람들을 대우하라는 의미입니다. 이 구절은 마음(MIND)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들은 공동의 마음을 가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서 모든 일에 함께 동의해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에 관해서 하나 됨을 견지해야한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정확하게 설명해주는 본문이 이것입니다. 고전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모두가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바울 사도는 삶의 방식과 행실에 있어서 그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마음으로 같은 것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분쟁이나 분열 같은 것이 없도록 오직 연합만 존재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이것이 중요합니다. 11:20“ 옳도다 그들은 믿지 아니하므로 꺾이고 너는 믿으므로 섰느니라 높은 마음을 품지 말고 도리어 두려워하라 정확히 같은 요지의 말씀입니다. 바울 사도가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라고 한 의도는 교만이나 오만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중요한 뜻은 높은 소원, 야심을 가리키고 있다고 봅니다. 131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 품에 있음 같게 하였더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이스라엘아 지금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바랄지어다. ” 높은데 마음을 두는 것의 위험성을 아는 사람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얼마나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따라가지 않음으로 얼마나 큰 피해를 불러왔습니까? 세상적인 교만을 회개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교회의 역사 속에서 저주 거리가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자신의 권위를 내세웠기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가져왔습니까? 고전 8장은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전 8:1“ 우상의 제물에 대하여는 우리가 다 지식이 있는 줄을 아나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고린도 교회에는 다른 교회보다 먼저 믿어 강한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우상에게 드려진 고기의 문제에 관해서 이해를 한 사람들입니다. 우상에게 드려진 음식도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으면 아무 상관이 없다고 이해하고 거리 낌 없이 그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러나 어떤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지식이 부족하니 이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고 우상에게 드려진 제물을 먹지 안 했습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들은 이 약한 믿음의 형제들의 모습을 보고 무시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이러한 갈등의 문제로 교회가 큰 어려움에 빠졌습니다. 바울은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만한 자세를 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더 안다고 거만하게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부정적인 형식의 권면입니다.

 

4. 대단원

이어 바울은 적극적으로 말합니다.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의역하면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오히려 낮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끌리게 하라 라는 뜻입니다. 지성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구도 지성 주의자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신의 학식이나 이해 때문에 자신이 흐뭇하게 되는 것은 높은데 마음을 두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것은 안 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지식을 뽐내게 되는 필연적인 결과는 고전 8:1절에서 보았듯이 자신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 멸시합니다. 사도는 자신이 비천한 사람들과 사물에게 끌려 다니도록 허락하라 ””라고 말합니다. 물론 비굴함의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사람들을 도와줌으로써 그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섞이는 방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나쁩니다. 바울이 뜻하는 바는 그들과 함께 하나가 돼라는 것입니다. 비천한 것들과 비천한 사람들과 어울리면서도 죄를 짓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여기서 세상이 본받을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이 조건으로 사람을 인도하실 수 있습니다. 다윗 왕을 보십시오. 84: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그는 높은데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전 3:18“ 아무도 자신을 속이지 말라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어리석은 자가 돼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 야고보 사도도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지위가 높든지 낮든지 간에 세상이 뭐라고 하던 오직 한가지만이 문제가 됩니다. 이 사람이 진정 거듭난 그리스도인가? 이 사람이 믿음에 있어 부유한가? 이들은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러하다면 나도 그들에게 속하고 싶다. 나는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 주님께서도 죄인들과 함께 앉으셨고 그들과 함께 잡수셨습니다. 거기에는 아주 자연스런 교제가 있었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본성에 합당한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수건을 드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었습니다. 그런 다음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복음의 가장 위대한 시금석 중의 하나는 이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11:15“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우리는 이 권면을 들어야 합니다.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비천한 것들과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라 교회 안에서 사회적인 신분 때문에 서로 구분 지어진 것처럼 모순된 것은 없습니다. 교회 지도자를 교회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런 것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롬 12;16절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신앙에 엄청나게 해를 끼쳤습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보다 아래에 있다는 느낌을 주는 것은 기독교 신앙을 파괴하는 것이고 복음을 부정하는 일입니다. 교회가 보통 사람들과는 거리가 먼 제도라는 인상을 주는 것보다 복음을 해롭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 생활에 교만이 들어오면 그보다 더 비참한 일은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다 허락하지 않고 빈부귀천을 따지고 차별하는 것보다 복음을 해롭게 하는 것은 없습니다. 교회에서 관심을 가져야 할 유일한 것은 저 분이 하나님의 자녀들인가라는 질문입니다. 저분이 영적으로 생각하는 분인가? 저 사람이 부자냐 가난 하냐 유식하냐 무식하냐 라는 관심의 대상이 될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서는 모든 판단 기준이 영적이어야 하지 육적이면 안 됩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속에 영적 생명이 있느냐 거듭난 신자인가? 우리는 다윗처럼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곧 그리스도를 알거나 사랑하거나 존귀하게 하는 일이 전혀 없는 소위 높은 차원의 분류들 속에서 활동하느니 하나님의 교회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처하여 남은 생애를 보내는 것이 좋다고 말해야 합니다. “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하지 말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