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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바른 국가관(수정본)

wordlove 2021. 4. 2. 05:40

1. 본문: 13:1-7

2. 명제: 그리스도인은 바른 국가관을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원리들이 있다.

3. 제목: 그리스도인의 바른 국가관

 

13장 성경 중에 독특한 장입니다. 그것은 국가와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직면하는 여러 난제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국가에 대한 그리스도인인의 태도와 관계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그리스도인은 바른 국가관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른 국가관을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원리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국가관을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원리는 무엇입니까?

 

첫째는 양극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은 항상 현상을 유지하는 데 관심을 기울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은 언제나 특권층의 편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 관점이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AD 325년 로마 황제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제국을 기독교회 속으로 들이려 결심했습니다. 이 이후 교회는 왕들과 황제들의 친구가 되었으며 귀족들의 친구가 되었습니다. 또한 정부에 대한 귀족주의적 관점으로 해석하는 경향을 취하게 되었습니다. 중세 카톨릭이 이 견해를 취하고 있습니다. 오늘 날에도 이런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백성들에게 자기들이 받은 몫으로 만족하고 있으라고 강권합니다. 모든 백성들은 계속 현재 있는 자리를 고수하고 자기들의 지위를 바꾸려고 추구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마탕한 의무라고 주장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주장은 흑인에 대한 태도에서 여실히 드러났습니다. 흑인들은 종이 되도록 지음 받았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흑인 노예제도를 옹호했습니다. 잘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견해를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잘못입니다. 성경은 정부는 위에 있는 권세 임을 지적합니다. 그 권세들의 기능이 법과 질서를 지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형태의 정부를 지정하거나 세우지 않으셨습니다. 또 어떤 직무를 위한 특별한 계층이 고수하도록 정하지도 않으셨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극단은 무정부 또는 제멋대로의 민주주의 사상입니다. 이들은 자유를 획득하여 일종의 무정부 상태를 옹호하고 있습니다. 법도 질서도 아무 것도 없는 세상을 찾았습니다. 이 두 사상이 다 잘못되었습니다. 사도는 이 두 사상을 옹호하지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가에 복종해야 하고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해야 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항상 화평을 쫓는 시민이 되어야 합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은 항상 나라에서 가장 훌륭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 점은 그리스도인과 불신자 사이에 큰 차이점입니다. 불신자들은 법을 지키는 이유가 형벌의 위협 때문입니다. ”노를 인하여 그들은 일반적으로 노가 두려워서 굴복하는 것입니다. 두려움 외에 그 어떤 것도 사람들로 하여금 법을 지키도록 만들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노를 인하여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할 것입니다. “국가의 진정한 필요를 아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무엇인지를 알고 그리스도인들은 죄가 개인적으로 집단적으로 어떤 세력을 갖고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죄가 개인과 집단을 어느 지점까지 몰고 가는지도 압니다. 개인은 선하나 집단 즉 나라는 마치 미치광이로 쉽게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 일본 제국주의 히틀러 시대 의 독일을 통해서 우리는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모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죄와 그 결과들을 통제할 필요성을 다른 누구보다도 더 분명하게 압니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항상 법과 질서 편에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은 인본주의 자들은 인간에게 죄가 있다는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래서 죄를 통제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이들은 법을 반대하는 편에 섭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법과 통제와 질서의 필요성을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께서 인생을 유지시키기 위해서 이러한 조건들을 마련하셨음을 알고 있습니다. 만일 법과 경찰과 질서가 없는 세상이 관연 어떻게 되어 갈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징계와 형벌의 필요성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법에 복종해야 합니다. 물론 여기에는 어떤 조건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만일 국가가 나와 하나님 사이에 들어와서 간섭을 하게 되면 그 국가에 복종할 필요가 없습니다. 4장에서 이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베드로와 요한 사도가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낫게 해주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습니다.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당국자들의 금지 명령을 들었지만 다시 복음을 전하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도들은 이렇게 대꾸합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언뜻 보면 이 경우는 롬 13장의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라는 말과 부합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들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뜻을 이행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 뜻을 저버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이행하는 것을 금했습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 우리가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로마 황제를 신격화하여 숭배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들은 가이사가 주 라고 말했습니다. 이런 경우 마땅히 이렇게 그리스도인들은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주가 되심을 알고 있으니 어느 사람에게도 예배드릴 수 없소 초대 교회는 둘 중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습니다. 로마 황제 가이사를 주라고 말하든지 죽을 각오를 하든지 바로 이 점 때문에 그들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불복했고 복종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 불복종의 결과로 큰 고통을 감수할 각오를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해야 하되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명령들에 순종하지 못하게 가기 이전까지는 복종해야 합니다. 국가는 내 양심에 대하여 폭군적인 반응을 보여서는 결코 안 됩니다. 내 양심이 나더러 지금 내가 하나님과 가진 관계에 금가게 하는 어떤 일을 하도록 유혹당하고 있다 ””라고 말해 줄 때 나는 그 양심의 소리를 청종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큰 원리에 입각해서 행해야 합니다. 만일 국가가 복음을 설교하지 못하게 막을 때 그 말을 들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 베드로가 복음을 전했기에 감옥에 던짐을 당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기적적으로 옥에서 풀려났습니다. 그들이 무엇을 했습니까? 그들은 즉시 복음을 다시 전했습니다. 그들은 법을 고의적으로 불복했습니다. 그들은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한다 ””라고 말했습니다. 종교 개혁가들과 청교도인들은 복음을 전했다는 죄목으로 자주 체포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복음을 계속 전했고 국가가 뭐라던 계속 진리를 전했고 이렇게 해야 마땅하다고 믿었습니다. 이것이 정말 놀라운 양심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무정부주의를 경계해야 합니다. 1640년대 영국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모반과 혁명으로 제임스 왕을 처형했습니다. 이들은 내 생각이 옳다 하는 바대로 행하라 ””라고 주장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양심에 복종한다고 하면서 계속 그런 식으로 나아가면 그 사람은 양심의 자유를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방종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거기서 질서 있는 사회와 무법천지 사회의 차이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왕정은 복구되고 더 무서운 전제군주의 체제가 도래한 것입니다. 보편적으로 사람이 양심에 따라 복종해야 하는 것이 옳지만 그러나 국가의 법을 염두 해 두지 않고 모든 면에서 그런 식으로 말해서는 안 됩니다. 결국 모든 사람은 사회에서 살아야 합니다. 우리 위에 권세가 있다는 사실 하나님께서 국가들을 제정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공동체 안에서 삶을 영위하도록 지음을 받았음을 시사합니다.. 여러분은 동떨어진 존재로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소원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양심의 자유에 어떤 한계를 두지 않으면 공동체의 삶은 아주 불가능합니다. 누구나 나는 내 생각하기에 옳다는 것을 행하려 할 뿐이다 ””라고 말한다면 살아가는 것이 전혀 불가능하게 될 것임을 여러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기억해야 할 큰 원리는 국가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들이 누구든지 또한 어떤 사람들이든지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국가관을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원리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원리는 우리는 국가와 법의 보호를 받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국가에 대하여 어떤 상관도 하지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비 성경적입니다. 16:19-40절까지 말씀에서 바울 사도는 자신은 로마 시민권을 가졌음을 당당하게 권리 주장을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는 매우 부당하게 대우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감옥에서 나는 로마 시민권자야 나를 부당하게 대우한 책임자가 친히 와서 나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바울이 로마 시민권자임을 안 그들은 신속하게 왔습니다. 바울은 그런 행동을 취함으로써 빌립보의 행정관들을 견책하면서 그들이 법을 이행하도록 세움 받은 자들임을 상기시켰고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을 부여 주었습니다. 그는 재판을 받다가 만족하지 못하자 25:11“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죽을죄를 지었으면 죽기를 사양하지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아무도 나를 그들에게 내줄 수 없나이다 내가 가이사께 상소 하노라 한 대 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최고 법정에 나아가기를 원했고 로마 시민으로서 그렇게 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정부와 국가와 법과 질서에 대한 성경적인 관점은 우리로 하여금 법을 사용하는 것은 옳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항상 심각한 불의를 그대로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법을 발동할 권리를 가지고 있고 그 법의 이행을 주장할 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국가관을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원리는 무엇입니까?

 

셋째는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형태의 국가를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양극단을 경계해야 합니다. 극단주의적 태도가 교회에 큰 피해를 주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권세들 편에 너무 붙어 있다는 인상을 주었습니다. 어떤 정부체제를 옹호라는 데 충성을 다하는 그리스도인을 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어떤 형태의 국가라도 자랑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은 매우 비성경적인 태도입니다. 또 다른 극단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민주주의마저도 자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국가에 대해 미치광이처럼 충성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민주주의를 미칠 정도로 신봉하는 것도 그릇되고 비성경적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국가관을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원리는 무엇입니까?

 

네 번째 원리는 그리스도인은 국가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은 국가에 대하여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하여 너무 흥분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투표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정당에 대하여 흥분하거나 열을 올리지 말아야 합니다. 1789년 프랑스 혁명 뒤에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루이 14세를 단두대에서 처형한 후 사람들이 미쳐 날뛰었습니다. 자유다! 이제 평등이다! 혁명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처럼 진행되었습니다. 수많은 정적들의 목을 단두대에 올려 날렸습니다. 피의 바다를 이루었습니다. 그 혼란을 틈타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일으켜 왕정이 다시 복구되었습니다. 정치적인 혁명이 결코 모든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다. 어떤 정치가들은 법을 통해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국가는 그런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국가의 임무가 소극적이기 때문에 국가로부터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국가의 중요한 기능은 악을 통제하고 제한시키고 그 나타남을 막는 것입니다. 어떤 형태의 정부라도 적극적인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는 매우 약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국가야 말로 그런 적극적인 선을 행할 수 있다고 믿을 때 고통 속으로 들어가는 셈입니다. 그리스도인의 바른 국가관을 가지기 위해서 알아야 할 원리는 무엇입니까?

 

마지막 원리는 여러분의 국가관이 어떠하든 그것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비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국가관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끼어들어 금이 가게 하면 여러분은 거짓되고 그릇된 입장에 서 있는 것입니다. 부끄러운 일은 그리스도인이 정치 문제로 서로 다투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에 이런 불일치가 나타나는 것은 국가가 성취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거짓된 관점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인 중 그 어는 누구도 그렇게 열을 내지 않을 것입니다. 정치적으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 말도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도 있습니다. 이것은 롬 13장의 말씀을 잘못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이 정당에 가입하는 일도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가진 정치적인 관점 때문에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교제를 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국가에 대하여 가지는 관계는 잠시 뿐입니다. 우리의 지위는 이것입니다. 3:20“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가 국가에 대하여 무관심해야 한다는 태도는 잘못되었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지위는 하늘에 속한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습니다. 이점을 놓치지 말아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그네로 순례자로서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과 불신자와의 차이입니다. 불신자들은 이 땅에 살고 오직 이 세상만 있습니다. 그들은 국가에 대하여 흥분되어 있습니다. 국가가 기이한 일을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결국 그들은 거짓된 낙관주의에 충만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결코 그런 자리에 들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말합니다. “ 내가 구원 받은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나는 언젠가 지상에 눈에 보이게 나타날 그 나라에 속에 있다. 바로 지금도 나는 그 나라에 속에 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위에 있는 권세들을 세우셨다. 그래서 모든 백성들 중 한 사람인 나도 그들의 존재를 인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최선을 다해서 세상과 그 세상 속에서의 삶을 어떤 한계 내에 지키려고 애를 써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에 애착을 가지지 말아야 함을 거듭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이 개혁되고 놀랍게 온전하게 될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님의 재림을 통해 이 땅에 나타날 것을 믿습니다. 그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국가에 대해 가진 관계는 어떤 의미에서 초연한 것입니다. 우리는 국가 안에 존재하고 국가의 법을 지킵니다. 또 국가의 좋은 시민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항상 초연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리스도인은 국가 속에 들어가 길을 잃거나 국가 때문에 흥분하거나 다른 사람과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들은 궁극적으로 하늘나라 시민들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