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롬 14:13-15
2. 명제: 중립적인 문제에 대한 바울의 확신은 주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다.
3. 제목: 바울의 확신
1. 갈등
우리가 만나는 중립적인 문제들을 어떤 자세로 접근해야 할까요?? 바울 사도가 자기 의견을 제시하는 방식을 주목합시다. 13절“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 ” 이것은 6절에서 9절까지의 모든 것을 요약하는 표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지난 시간에 서로를 판단할 근거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사도는 눈을 돌려 “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를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라고 말합니다. 사도는 여기서 ‘판단하라’는 말을 가지고 재미있는 표현을 끌어냅니다. “ 그러므로 더 이상 우리는 서로 판단하지 말자 오히려 판단하고 싶으면 이와 같이하라..... ”그런 다음에 바울은 13절 “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바울은 엄숙한 결론에 도달해야 하는데 그것은 서로를 판단치 않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형제자매에게 장애가 되어야 될 어떤 것을 결코 하지 않는다는 원리 위에서 반드시 행동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실질적으로 무엇을 의미합니까? 소극적으로는 다른 형제를 판단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적극적으로는 너희와 의견을 달리하는 다른 그리스도인도 너희의 형제임을 기억하라는 10절을 의미를 다시 반복하여 강조하는 것입니다. 10절“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비판하느냐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바울은 그 다른 형제는 반대편의 지도자도 아니고 경쟁상대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서로 대적하여 싸우는 사람이 아님을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다 같이 형제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적극적인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여러분의 형제에게 거침이 될 만한 어떤 말이나 행동도 하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바울은 이 점을 나타내기 위해서 두 단어를 사용합니다. ’거침돌‘이란 어떤 사람이 가는 길에 바위나 돌멩이 또는 어떤 장애물을 놓는 것을 생각하면서 그 단어를 사용한 것 같습니다. 자기가 가는 길에 돌이 있다는 것을 모른 체 걷다가 그 돌에 차여 넘어질 수도 있는 것입니다. 여기 ’거치는‘이라는 단어가 13절의 ’’ 부딪힐 것“이라는 말과 같습니다. 바울은 부딪칠 것과 거칠 것이라는 두 단어를 사용하여 형제로 하여금 넘어지게 하는 범죄를 저질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칠 것’이라는 표현도 흥미롭습니다. 이 단어는 짐승을 잡기 위해서 사용된 덫이나 올무를 뜻합니다. 그 덫에 어떤 물질을 달고 그것을 다른 것으로 가려 둡니다. 동물이 지나가다가 그 달아 놓은 물질을 발로 건드리면 즉각적으로 덫이 뛰어올라 그 짐승을 포획합니다. 이 개념은 그처럼 ‘덫을 놓거나 함정을 놓아 잡을 기회’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는 단순히 우리 자신의 견해만을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말을 하거나 행동을 하기 전에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이 다른 사람도 우리의 형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사람을 위해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강조점은 줄곳 우리 자신만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생각하는 잘못은 교회에서 치명적입니다. 이런 문제는 로마 교회만 아니라 고린도 교회에도 있었습니다. 여러 교회의 공통된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볼 때 옳은 것만을 생각해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입니다. 자기 형제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약 성경이 가르치는 위대한 호소입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면 세상이 그들이야말로 주님의 사람들임을 알아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 13: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이 점을 교회에서 항상 견지해야 할 원칙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원칙에서 벗어나면 틀림없이 우리의 결정들에 있어서 잘못되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어떤 것을 논의하든지 우리는 형제이므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일부터 해야 합니다. 아무리 다른 의견이 제시될 수 있다 하더라도 특별한 결정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정신입니다. 사도는 형제들이 서로 사랑할 필연성을 부단히 가르칩니다. 요한은 요한 1서에서 이점을 강조합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사도는 우리의 삶 전부를 그리스도께서 주관하신다는 의식의 통제를 받아야 할 뿐 아니라 또한 우리는 서로 간의 관계가 사랑의 관계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바울은 다시 다른 형제를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가진 의견보다 더 중요하다는 가르침입니다. 나의 견해가 옳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형제를 사랑해야 함을 잊고 있다면 그 바른 견해가 심각한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될 수 있습니다.
2. 갈등 심화
이제 바울은 고기를 먹는 문제에 관한 자기 의견을 제시합니다. 14절“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 바울은 한 때 가장 협소한 민족주의자요 바리새인이었으며 일 등급 율법주의자였지만 위대한 복음을 만나고 나서 이렇게 변한 것입니다. “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복음이 이렇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은 거듭남입니다. 바울이 바리새인으로서 다소 사람이었을 때는 결코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실로 그때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울의 말속에서 성령께서만 할 수 있는 일을 보고 있습니다. 바울의 말은 우리 그리스도인이 만나는 중립적인 문제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 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도는 “ 내가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무엇보다 먼저 바울은 우리에게 자기의 절대적인 확신을 인상 깊게 새겨 주고자 애쓰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 내가 ....알고 ”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적극적인 지식을 뜻합니다. 그는 “ 나의 의견을 이러하다 ”라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 내가 확신한다. ”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 나는 안다. 그리고 확신한다. ”롬 8장에서도 이런 확신의 말을 합니다.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내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확신하게 되었을까요? 복음의 여러 요점들을 생각함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해서 사도는 단순히 하나의 선입견을 표현하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것은 하나의 직관도 아닙니다. 임시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는 것도 아닙니다. 할 수 있는 한 절대적인 방식으로 자기의 의견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복음이 그를 설득했던 것입니다. 복음이 그런 확신을 가지게 만든 것입니다. 바울은 내 의견이 이렇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복음이 나를 이렇게 생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특징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특징이어야 합니다. 그다음 우리는 “ 주 예수 안에서 ”주 예수로 말미암아 라고 번역해도 가능합니다. 바울은 이성적으로 천재적인 두뇌를 가진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천부적인 자신의 두뇌의 능력을 의지하여 말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그는 항상 ‘스스로 생각했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의 결론에 도달하는 방식입니다. 과거 행 26:9“ 나도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행하여야 될 줄 스스로 생각하고 ”그러나 이제는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새로운 생각의 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생각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아래서’ 생각합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와 통제를 받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본성에 따라서 생각의 논리를 따라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관계로부터 나온 신령한 조명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께서 그 안에 계시고 성령께서 그를 주님의 말씀으로 인도하십니다. 복음 전체가 그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바울은 자기가 받은 것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성령의 조명의 결과로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롬 14장에서 우리는 바로 그런 점을 보고 있습니다. 사도의 강조점은 고기를 먹는 것에 대한 자기 견해는 성령을 통해 주께서 깨우쳐 주심으로써 확신케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3. 전환
그래서 우리는 여기서 매우 권위 있는 진술을 만나고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 그 자체로 깨끗지 않는 것은 없다 ””라고 말합니다. ” 만물이 다 정하되 “같은 의미입니다. 바울은 다시 이 교훈을 줍니다. 이것이 이 문제에 대한 바울의 판단입니다. ‘속된”이라는 말의 의미는 흥미롭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보통 사용하는 의미에서 속되다는 것은 나타내는 말은 아닙니다. 그 말은 먼지가 끼고 진흙이 묻은 어떤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거룩하지 못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거룩한 것의 반대 개념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유대인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모세를 통해 주어진 유대인 의식법 안에 식물로 사용하도록 허용된 짐승이 구분되어 있습니다. 어떤 짐승은 ’깨끗한‘ 짐승입니다. 그래서 깨끗지 못한 부정한 짐승들에 대해서는 손대서는 안 되었습니다. 음식뿐만 아니라 성구에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일에 쓰인 것은 무엇이든지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성전에 있는 거룩한 그릇처럼 말입니다. 모세를 통해서 율법이 주어진 바로 그 산을 가리켜 거룩한 산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곳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처럼 거룩한 것과 거룩하지 못한 것 사이에 구분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속된‘’ 속된 ‘이라는 용어는 바로 그러한 의미로 사용된 것입니다. 거룩하지 못한 것들을 가리켜 ’보통‘’ 보통‘의 것들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여기 쓰이는 단어들은 일차적으로 의식적인 단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더 이상 보통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특별한 것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된 유대인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유대인 베드로가 로마 군인 백 부장 고넬로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건 속에 그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행 10장을 보면 베드로는 유대인이 아닌 사람의 ’속된‘ 집에 들어가는 것을 꺼려했습니다. 유대인으로서 유대인에게만 복음을 전하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서 이방인 고넬로 집에 복음을 전하라는 깨우침을 주는 환상을 보게 됩니다. 행 10;9-15절에. 그리고 베드로는 뒤에 가서 설명합니다. 행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베드로가 넘어진 것은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것을 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막 7장에서 분명하게 가르쳤습니다. 막 7:1-2“ 막 7:1 바리새인들과 또 서기관 중 몇이 예루살렘에서 와서 예수께 모여들었다가 막 7:2 그의 제자 중 몇 사람이 부정한 손 곧 씻지 아니한 손으로 떡 먹는 것을 보았더라. ”여기 ’부정한‘’ 부정한 ‘이라는 말이 롬 14장의 ’깨끗지 아니한 ‘이라는‘ 말과 똑같은 뜻입니다. 사람들은 주님께서 율법을 어기고 계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당신이 뜻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해 주셨습니다. 막 7:15“ 무엇이든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은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되 ”베드로의 의구심에 대하여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행 10: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이러한 의식 법을 변화시킨 사건이 예수님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너는 유대인 차원에서 더 이상 생각하는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고전 10;26“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에도 그러합니다. 그 자체로 깨끗지 못하거나 속된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디도에게도 반복해서 가르칩니다. 딛 1;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하나님께서 구분을 하신 것은 당신의 백성을 훈련시키고 다루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한 것은 그 돼지고기에 그릇된 것이 있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그 돼지고기를 먹지 못하게 해야겠다고 정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의 재판장이시며 주로서 우리에게 어떠한 일을 하지 말라고 명령하실 완벽한 권한을 갖고 계십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어째서 특정한 나무의 실과를 먹어서는 안 된다고 명령을 받은 것입니까? 그것은 실과 그 자체 속에 있는 어떤 나쁜 것 때문이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시험하기 위해서 그 명령을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검증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금지된 것들 그 자체 속에 깨끗지 못한 무엇이 있기 때문에 금지된 것이 아님을 알고 있었어야 합니다. 레위기에 나오는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 사이의 구분을 보십시오, 오늘날에는 이 모든 것을 먹습니다. 어째서입니까? 주님을 통한 위대한 사도의 이 가르침 때문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인들은 모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의식 법에 더 이상 매여 있지 않습니다. 이 모든 것은 이제 복음을 통해 다 종식되었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어떤 일을 하지 않으려 할 때 그 일 자체가 악하고 그르다는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몸을 악하다고 생각합니다. 성을 더럽다고 생각합니다. 그릇된 생각입니다. 인간의 몸이 악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있게 하신 것입니다. 성이란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 자체로 그릇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셨습니다. 만일 몸에 성을 본래 악한 것으로 기각시켜 버리면 우리 자신이 악한 사람이 되고 이단의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단지 남용하면 문제가 됩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자신이 술을 먹지 않는다고 해서 술 자체가 나쁘기 때문이라고 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은 시 104:15”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는 포도주와 사람의 얼굴을 윤택하게 하는 기름과 사람의 마음을 힘 있게 하는 양식을 주셨도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그러니 포도주 자체가 악하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남용하면 큰 문제를 일으킵니다.
4. 대단원
여기서 바울은 아무것도 깨끗지 아니한 것은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절대적인 확실성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는 아무것도 그 자체로 깨끗지 못한 것이 없다는 것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확신합니다. 그러니 우상에게 제사드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이 주신 고기로 믿고 감 사하면서 먹은 더 강한 형제가 사실상 옳습니다. 그러나 그가 옳으니 그 지식을 반드시 실천에 옮길 수 있다는 논리가 필연적으로 성립되는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