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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의 궁극적 견인의 정당성

wordlove 2021. 5. 5. 07:54

1, 본문: 14: 14-16

2. 명제: 구원은 사람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다.

3. 제목: 성도의 궁극적 견인의 정당성

 

1. 갈등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양심의 중요성을 가르쳤습니다. 양심은 오류와 거짓된 영성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는 큰 안전책입니다. 초대교회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과 관련해서 양심의 중요성을 잊음으로써 믿음에 파선한 자들이 있었다고 말씀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첫 번째 과제입니다. 그다음에 우리의 생각을 집중해야 할 것은 성도의 궁극적 견인의 문제입니다. 다른 말로 성도가 구원의 은혜에서 떨어질 가능성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15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 만약 우리가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 보면 예를 들어 비본질적인 문제들 즉 우상에게 고기를 먹는 문제와 같이 우리의 태도가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끝내 멸망당하게 할 수 있는 식으로 말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자 즉 거듭난 자가 망하게 되어 끝내 구원에서 떨어지는 일이 있을 수 있는가? 초대교회에 유대인 교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5: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이 말씀을 신자들의 궁극적인 멸망과 관련하여 인용하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 뜻하는 바를 매우 심각하게 오해한 결과입니다. 너희가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라는 말의 더 나은 번역은 너희가 은혜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로다 입니다. 사도는 유대주의자들이 믿음의 입장을 포기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복음은 어느 사람도 공로 즉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 함을 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십자가 공로를 믿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은혜 안에 있었던 어떤 사람이 그 은혜에서 떨어져 나갈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 생각대로 하면 너희는 은혜의 입장 은혜의 교훈으로부터 멀리 떨어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이러한 행위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자가 되어 전적으로 주님만 신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규율 중 몇 가지를 첨가하고 그것들을 중요한 진수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면 더 이상 은혜에 대하여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너희는 공로 아래 율법 아래에 있는 셈이라는 것입니다. 6장에도 언듯 어렵게 보이는 구절이 있습니다. 6:4-6“ 6:4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히히 6:5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히히 6:6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것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히브리서는 외식 적인 입장을 다루고 있음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내세의 능력을체험하고도 거듭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특히 부흥의 시기에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납니다. 부흥의 시기에 이들은 교회에 입교를 합니다.. 그들은 한동안 참되고 진실한 그리스도인들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들이 성령의 일시적인 감화만을 체험하고 있었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으로 되돌아갔고 그들의 삶 속에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었다는 적이 없었음을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진리를 완전히 부인했기 때문입니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할 때 어떤 수의 사람들이 말하자면 그 흐름에 이끌린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한동안 차이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것이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그래서 저는 성령에 의해서 나온 경험을 겪어도 거듭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6장 어디에서도 이 사람들이 실제 적으로 거듭났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이처럼 성경에서 언뜻 모순되게 보이는 대목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합니까? 대답은 항상 성경은 스스로 모순을 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모두 다 성령께 속한 것입니다. 언뜻 보기에 서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을 조화시키는 것이 우리의 몫입니다. 어떻게 그 일을 해야 할까요? 중요한 원칙은 그러한 어려운 문제를 만날 때마다 항상 확실한 것 크고 분명한 것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곧 성경 전체의 압도적인 가르침을 먼저 붙들고 따라야 합니다. 어떤 특별한 가르침도 그것과 결코 충돌해서는 안 됩니다.

 

2. 갈등 심화

그러니 롬 14장에서 난제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요? 우리는 롬 8장으로 돌아가 합니다. 29-30 “9-30“ 롬 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롬롬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행하셨습니다. 여기 동사 시제들이 미래가 아니라 부정 과거형입니다. 헬라어의 부정 과거형은 이미 끝나 버린 뒤로 돌이킬 수 없는 동작을 지시하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에 있어서 이 일은 이미 일어나 버렸습니다. 그런 다음 사도는 31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오구원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사도는 그 마지막 구절에서 엄청난 결론에 이릅니다. 38-39“ 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롬 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이것이 성도의 궁극적인 견인의 교리에 대한 진술입니다. 이 교리는 하나님의 뜻으로 부르심은 입은 자 모든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영광에 이르게 되리라는 절대적 확신을 가르칩니다. 주님께서도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어떠한 하나님의 자녀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되는 일이 결코 있을 수 없음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백성들 중 어떤 이의 영원한 멸망에 대해 책임이 있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중요한 이유는 한 영혼의 궁극적 운명은 여러분이나 제 손에 있을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가르친다면 인간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크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러한 큰 행사를 당신의 아들 안에서 취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죄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는 일을 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식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사람들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릴 힘을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우리는 모두 죄에 빠집니다. 또 우리는 실수할 경향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구원이 결국 우리 손에 달려있다면 구원받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라는 유일한 결론에 도달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런 입장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진정한 입장은 오 그 사랑이 나를 떠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궁극적으로 떨어져 나가는 일이 가능하다면 결국 마귀가 하나님을 물리치고 승리자가 된다는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 성경의 위대한 메시지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셨고 사람을 자기의 형상대로 만드셨으나 마귀가 와서 사람을 유혹하였고 사람이 그 마귀의 말을 듣고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모든 고통은 그로부터 야기된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끝내 멸망하는 일이 가능하면 마귀가 하나님보다 더 강하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불가능합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가 떨어져 나가는 일이 가능하다면 어느 날 어떤 사람이 거듭났다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일 때문에 실족하여 넘어지고 이러한 오류로 말미암아 원상태로 돌아가고 하는 일이 계속된다는 뜻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일은 전혀 불가능합니다. 거듭남이란 사람의 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행사입니다. 거듭남이란 하나님의 행사입니다. 우리가 거듭남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거기서 나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3. 전환

물론 이 시점에서 낙심의 교리는 중요합니다. 낙심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불순종할 때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 가족 내의 자녀들이 육신의 부모들에게 불순종하여 가족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어떤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또 한 그 가문의 이름을 더럽힐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이 자신들의 하늘 아버지께 불 순종할 수 있고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이 아니거나 결코 그리스도인이 된 적이 없었다는 식으로 평가될 만큼 행동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그러면 목사님은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어떻게 아십니까? “라고 물으면 대답은 낙심한 사람들은 항상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멀리 벗어나도 결국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또한 그러면서도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끝내 구원에서 떨어질 수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신 이유를 오해한 까닭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고 사람에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기의 운명을 결정할 권한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러면 첫 번째 창조와 새로운 창조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아담과 새 사람 그리스도 예수 안의 새로운 피조물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5장에서 대표로서 아담과 대표로서의 주 예수 그리스도 사이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고전 15: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아담은 넘어질 수 있었고 넘어졌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우리 인간의 대표로서 넘어질 수 있었고 넘어졌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책임을 함께 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안에서 행하신 일은 완전히 다릅니다. 넘어질 수 없는 것이 그 안에 있습니다. 바로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입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실패했습니다. 아담은 완전한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넘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선 두 번째 실패의 모험을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고 그 아들은 인성을 취하셨습니다. 여기에 새로운 인류의 머리가 계십니다. 여기에 실패할 수도 없고 실패하지도 않은 어떤 것이 존재합니다. 4:16”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 바울이 말하는 바를 아시겠습니까? 그는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아 내려는 시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과 대조를 이룹니다. 그리고 지금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이 은혜에 속하고 하나님께만 속한 것을 그것이 굳게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사람이 조금이라도 개입하면 구원은 실패할 것이고 그 구원은 굳게 되지 못할 것이고 불확실한 것이 되고 끝내 재난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구원을 그런 방식으로 그의 아들 안에서 이루신 것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니 그 구원이 떨어질 수도 없고 떨어지지도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약속이 모든 후손에게 확실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궁극적으로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여러분 자신을 신뢰하지 마십시오. 영광중에 이르게 될 때 내가 여기에 있는 것은 내가 끝까지 지탱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한 영혼의 영원한 운명이 그 사람 자신이나 우리 중의 누군가에게 달려 있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으며 그런 일은 불가능함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그래서 롬 14장 고전 8장 히 6, 10장의 진술들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이러한 증거들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을 보존하시고 그들을 망할 운명에 빠지지 못하도록 지켜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채용하시는 방식이 바로 그것입니다.

 

4. 대단원

여기서 우리가 생각하는 또 다른 문제는 그렇다면 15절의 가르침이 약한 형제로 하여금 폭군이 되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사람을 더 약한 형제의 수준으로 하향 평준화시키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이러한 의문에 대하여 무슨 대답을 해야 할까요? 그 답은 첫째 우리는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는 것이 아니고 중립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러한 문제들은 구원의 본질을 다루는 문제들이 아닙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문제들을 본질로 만드는 오류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답은 더 약한 형제들도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배워야 합니다. 그는 은혜 안에서뿐만 아니라 지식 안에서도 자라야 합니다. 그 연약한 형제는 성경을 더 배워야 했습니다. 만일 믿음이 약한 형제가 배우기를 거부하면서 자기는 그런 일에 관심 없다고 말하며 청종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자기 양심에 따라서 행동하지 않은 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 그의 문제는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는 잘못을 범하고 있으며 가르치기 어려운 사람이 되었다는데 있습니다. 이런 문제에 대한 바울의 원칙은 바울의 말 고전 9:22오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어떤 이들은 이런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서 우리는 그들의 수준으로 내려가야 한다. 우리는 그들이 하는 일을 해야 한다 고 말합니다. 이런 태도를 가진 한 예가 있습니다. 우두 바인 월리라는 1차 대전 당시의 군목이었습니다. 그는 참호 속에서 군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는 참호 속에서 병사들은 우두 바인이라는 값싼 담배를 피우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 군인들을 얻기 위해서 그도 값싼 우두 바인 담배를 피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병사들은 온갖 추한 말과 욕설을 사용하는 것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그들의 언어 같은 담배를 피우고 술도 마시고 욕도 하고 그 사람들과 같이 되어서 그 사람을 얻어리라. “고 결심했습니다. 물론 월리 목사는 그런 식으로 한 사람도 얻지 못한다는 것을 금방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어리석은 행동이었고 그 일은 가치 없는 일이었습니다. ” 모든 사람에게 모든 모양이 된다. “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행하는 악한 일들 따라 행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말합니다. 우리 주님은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였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결코 죄를 짓지 않았습니다. 죄인들과 섞여 있으면서도 결코 자신을 더럽히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닌 중립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큰 원리는 곧 모든 일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원리입니다. 고전 10: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마음에 상처를 주지 않고 조심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최고의 소원을 가지십시오. 무엇보다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항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은혜를 허락하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