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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화과 나무 잎

wordlove 2021. 5. 11. 06:00

1. 3:7-9

2. 명제: 인간의 반역과 죄의 결과 무화과나무 잎으로 자신을 감추려고 한다.

3. 무화과 잎

 

창세기 3장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본문임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교회는 철학 단체도 아니고 문화단체도 아닙니다. 교회의 사명은 바로 성경의 메시지를 설명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드리는 모든 예배는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왔고 그가 주신 메시지를 가지고 있다 "라는 주장을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우리가 모이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주신 이 메시지를 살피기 위해서입니다. 이 성경은 이론적인 의문 거리나 흥미 거리를 다루지 않습니다. 성경이 진리를 제시하는 방식은 한결같습니다. 우리의 처지가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각인시킵니다. 전문용어를 빌리자면, 실존적으로 진리를 제시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여러분이 불확실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의 삶 자체가 불확실 하기 때문에 초연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들으라고 호소합니다. 성경은 우리 각 사람의 당면 문제를 다루는 책입니다. 우리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입니다. 창세기 3:9 이 상기시키는 바가 그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각 개인을 직접 부르십니다. 성경의 관심은 우리 자신과 우리의 문제, 우리의 고통과 혼란과 고민, 삶을 힘겹게 만드는 온갖 장애물에 있습니다. 이러한 성경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창세기 3장의 메시지부터 이해해야 합니다. 3장의 메시지야말로 성경 메시지의 토대가 되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전적인 주장은 이것이 실제 역사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이 지경이 된 이유를 설명해 줍니다. 죄에 빠진 인간의 특징이 바로 이 점에 있습니다. 단순히 아담과 하와의 죄를 물려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본인들도 그들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하는 것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모든 영역에서 탈선했는데, 가장 먼저 탈선한 영역이 바로 지적인 영역이었습니다. 마귀의 독단적인 주장에 넘어가 열매를 쳐다보며 어루만지는 순간, 먹고 싶은 마음이 불쑥 올라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들을 위해 해 주신 그 모든 일에도 불구하고 사단이 하나님의 성품과 권세에 대해 떠드는 거짓말을 받아들여 의도적인 반역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마귀의 또 다른 생각도 받아들여 그대로 행동하다가 뿌린 대로 거두게 되었습니다. 인간은 지금도 몇몇 이론이나 독단적인 주장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도전하고 반역하며, 태초에 두 사람이 거쳤던 딱한 과정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의심과 미움을 표출하며, 은혜를 저버리고, 자신들의 이성을 동원하여 신적인 계시를 밀어내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열매가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다는 것을 깨달은 여자는 자신의 지각과 이성을 사용했고, 결국 열매를 따 먹었습니다. 과정은 똑같습니다. 태초에 일어났던 일이 지금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인정하는 대신 심리학을 비롯한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현실을 설명하려 듭니다. 이것이 제가 지적하고 싶은 점입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는데도 귀를 틀어막은 체 자신의 슬픔과 문제와 시련과 환난에 매몰되어 유일한 해방과 구원의 길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죄는 항상 우리를 이런 혼란에 빠뜨립니다. 인간의 반역은 몇 가지 결과를 몰고 왔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을 살펴보면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 지라. 3:6-7절 그 즉시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 인간의 반역과 죄의 행위에 따라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 결과는 그 즉시 상실감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흥미로운 구절입니다. “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 무슨 뜻일까요? 어쨌든 전에 있던 것이 이제는 사라졌음을 바로 알아차렸다는 뜻이 아닌가 합니다. 그들은 어떤 의미에서 자신들이 벗은 것을 알았습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완벽하게 만드신 태초의 인간은 영혼뿐 아니라 그 몸에도 일종의 영광이 있었을 것이라는 주해에 동의합니다. 인간은 영혼만 타락한 것이 아니라 몸도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마지막 때 주님이 다시 오시면 빌 3:21우리의 낮은 몸 부끄러운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인간이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음을 기억합시다. 인간은 영적인 의라는 면에서 온전했을 뿐 아니라 그 몸에도 영광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으면서 그 영광은 사라지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몸만 남았습니다. 그들은 무언가 박탈당했음을 알았습니다. 벗은 느낌, 불완전한 느낌, 상실감이 찾아왔습니다. 무언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영광이 떠나 버렸습니다.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현대의 분석들이 그토록 얄팍하고 미비한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에 이런 불안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합당한 대답은 한 가지뿐입니다. 인간은 원래 더 크고 높은 것을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이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것입니다. 원래 모습에 대한 기억과 추억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 안에 있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완벽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아무 흠이 없었습니다. 의로웠습니다. 몸에도 영광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잃는 바람에 한 번도 경험해보지는 못했지만, 그 기억은 어렴풋이 아른거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 자체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사상은 바로 이 추억, 인간은 원래 더 크고 높은 것을 위해 존재한다는 느낌, 그런데 무언가 박탈당했다는 내적인 느낌을 어떻게든 설명하고자 했던 데서 나온 것입니다. 우리는 완벽해지려 하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무언가를 되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반역과 죄의 행위에 따라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결과는 스스로 그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그래서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만들어 입었습니다. 그들은 " 우리가 잃어버렸다는 걸 어떻게 감출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벗은 것을 가려 보려 했습니다. 3장 후반부는 그 시도가 얼마나 무모한 것이었는지, 그리고 하나님이 친히 준비하신 것은 무엇이었는지 알려줍니다. 그러나 그들은 즉각 자신들의 힘으로 이 상실을 해결하려 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명을 통해 사람들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벗은 몸을 가린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말하는 '문명'의 정확한 의미입니다.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벗은 몸을 가리는지 보십시오. 첫 번째는 문화적인 면에서 노력하는 것입니다. 삶은 수수께끼이자 풀어야 할 문제다. 그래서 다양한 문화 사상에 호소하며, 특히 지식에 호소합니다. 지식을 갈망하며 명철을 갈망합니다. 욥기는 이러한 추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28:18지혜의 값은 산호보다 귀하 다 고 말합니다. 그러니 지혜를 찾고 지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지혜를 찾습니다. “ 인간을 알고 나 자신을 안다면, 내 존재와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고 내가 살고 있는 우주를 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것이 바로 철학이요, 철학이 추구하는 목적 아닙니까? 철학은 잃어버린 것을 찾아 채우려 합니다. 역사 연구, 예술을 사랑하고 음악 등에 몰두하면 어떻게든 다시 온전해지리라 생각하기도 합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잃어버렸습니다. 어떻게 그것을 되찾을까요? 인간을 본질 적으로 경제단위나 사회단위로만 보는 사람들은 정치적인 노력을 기울입니다. 이것이 정치 행위이고 정치철학입니다. 여전히 자신들의 힘으로 의문에 답하려 하며 간극을 메우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해답이 못 됨을 깨달은 것입니다. 특이한 점은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그를 반역하다가 완벽한 상태에서 추락한 인간이 종교까지 동원하여 그 상태로 돌아가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을 구원할 유일한 해답으로 내세우는 것은 신비주의입니다.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영적인 영역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역과 조화를 이루며 그 영향을 따르기만 하면 참으로 행복해질 수 있고 잃어버린 무언가도 되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종교로 귀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 시대에나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은 살아 계신 참 하나님, 유일하신 하나님을 외면한채 스스로 신을 만들었고, 자신들의 종교를 만들었습니다. 자신들이 떠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일만 빼고 모든 것을 시도했습니다.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벗은 몸을 가리는 과정을 쉬지 않고 반복했습니다. 사람들은 기독교를 조롱하면서, 지금까지 그토록 여러 차례 어리석은 것으로 판명된 방법들을 의지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반역과 죄의 행위에 따라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세 번째 결과는 그것은 인간이 죄책감과 두려움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3:8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알다시피 두 사람은 "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라는 마귀의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 들었습니다.. 마귀는 " 겁낼 필요 없어. 머리를 써서 너희 권리만 주장하면 돼. 당당하게 너희 생각을 얘기하라고, 하나도 무서워할 거 없다니까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자 도망쳐 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두려움과 죄책감과 수치심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도 마찬가지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운명의 주인이자 영혼의 선장이라는 말, 더 이상 공포와 두려움에 지배당하지 않는다는 말, 우리의 인생관은 완전히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오늘날 인류의 전적인 비극이 바로 이 모순에 있습니다. 입으로는 무섭지 않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무서워 벌벌 떠는 것입니다. 입으로는 죄도 믿지 않고 하나님도 믿지 않는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정죄 감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마음이 편치 않은 것입니다. 스스로 용감하고 대단한 사람인척 하지만 속으로는 난 비열한 겁쟁이에 멍청이야. 더럽고 추한 짐승이야. 아니 짐승만도 못한 인간이야 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심리학자 즉 무당들을 찾는 이들이 그토록 많은 것입니다. 우리는 양심의 가책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합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과 수치심과 긴장과 압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우리 내면의 현실이요 우리와 관련된 현실입니다. 하나님과 그분께 속한 모든 것을 무시해 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인식하며 심판을 인식하는 감각을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그래도 하나님에 대한 감각이 있기 때문에 속에서 논쟁이 일어나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인식하는 보편적인 감각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아무리 원시적인 부족이나 종족이라도 하나님을 인식하며 심판을 인식하는 감각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인간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현대인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아요 라고 말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그렇다면 왜 그렇게 한사코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피하는 것입니까? 2:15" 인생은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 한다고 말합니다. 아무리 지적인 사람도, 합리적이고 침착하며 냉정하고 차분한 사람도 하나님에 대한 감각과 죄책감, 수치심, 심판에 대한 감각, 죽음과 그 너머에 대한 감각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우리는 계속 살아갑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그 두려움에서 도망칠 수 없습니다. 태초에 일어난 이 일이 그 후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인간의 반역과 죄의 행위에 따라온 결과는 무엇입니까?

 

마지막으로 우리가 여기에서 보는 것은, 죄에 빠진 인간의 말할 수 없는 어리석음입니다. 괴롭고 비참하고 불행한 인간은 하나님을 피해 숨어 버립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이것은 모든 인간의 가장 슬프고도 비극적인 모습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피해 도망치는 것입니다. 그토록 부끄럽고 비참하고 불행하면서도, 바람이 불 때 동산으로 찾아와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피해 도망치는 것입니다. 왜 도망칠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거짓말을 믿었기 때문이고, 하나님을 완전히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반역하고 침을 뱉은 그분이야말로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 기꺼이 구원하고자 하시는 유일한 분임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비극입니다. 인간은 수치와 실패와 극심한 절망에 빠져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을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피해 숨어 버립니다. 유일하게 은혜를 베풀어 주실 분, 유일하게 구원해 주실 분을 피해 도망쳐 버립니다. 이것이 세상의 비극입니다. 죄에 빠진 불행한 인간은 하나님이 알려 주신 방법만 빼고 모든 방법을 시도해 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찾아와 다시 말씀하셨지만, 인간은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겁을 내며 도망쳐 버렸습니다. 이 일은 오늘날도 반복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이 반역했는데도 " 반역은 벌하되 구원과 해방의 길은 열어 주겠다 "라고 말씀하시려고 동산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을 찾아오신 이유였습니다. 책망만 하고 심판만 하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오도하여 넘어뜨린 원수를 정복할 여자의 후손을 보내 주마 약속하려고 오신 것입니다. 제가 전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일 외에 여러분의 필요를 채워 줄 사람이나 일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정말 무엇일까요? 아우구스티누스의 위대한 말로 대답해 보겠습니다. " 주를 위해 우리를 만드셨으니, 주 안에서 쉬기까지 우리 영혼은 쉬지 못하나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을 만족시키십니다.. 여러분을 되찾으십니다. 스스로 해결하려 들지 마십시오. 스스로 구원하려 들지 마십시오. 스스로 죄책감을 떨치려 하지 마십시오. 절대 떨칠 수 없습니다. 양심이 계속 쫓아옵니다. 살았을 때뿐 아니라 죽은 후까지 쫓아옵니다. 지옥에서 영원히 여러분을 괴롭힙니다. 여러분은 양심의 소리를 잠재울 수 없습니다. 실패감을 떨쳐 낼 수 없으며, 죄책감과 수치심을 떨쳐 낼 수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합니다. 나아가서 그가 여러분의 죄책을 담당하셨으며 여러분의 죄 때문에 죽으셨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십자가에서 여러분의 죄를 다 벌하셨기에 값없이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오직 이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갈보리 언덕에서 못 박히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하신 이 일 때문에 그를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진노가 머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값없이 용서했고 모든 죄를 씻었노라고 확언하십니다. 죄책감과 수치심도 씻어 주십니다. 여러분도 스스로 용서받았음을 깨닫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깨닫습니다. 새로운 힘과 능력이 생깁니다. 새로운 지각이 생깁니다. 새로운 통찰력이 생깁니다. 사물이 다르게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 죽음을 바라보는 시각, 심판을 바라보는 시각, 영원을 바라보는 시각, 하나님을 바라보는 시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더 이상 울면서 그를 피해 숨거나 그가 자신을 대적하신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리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며, 다음과 같이 고백하게 됩니다. 여러분을 사랑하여 목숨까지 내놓으신 독생자 안에만 길이 있음을 알려 주십니다. 이제 숨은 곳에서 나오십시오. 하나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분께 달려가십시오. 그 발아래 엎드리십시오. " 제가 믿습니다 "라고 아뢰십시오. 내 모습 그대로 갈등과 의심 많은 모습 그대로 나아갑니다. 저는 다 이해하지 못하지만 다른 것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사오니, , 하나님의 어린양 이시여,, 주께로 제가 갑니다. 이렇게 아뢰면 미소로 영접해 주실 것이며, 그가 영접하셨음을 깨닫게 해 주실 것입니다. 남은 평생 동안 축복하시고, 죽는 순간에도 축복하시며, 죽은 후에도 영광 가운데 맞아 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