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신학/교리사

신학의 역사 네째 시간

wordlove 2009. 10. 28. 09:55

신학의 역사 네 번째 강의 시간(PP285-316)


사례연구 3.2 청의 교리 : 마르틴 루터와 트렌트 공의회

칭의 교리가 종교 개혁에 결정적으로 주요했다는 점은 폭넓은 동의를 얻고 있다.  독일의 대 개혁가 마르틴 루터의 이해와 트렌트 공의회의 이해가 그것이다.  “칭의”라는 말과 “의롭게 하다’라는 동사는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게 되다” 이거나 “하나님 보시기에 옳게 되다”를 의미하게 되었다. 칭의 교리는 구원받기 위해 개인이 해야 할 일에 관한 문제를 다룬다고 간주되었다. 어떻게 죄인이 이러한 희망을 가질 수 있는가? 이 문제는 마르틴 루터 신학의 중핵이었고 종교개혁 초기단계의 대주제가 된다.


마르틴 루터

그가 죽기 전 해인 1545년, 루터는 자신의 저술 완간 판 첫 권의 서문에 당시 교회를 이탈하게 된 동기를 해명했다. 1519년에 이르는 역사적 상황을 개괄한 후 루터는 “하나님의 의” 문제에 관한 자신의 난관에 대해 언급한다. 나는 분명히 로마서에서 바울을 이해하려 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은 겁먹어서가 아니라 로마서 1 :17(“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나타났다”)  때문이었다. “하나님의 의”라는 귀 절을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의"로 하나님은 의롭고, 그래서 불의한 죄인을 벌주신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수사로서 흠 없는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 앞에 나는 불안한 양심을 가진 죄인이라 느꼈다. 내가 내 행동으로 그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믿을 수도 없었다. 죄인을 ·벌한 의로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를 싫어했다. 나는 이 귀 절에서 바울이 의미하는 것을 이해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그 안에(복음에)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기록된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이 어떻게 서로 관련되어 있는지 밤낮 묵상하다가, 나는 “하나님의 의”를, 그로 인해 하나님의 선물(믿음)로 의인이 살아가는 것으로, 또한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다”는 문장을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라고 기록된 것처럼 자비로운 하나님이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하시는 그 수동적인 의를 가리킨다고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사실로 즉시 나는 다시 태어난 듯, 열린 문을 통해 천국에 들어간 듯 느끼게 되었다. 나는 성경의 전체 면모를 새로운 견지에서 보았다. 이전에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구절을 싫어했지만, 이제 나는 그 구절을 사랑하게 되었고, 가장 감미로운 것이라고 격찬하게 되면서 바울 서신의 이 귀 절이 내게는 바로 천국 문이 되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 1486-1546)

원래 루터는 의인(義認)의 전제조건을 의롭다 인정받을 수 있기 전에 죄인이 먼저 해야 할 인간적 업적이라 여겼다. 루터는 “하나님의 의”을 처벌적 의로 해석할 수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어떻게 “새로운”의미를 찾았는지 설명한다. 즉 하나님이 죄인에게 주는 의이다. 달리 말한다면, 죄인들이 의롭게 되려면 필요한 것 하나님이 자애롭게 죄인에게 주어 이 전제 조건을 충족시킨다. 당신이 감옥에 갇혀 있는데 많은 벌금을 내야 풀려난다고 하자. 약속은 실제적이다. 이 전제조건을 충족시키는 한 그 약속은 이뤄진다. 앞에 말했듯이 처음에는 루터도 공감한 것처럼 펠라기우스는 당신이 다른 곳에 쌓아둔 필요한 돈이 있다는 전제조건으로 접근한다. 당신의 자유가 훨씬 더 값지므로 협상 제안을 받는다. 그래서 당신은 벌금을 낸다. 필요한 밑천을 갖고 있는 한 여기에 어려 울게 없다. 루터는 죄 있는 인간에게 이 전제조건을 충족시킬 밑천이 도대체 없다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점점 동의하게 된다. 우리의 유비로 돌아간다면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는 당신이 돈이 없으므로 자유의 약속은 당신의 처지와 거의 관계없다는 가정에서 논리를 전개한다. 그러므로 두 사람 모두에게 복음의 반가운 소식은 당신이 자유를 사들이는 데 필요한 돈을 받았다는 점이다. 즉 그 전제조건이 다른 사람에 의해 당신을 위해 충족되었다는 말이다. 루터가 말하는 것은 기독교 복음의 하나님은 개인 그들의 공로대로 보상하는 무자비한 재판관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선물로 의를 주는 자애로운 하나님이라는 통찰이다. 루터 연구가들은 그의 의 신학이 1515년 어느 시점에 결정적 변화를 겪었다고 대체로 공감한다. 루터의 통찰에 중심이 되는 것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 교리였다. “의롭게 됨” 개념은 이미 친숙하다. 그러나 “믿음으로만은 어떤가? 의롭게 하는 믿음의 성격은 무엇인가? 사람들이 믿음만이 의롭게 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까닭은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면서 루터는 “믿음” 이라는 오해하기 쉬운 단순한 말에 우리가 더욱 집착해야 할 것 권한다. 루터의 믿음에 관한 개념과 관련된 세 가지 점이 그의 의인 교리 특히 중요하다.


I. 첫째, 믿음은 단순한 역사적 지식이 아니다. 루터는 복음이 역사적으로 믿을 만하다고 믿는 데 만족하는 믿음은 의롭게 하는 믿음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죄인들은 복음의 자세한 역사적 내용을 완전히 믿을 능력이 있지만 이 사실 자체는 참된 기독교 신앙을 위해 충분한 것이 아니다. 구원하는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고 구원사역을 우리를 위해 성취했다는 것을 믿고 의탁하는 일과 관계있다. 둘째, 믿음은 “신뢰(fiduda)"라고 이해해야 한다. 신뢰의 개념은 종교개혁 시 믿음에 대한 개념으로 중요하다. 루터는 항상 비유를 하여 “모든 것은 믿음에 달려 있다. 믿음이 없는 이는 바다를 건너야 하지만 하도 놀라서 배를 믿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 그래서 그는 자기가 있는 곳에 그대로 있고 배타고 건너가려 하지 않기 때문에 결코 구원 받지 못 한다”라고 말했다. 믿음은 어떤 것이 옳다고 믿는 것만이 아니라 그 믿음에 따라 행동할 준비가 되어있고 그 믿음에 의존하는 것이다. 루터의 비유를 보면 믿음은 배가 있다고 믿는 것만이 아니라 배에 발을 들여놓고 거기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3. 셋째. 믿음은 신자를 그리스도와 결합시킨다. 루터는 그의 1520년 "기독인의 자유”The Liberty of Christiaη"라는 글에서 이 원리를 천명한다. 믿음은 추상적인 교리 덩어리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신자의 결합이다. 그것은 신자 전인이 하나님에게 응답하는 것이며, 이로써 신자에게 실제로 그리스도가 몸소 임하게 되는 것이다. “이신 칭의(justification by faith)" 교리는 죄인이 믿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면 믿음을 인간의 행위 또는 업적으로 취급하는 셈이 되리라. 루터는 의롭게 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하나님이 제공하셔서 죄인이 할 일이라곤 그걸 받는 것뿐 이라. “믿음을 통해 은총으로 의롭게 됨(justification by grace through faith)”은 이 교리의 뜻을 더 분명히 드러낸다. 죄인이 의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에 근거하고, 믿음을 통해 그것을 받는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하나님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하신다는 증언이다. 믿음 그 자체조차 하나님의 선물이고 인간의 행동이 아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할 전제조건을 충족시킨다. 우리가 보았듯이 “하나님의 의” 는 우리가 의롭게 될 전제조건을 충족시켰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의가 아니라 전제 조건을 충족시키도록 우리에게 준의이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루터 교리의 주요 통찰들 가운데 하나는 각 개인이 자기를 의롭게 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다. 의롭게 하는데 주도권을 진 존재는 하나님이고 그 죄인을 의롭게 하는데 필요한 모든 밑천을 하나님이 제공한다. 이 밑천들 가운데 하나가 “하나님의 의”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점을 일찍이 주목했지만, 루터가 미묘하게 변형함으로써 “법리적 의인(forensic justification)"의 개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 문제는 설명하기 어려운데 핵심은 위상 문제에 놓여있다. 아우구스티누스와 루터 모두, 하나님은 죄 있는 인간을 의롭게 하는 의를 그들에게 자애롭게 준다고 동의한다. 그러나 그 의는 어디에 있는가? 아우구스는 신자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고. 루터는 신자 밖에 그대로 있다고 주장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문제의 의는 내적이고, 루터에게 그것은 외적이다.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하나님이 죄인에게 의가 자신의 일부가 되게끔 의롭게 하는 의를 부여 한다. 그 결과 비록 죄인 밖에서 시작했지만 이 의는 그 인간의 일부가 된다. 루터로서는 그 의는 죄인 밖에 그대로 있어서 “외적 의(iustia aliena)"이다. 하나님은 이 의를 마치 죄인의 일부 인 듯 취급하거나 “여긴다”. 1515-16년 강의에서 루터는 믿음으로 우리에게 전가된(분유된 것이 아님) “그리스도의 외적 의” 개념을 의롭게 하시는 근거로 발전시킨다. 그의 로마서 4:7 주석은 아주 중요한데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성도들은 자신의 눈에는 항상 죄인이어서 외적으로 항상 의롭게 된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자신의 눈에 항상 의로워 외적으로 항상 죄인이다. “내적으로” 라는 말을 쓰는 까닭은 우리가 볼 때에 또한 우리 자신을 평가할 때 우리가 어떤 처지에 있는지를 밝히려 함이요, “외적으로” 란 말은 하나님 앞에, 또한 하나님 생각에 우리가 어떤 모습인가를 지적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또는 우리 공적이 의로워서가 아니라 단시 하나님이 전가하셔서 우리가 의로울 때 외적으로 의롭다.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외적 의 때문에 의롭다. 그 의는 그들에게 전가된다. 즉 믿음을 통해 그것이 마치 자기들 것인 양 취급한다. 기독인들은 “자비로운 하나님의 전가로 의롭다” 루터가 시사하기를 믿음을 통해 신자는 에스겔 16:8에서 하나님이 그의 옷으로 우리 벗은 몸을 덮으시듯이, 그리스도의 의의 옷을 입는다. 루터에게 믿음은 옳은(또는 의로운)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죄와 의는 이처럼 공존한다. 내적으로 우리는 여전히 죄인이나 하나님 보시기에 외적으로 의롭다. 믿음으로 우리 죄를 고백하여 우리는 옳고 의로운 하나님과의 관계에 서있다. 우리 관점으로는 우리가 죄인이나, 하나님 관점으로는 우리가 의롭다. 루터는 신자의 의가 자란다는 점에서 기독교인의 삶이 역동적이라고 완전히 의식했다. 오히려 그의 요점은 죄의 존재가 우리 기독교인으로서의 지위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의로 우리 죄를 막아주신다. 이 의는 우리 죄와 싸울 수 있게 하는 보호 방패와 같다. 이 접근 방식은 신자에게서 죄가 지속되고, 동시에 신자의 점진적 변화와 장래 그 죄를 없애는 것을 설명한다. 그래서 그의 유명한 말 가운데 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simul iustus et peccator)"이라고 선언한다. 소망 속에서 의로우나 실상은 죄인이고,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 약속으로써 의로우나 현실상 죄인이다. 이 생각을 그의 후계자 필립 멜랑히톤이 더 발전시켜 “법리적 의인”이라는 익숙한 교리를 세웠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죄인을 의롭게 하심으로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데 비해 멜랑히톤은 죄인이 의롭다고 간주되거나 판단된다고 가르쳤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의롭게 하는 의”는 분유되며, 멜랑히톤에게는 전가된다. 벨랑히톤은 의롭다 선언당하는 일과 의롭게 됨을 당하는 과정을 분명히 구분하여 전자를 “의인” 이라고 후자를 “성화” 또는 “중생”이라 불렀다. 아우구스티누스로서는 둘 다 같은 대상의 단순히 다른 측면일 뿐이었다. 아우구스티누스 시대 이래 의인은 의롭다고 선언되는 일과 의롭게 되는 과정 모두를 가리킨다고 이해해왔다. 멜랑히톤의 법리적 의인은 이 것과 전혀 견해를 달리했다. 그 후 모든 주요 개혁가들이 이를 받아들여서 그 때부터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의 일반적 차이를 대표하게 되었다.


트렌트공의회(The Council of Trent)

1545년 소집된 트렌트 공의회는 루터에 대한 포괄적 대응 안을 마련하는 긴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1. 의인/ 청의의 본질 The Nature of Justification

1515년부터 1519년 사이, 초기의 루터는 의인을 죄인이 내적 갱신과정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점점 닮아가는 변화의 과정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예수의 유능한 의료로 병자가 낫는 비유는 그가 1515년, 1516년 “의인은 변화에 관한 것이다’라고 로마서 강의에서 선언한 바와 같이 이러한 의인 이해를 가리킨다. 그러나 1530년 중반 이후 아마도 멜랑히톤의 의인에 대한 좀더 법리적인 접근방법에 영향을 받아서인지 루터의 어조는 의인을 의롭게 되는 과정보다는 의롭다고 선언 받는 것으로 간주하는 경향을 뛴다. 점점 더 그는 성령의 작용으로 중생의 독특한 과정과 내적 갱신으로 보완된 사건으로 의인을 보게 되었다. 의인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인의 외적 지위를 바꾸지만 중생은 죄인의 내적 성격을 바꾼다. 트렌트는 이 견해에 강하게 반대했고 원래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인, 의인은 인간성 안에서의 중생과 갱신의 과정이며 그 과정은 죄인의 외적 지위와 내적 성격 모두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견해를 줄기차게 옹호했다. 제4장은 다음과 같이 자세히 의인을 정의한다. 죄인의 의인화는 첫 아담의 자녀로 태어난 상태에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인 두 번째 아담을 통해 은총의 상태로,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로 입양된 상태로 바뀌는 것으로 간단히 정의할 수 있다. 복음에 의하면 이 변화는 요한복음 3:5에 “사람이 불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라고 말할 것처럼 중생의 죄 씻음 또는 이에 대한 욕구 없이는 일어날 수 없다. 이처럼 의인은 중생의 개념을 포함한다. 제7장에서 이 간단한 말이 확대되어 의인이 죄의 용서만 아니라, 불의한 사람이 의로운 사람 되는 은총과 은사를 자발적으로 받아들여서 내적 인간이 성화되고 갱신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 점은 규칙 11을 통해 더욱 강조되었는데 이 규칙은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함으로써, 오직 죄의 용서만으로써” 의인이 발생할 수 있다고 가르치므로 결국 은총과 자비를 배제하는 자들과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되는 길은 하나님의 호의에 의한 은총뿐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을 모두 정죄했다. 렌트로서는 의인이 세례와 고해성례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죄인은 처음에 세례로 의롭게 되나, 죄 때문에 그 의인이 박탈될 수 있다. 그러나 제14장이 밝히듯이 고해로 갱신될 수 있다. 트렌트는 요약하여 아우구스티누스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세 전통을 주장했다. 그 전통은 의인화 사건과 과정 모두를 포함한 것으로 보았다.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의롭다고 선언되는 사건과 성령 내적 사역으로 인해 의롭게 되는 과정이다. 멜랑히톤과 칼뱅 같은 개혁이 두 일을 구분하여 “의인” 이 의롭다고 선언되는 과정만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겼고, 그들이 “성화” 또는 “중생” 이라 부른 동반적 내적 갱신 과정을 신학적으로 다르게 해석했다. 그리하여 심한 혼란이 일어났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모두 동일한 “의인”이란 말을 판이한 의미로 사용한 것이었다. 트렌트가 채택한 용어 의인은 개신교도의 의인과 성화 모두를 의미한다.


2. 의롭게 하는 의의 본질 (The Nature of justifying righteousness)

루터는 죄인 자신이 어떤 의도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그들은 의롭게 할 하나님의 자비로운 결정의 근거가 될 만한 그 어떤 것도 갖지  못했다. 루터의 “그리스도의 외적 의(iustitia Christi aliena)" 교리는 죄인을 의롭게 하는 의가 그들 밖에 있음을 밝혔다. 그것은 전가된 것이지 분유된 것이 아니며, 외적인 것이지 내적인 것이 아니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의 견해에 따라 초기 종교개혁 비판자들은 하나님이 죄인들 안에 자애롭게 주입하고 심어준 내적 의에 근거해 죄인들이 의롭게 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들을 의롭게 만들 무엇이 개인 안에 있어야 한다고 반박했다. 루터는 이 생각을 배제했다. 트렌트는 내적 의의 근거로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인개념을 옹호했다. 제7장은 이 점을 극명하게 밝혔다. (의인의) 단일한 형상적 원인은 하나님의 의이다. 이 의로서 그분은 의로우신 것이 아니라 이것으로서 그분은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부여받을 때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에베소서 4:23) 의롭다고 여겨질 뿐 아니라, 의롭다고 불리 우고 또한 실제로 의롭다. 어느 누구도 하나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의 공로를 그에게 전하지 않는 한 의로울 수 없고 이 일은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데에서 일어난다.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에 이룩된 동의 중 하나는 1541년 라티스본의 대담에서 탁월하게 부각되었는데 의인의 두 원인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 이었다: 바로 (개신교 입장인) 외적 의와 (가톨릭 입장인) 내적 의. 절충안은 어느 정도 잠재력을 가진 듯 보였다. 그러나 트렌트는 그것에 시간이 없었다. “단일한” 이리는 용어의 사용은 의도적이었고 하나 이상의 원인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의인의 유일한 직접원인은 의의 내적 은사였다.

3. 의롭게 하는 믿음의 본질 The Nature of iustifying faith

루터의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심한 비판을 받았다. 제 12규칙은 루터의 의롭게 하는 믿음이라는 사상의 핵심을 정죄하여 “의롭게 하는 믿음은 그리스도 때문에 죄를 사하는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신념일 뿐이다”라는 생각을 배척한다. 부분적으로는 이처럼 루터의 의인 교리를 배척하는 것은 앞서 말한 것처럼 “의인”이라는 용어의 의미가 모호함을 드러낸다. 트렌트는 누구든지 순종 또는 영적 갱신의 필요 없이-트렌트적 의미 용어로-믿음으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게 될까 두려워했다. “의인”이 기독인의 삶의 시작과 지속 및 성장 모두를 의미한다고 해석한 트렌트는 루터가 (죄인이 하나님에 의해 바뀌고 갱신될 어떤 필요도 없이) 단지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만이 기독인의 삶 전체의 근거임을 천명한다고 믿었다. 루터는 기독인의 삶이 믿음을 통해 시작되고 믿음만으로 시작된다고 확언했다. 의인 이후에 선행이 나타나는 것이지 선행이 그 의인을 유발하지는 않는다.


4. 구원의 확신 The assurance of salvation

다른 개혁가들과 마찬가지로 루터도 사람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고 공감했다. 구원의 근거는 자비로운 약속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함에 있다. 구원의 확산을 갖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 성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의심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궁극적 확신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된다. 비록 기독인의 신앙의 기초가 안전해도 이 기초에 대한 인간의 인식과 열심은 흔들릴 수 있다. 이 점은 믿음 문제에 있어 모든 개혁가 중 가장 투철한 자로 간주되는 칼뱅이 분명히 제기했다. 그의 믿음에 대한 정의는 분명 이 방향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인 진리에 기초를 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꾸준하고 분명한 지식이 믿음이고, 이 둘 다 성령에 의해 우리 생각에 계시되고 우리 생각에 각인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는 믿음에 대한 옳은 정의를 내리게 된다. 그러나 칼뱅에 의하면 이 말의 신학적 확실성이 반드시 심리적 안정감을 가져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신자의 삶이 의심과 염려로 정철되는 것과 일치한다. 즉 우리가 믿음이 확실하고 견고해야 한다고 강조할 때 우리는 머릿속에 의심 없는 확실성이나 염려 없는 견실함을 갖고 있지 않다. 오히려 신자들이 자신의 믿음 부족과 계속 싸우고, 어떤 소란에도 방해받지 않고 평화로운 양심을 갖지 못하는 것을 긍정한다. 반면 우리는 그들이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신념에서 떨어져 나가거나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이 어떤 시련을 당한다 해도 트렌트는 “그 누구도 오류에 빠지지 않는 확고한 믿음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았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고 주장했다. 트렌트의 요점은 개혁가들이 인간적 신념과 대담성을 의인의 근거로 삼아, 하나님의 은총이 아닌 잘못될 수 있는 인간적 확신에 근거하는 듯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개혁가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의인은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한 것으로 강조한다고 확신했고 그런 약속을 담대히 믿지 않는 것은 하나남의 신뢰성을 의심하는 것으로 보았다.

성례연구 3.3 실재설의 본질 : 루터, 츠빙글리와 트랜트 공의회

성찬 때 무슨 일이 일어나든가? 이 예식에 쓰이는 결과로 성찬의 빵과 포도주가 혹시 변한다면, 어떻게 변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여러 접근방법이 16세기에 모색되었고, 그 중 세 가지가 특히 중요하다.


화체설:트렌트 공의회 Transubstantiation: the Council of Trent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규정한 화제 교리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근거에 기초하여 있다. 구체적으로 “실체(substance )”와 “偶有우유(accident)"를 아리스토텔레스가 구분한 것이 그것이다. 사물의 “실체”는 본질적 성격이며, 반면 “우유"는 외관(색, 모양, 냄새 같은)이다. 화체설은 봉헌 순간 빵과 포도주의 우유성은 바뀌지 않은 채 있지만 빵과 포도주의 실체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의 실체로 바뀐다고 단언한다. 이러한 실재적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16세기 초 논란의 대상이었다. 트렌트 공의회는 전통적 관점을 열렬히 옹호했다. 1551년 10월 11일 끝난 13차 회기 중 트렌트 공의회는 성찬 때 그리스도가 실제로 임하는 것에 관해 결정적으로 언명했다. ”화체“라는 용어는 봉헌 결과 빵과 포도주의 실제적 변화를 가리키기에 적당하다. 이 교리는 그리스도의 현실적 실체적 임재를 강하게 확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말하자면 “빵과 포도주를 봉헌한 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현실적으로, 실체적으로(truly, really and substantially) 그 물질적 물체의 모양으로 성찬의 존귀한 실체에 담겨 있다” 그래서 공의회는 화체설의 교리와 용어 모두가 힘차게 옹호했다.


루터 :공재설 Luther: consubstantiation

이 견해는 빵과 그리스도의 몸이 한꺼번에 동시에 임재 한다고 주장한다, 실체에 있어 변화는 없고, 빵과 그리스도의 몸 모두의 실체가 함께 임재 한다. 화체 교리는 루터에게 불합리한 신비를 합리하려는 시도로 보였다. 루터에게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가 성찬 때 실제 임한다는 것이지 임재방식에 관한 어떤 이론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논거를 위해 오리게네스의 표상을 원용한다. 쇠가 불에서 달궈지면 쇠가 이글거리고 그 이글거리는 쇠 속에 쇠와 열 모두가 있다. 학술적으로 정교한 표현보다는 이같이 단순한 일상적 유비를 사용해 성찬 때 그리스도 임재의 신비를 설명하는 것이 어떠한가? 나로서는 어떻게 빵이 그리스도의 몸인지 헤아릴 수 없더라도 나는 내 이성을 그리스도에게 복속시킬 것이다. 그의 말씀에만 집착하면서 또한 나는 그리스도 몸이 빵에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빵이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것을 굳게 믿는다. 이에 대한 근거는 “떡을 가지고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그가 취하여 자른 빵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고린도전서 11:23-24)"라는 말씀이다. 믿어야 할 것은 화체 교리가 아니라 단지 성찬 때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임재 하신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어떤 이론이나 설명보다 중요한 것이다. 이 내용은 그의 “교회의 바빌론 유수 The Babyloηian Captivity of tbe Church” (1520)에서 분명히 드러난다. 거기서 그는 성례에 관한 중세교회의 가르침에 대해 근본적으로 비평하고 “화체” 개념은 논리가 약하다고 주장했다. 성찬시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 교리를 주장하면서도 루터는 특히 화체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적 해석을 수용하길 거절했다.


츠빙글리:기념설 Zwingli: memorlalisrn 

츠빙글라에게 있어서 성찬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기념하는 것이지 희생이 아니다” 그는 “이것이 내 몸이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하며 성찬 시 “그리스도의 실제 임재” 는 생각도 제거했다. 집에서 먼 여행을 떠나면서 남편이 자기가 돌아 올 때 까지 자기를 기억하라고 자기 반지를 부인에게 주는 것과 똑같이 그리스도가 영광 가운데 돌아올 날까지 그것으로 자신을 기억할 증표를 그의 교회에 남겨놓는다. 그러나 “이것이 내 몸이라”(마태 26:26) 는 말씀, 곧 실제 임재에 관한 전통적 가톨릭 견해의 모퉁이 돌이었으며 또한 실제 임재를 변호하는데 루터가 원용한 이 말씀은 어떻게 되는가? 빙글라는 “성경에는 이다 라는 말이 상징하다 라는 뜻으로 쓰인 귀 절이 무수하다” 고 주장했다. 그래서 제기해야 할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이것이 내 몸이라’하신 말씀도 은유적으로 또는 추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여부이다. 이 문맥에서 ”이다“라는 말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 이미 충분히 밝혀졌다. 그래서 은유적으로나 추상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결론이 된다. “이것이 내 몸”이라는 말에서 “이것은” 빵을 의미하고, “몸”은 우리를 위해 죽음을 당한 몸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다"는 문자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빵이 몸은 아니기 때문이다.


장 칼뱅

루터와 츠빙글리 사이의 주된 토론은 성례적 표지와 그것이 의미하는 영적 은사의 관련성에 관한 것이었다. 칼뱅은 어림잡아 이 양극의 중간에 위치한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성례에는 상징과 상징이 나타내는 은사 사이에 밀접한 관계가 있어서 우리가 “쉽게 이것에서 저것으로 옮겨갈 수” 있다고 주장한다. 표지가 가시적이고 물질적인 반면, 상징된 대상은 비사실적이고 영적이지만 표지와 상징된 대상의 관계가 매우 친밀하여 저것에 적용할 수 있다. 상징된 대상은 그 표지로써 그 목적을 이른다. 신자들은 항상 이 규칙대로 살아야한다. 즉 주께서 정하신 상징을 볼 때마다 상징된 대상의 진실이 분명히 거기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확신해야 한다. 당신이 실제로 거기 참여한다고 당신에게 확신시키려 하지 않는다면 왜 주께서 그의 몸의 상징을 당신 손에 두시겠는가? 또한 비가시적 대상의 은사를 확증 하려고 가시적 표지를 우리에게 준 게 사실이면, 우리가 몸의 상징을 받았을 때 몸 자체도 우리에게 주셨다고 안심하자. 이렇게 칼뱅은 표지와 상징된 대상 사이의 차이를 말하면서도 표지가 실제로 그것이 가리키는 은사를 가리킨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나는 주의 만찬의 성스런 신비가 두 가지에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물질적 표지가 우리 눈앞에 있을 때 우리에게 (우리의 연약한 능력에 따라) 비가시적인 것을 나타내고, 영적 진리도 동시에 상징 자체를 통해 나타난다. 칼뱅의 성례 신학이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진 타협으로 볼 수는 없고,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받는 방법에 대한 이해, 특히 “조절(accommodation)" 개념에 관한 이해를 반영한다. 이로써 16세 기독교 안에서 이 문제에 관해 상당한 이견이 있었음이 밝혀졌는데 이는 오늘날까지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사례연구'3.4 교회의 교리: 개신교 안에서의 경향

여러 면에서 개혁가들의 교회관은 그들의 약점을 드러낸다. 그들은 가톨릭

측과 급진개혁파의 수미일관한 교회 관에 직면했고 그들의 논리에 맞서기 어려웠다. 가톨릭 측에게 가시적 역사적 제도로서 사도 교회와 역사적 연속성을 지녔고, 급진개혁에게 참 교회는 하늘에 있고, 땅 위의 어떤 교회도 “하나님의 교회”라 이름을 가진 자격이 없었다. (連官)연관 개혁가들은 이 양극적 견해 사이로서 중간지대를 점유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 심각한 모순에 빠졌음을 알았다. 루터는 당시 교회가 은총 교리를 잊었다고 확신했다. 그는 은총을 기독교 복음의 중심으로 보았다. 가톨릭교회가 이 교리를 잊었다고 확신하여 그는 교회가 진정한 기독교회로 주장할 근거를 잃었다고 결론지었다. 톨릭 교인들은 이 주장을 조롱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루터는 교회와 무관한 분열을 조장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분리론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분열을 정죄하지 않았던가? 그가 교회의 일치를 얼마나 강조했었던가? 그런데 이제 루터는 그 일치를 허물려 한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교회에 대한 16세기의 토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역사적 현안을 본다. 최소한 몇몇 측면에서 종교개혁은 4세기 도나투스 논쟁의 재현으로 볼 수 있다. 루터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 론을 배척하려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 론을 내세울 수밖에 없는 듯이 보였다. “내적으로 보면 종교개혁은 아우구스티누스의 은총 교리가 아우구스티누스의 교회 교리에 대해 궁극적 승리를 거둔 것을 의미한다(벤자민 B 워필드)" 종교개혁의 교회적 본질에 대한 이해는 16세기에 양립할 수 없다고 밝혀진 아우구스티누스 사상의 양면간의 갈등이라는 배경 아래 가능한 것이다. 루터는 머뭇거리는 분리론 자였다. 그의 시대에 학구적 개혁가로서 그 분열을 혐오하는 데 깊이 공감했다.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에 대한 95개조에 대한 소동에서도 그는 교회의 탈퇴를 확신하지 않았다. 우리는 20세기의 “교파주의” 현상에 익숙해졌지만 서구교회가 작은 부분들로 떨어져 다는 생각은 중세에는 전혀 낯선 일이었다. 한 마디로 생각조차 할 수 는 일이었다. 1519년 루터 자신은 “불행히도 로마에서 개선될 수 없는 것 있더라도 교회에서 이탈해 분열로 치달을 어떤 이유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오히려 사태가 악화 될수록 더욱 교회를 돕고 지지해야한다. 분열과 모욕으로는 아무것도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여기서 루터의 견해는 유럽 전체 다른 개혁 집단들의 견해와 흡사하다. 교회는 내부로부터는 개혁 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가톨릭교회가 비텐베르크 개혁 측을 더욱 소외시키는 현상은 순전히 일시적적일 것이라는 추측이 1520년부터 1541년 어간 루터 파 저술가들 배후 깔려 있었던 것 같다. 비텐베르크 복음주의 분파는 아마도 개혁 협의회를 소집하여 수년 내에 가톨릭교회가 스스로를 개혁하여, 갱신 되고 개혁된 교회에 루터파가 재가입하도록 허락하리라고 믿은 듯하다. 그래서 루터 교 신앙의 주요 노선을 표명한 아우구스부르크 신앙고백(1530년)은 가톨릭교에 대해 실로 놀라울 만큼 회유 적이다. 그러나 1540년대에 그런 재결합 희망은 깨어졌다. 개신교 및 가톨릭 신학자들이 만나 그들의 차이점을 토의했을 때 1541년 레겐스부르크 담화(가끔 라티스본으로도 알려짐)는 화해의 상을 주는 듯했다. 그 토의는 실패로 끝났다. 1545년 트렌트 공의회가 결국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대응을 위해 모여 가톨릭교회 내의 주요 개혁안을 제정했다. 레지날드 폴 추기경 같은 몇몇 참석자들은 개신교에게 화해적이길 바랐지만, 공의회는 개신교의 주요사상을 밝히고 정죄했다. 화해의 희망은 깨졌다. 개신교회들은 이제 자신들의 분리된 존재가 일시적이 아니라 지속적임을 인정해야 했다. 그들은 ‘교회’ 라는 칭호에 대해 더 큰 권리를 누리는 듯한 로마 가톨릭 교회라는 단체와 나란히 기독인의 “교회”로서 자신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했다. 이 간단한 역사적 소개에 근거하여 볼 때, 개혁가들의 교회 이론에 관한 관심은 주로 1540년대부터 시작되는 게 분명하다. 루터가 어떻게 내가 자애로운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관심을 두었다면, 그의 후계자들은 가톨릭에서 파생한 “내가 어디서 참 교회를 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다루어야 했다. 복음 중심적 교회가 따로 영위될 수 있도록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야 했다. 차세대 개혁가 중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 장 칼뱅이었다.


마르틴 루터

초기 개혁가들은 중세 교회가 한편으로는 성경을 떠남으로써, 또 한편으로는 성경에 인간적인 것을 첨가함으로써 부패했고 교리가 왜곡되었다고 확신했다 교회 성격에 관한 루터의 초기 견해는 하나님 말씀을 강조하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님 말씀은 정복하러 나아가며, 말씀이 정복하고 하나님께 대한 참된 순종을 얻는 곳이면 교회는 어디든 존재한다. 여기서 루터의 견해는 참 교회를 이루는 데 하나님 말씀의 중심적 역할을 강조한다. 그래서 주교가 서품한 사제직은 교회의 존재를 지켜내기 위해 불가결한 것은 아닌 반면, 복음의 설교는 그 교회의 본성에 필수적이다. “말씀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고, 믿음이 있는 곳에 참교회가 있다” 가시적 교회는 하나님 말씀의 설교로 이루어지고, 어떤 인간의 모임도 이 복음에 근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할 수 없다, 이 점에서 초대 교회와의 역사적 연속성은 자체의 자격을 보증하는 데 충분치 않다. 루터의 교회 이해는 이처럼 역사적이기보다는 기능적이다. 교회나 임직 자들을 합법화하는 것은 사도교회와의 역사적 연속성이 아니라 신학적 연속성이다. 사도들에게서 역사적 연원을 찾는 단체의 일원이 되기보다는 사도들처럼 일한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중요하다. 


장 칼뱅

교회 론이 제기한 문제와 씨름한 개혁가가 있다면 그 사람은 칼뱅이다. 교회론에 관한 첫 중요 주요 논의는 1539년 출간된 “기독교 강요” 2판에서 볼 수 있다. 제2판이 나올 무렵 그는 새로운 복음중심 교회에 대해 더 많은 경험을 쌓았다. 칼뱅에게 참교회의 표시는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고 성례를 바로 집행하는 것이었다. 로마 가톨릭 교회가 교회의 최소한의 규정조차도 지키지 않았기에 복음주의자들이 그곳을 떠나는 것은 지당한 일이었다. 스트라스부르크 종교개혁 이후의 지적 세력인 마르틴 부처가 교회 행정가로 상당한 명성을 날렸기 때문에 교회에 관한 칼뱅의 후기이론이 그의 개인적 영향을 반영하는 것 같다. 목사, 박사(또는 교사), 장로 및 집사의 네 직책은 그 기원을 부처에게서 찾는다. 가시적 및 비가시적 교회의 차이도 그렇다. 칼뱅은 가시적 교회와 비가시적 교회로 크게 구분했다. 한 면으로 교회 기독교 신자의 공동체로서 가시적 집단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성도의 교제이며 선택받은 이들의 사귐으로서 비가시적 존재이기도 하다. 비가시적 측면에서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만 알려진 선택받은 자들의 집단이다. 가시적 면에서 그것은 땅위에 있는 신자들의 공동체이다. 전자는 단지 선택받은 이들로만 구성되고, 후자는 선한 자와 악한 자 또한 선택받은 자와 버림 받은 자 모두를 포함한다. 전자는 믿음과 희망의 대상이며, 후자는 현재 경험적 대상이다. 칼뱅은 모든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참된 몸인 비가시적 교회 때문에 그 약점에도 불구하고 가시적 교회에 경의를 표하고 계속 헌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하나님의 단체, 곧 하나의 교회만이 존재할 뿐이다. 가시적. 비가시적 교회 구분에는 두 가지 큰 의미가 있다. 칼뱅은 어떤 교회가 참된 것인지 판단할 객관적 기준을 강조할 필요성을 인정한다. 두 가지 판단기준 정해졌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순수하게 선포하고 경청하는 것을 보거나,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대로 성례가 이루어지는 것을 보는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 교회를 이루는 것은 구성원의 특성이 아니라 공인된 은총의 수단의 임재인 것이다. 하나님 말씀 설교와 올바른 성례전의 중심역할을 칼뱅이 항상 강조하는 점에 유의하라. 칼뱅이 거기서 하나님 말씀과, 하나님 말씀의 성례전 안에서의 구현 내지는 상호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우리는 그가 이 두 가지 제도를 연관시키려는 이유를 알 수 있다. 또한 교회를 정의할 때 그가 주교나 초대 교회와의 역사적 연속성을 언급하지 않은 것도 주목할 만하다. 칼뱅에게 그런 일이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결정적인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신약에 들어있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믿고 설교하는 것이다.




급진적 종교개혁

세바스찬, 프랑크 같은 급진 개혁가들은 사도교회가 콘스탄티누스 황제 개종 이래 국가와 긴밀한 유대를 누림으로써 완전히 타협하고 말았다. 프랑크는 참교회가 사도 이후 더 이상 없었다는 특유의 급진적 견해를 내세운다. 그가 자주 언급하는 “외적인 것(externa)"은 그가 “타락했다"고 간주한 성례를 포함한 외적 의식을 가리킨다. 참 교회는 그리스도가 흩어진 자기 교회의 백성을 자기 왕국에 모으려고 영광 가운데 돌아올 시간의 종말에 존재하게 될 뿐이다. 그때까지 참 교회는 숨겨진 채 있을 것이다. 이 급진적 방식에 대응하여 루터는 두 가지 난점을 해결해야 했다. 교회가 제도적이지 않고 복음 설교로 정의된다면 어떻게 급진 개혁가들의 견해와 자신의 견해를 구분할 수 있는가? 그 자신도 “교회는 광신도가(급진파를 루터는 그렇게 부름) 지배하는 곳에서조차 그들이 말씀과 성례를 부인하지 않은 한 거룩하다”고 말하기도 했다. 자기 주변 정치적 상황에 유념하여 제도적 교회의 필요성을 주장하여 반격했다. 루터가 ‘성경만으로 라는 원리의 급진적 내용을 전통에 호소(사례연구 3.1 참조)하여 완화시킨 것과 같이, 교회를 역사적 제도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의 참 교회에 관한 잠재적인 급진적 견해를 완화시켰다. 교회제도는 하나님이 세우신 은총의 수단이다. 도나투스 논쟁과 비교하는 것이 유익할 것이다. 도나티스트들은 북아프리카 교회의 분리 운동가였다. 그들은 당시의 가톨릭교회가 박해 시 로마제국에 대한 그릇된 처신으로 타협했다고 주장했다. 개인의 종교적 전일성 온전 성을 타협하지 않는 이들만이 참교회의 구성원으로 인정될 수 있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 입장을 고수했다. 교회는 성자와 죄인이 섞여있는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 동일한 교회에 의로운 이와 사악한 이가 공존했고 어떤 사람도 사악한 이들을 교회에서 내보낼 권한이 없다. 아구스티누스는 “밀과 잡초의 비유(마태복음 13:24-31)"를 원용했다”’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이 비유는 교회에 적용된다. 비유속의 밭처럼 교회는 밀과 잡초,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 모두 담고 있고, 그들은 심판 때까지 공존한다. 그날 그들 사이에서 심판하신다. 어떤 인간도 하나님 심판을 선취하도록 허용 받지 않았다. 교회는 이처럼 시간의 종말까지 선악을 다 담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가톨릭(문자적으로 전체라는 의미)"이라는 용어가, 교회에 적용된 것처럼, 성자와 죄인이라는 혼합된 구성원을 묘사한다고 주장한다. 이처럼 교회에 대한 “도나티스트”와 ”아우구스티누스“ 적 관점은 판이하다. 루터는 ”혼합된” 단체로서 교회를 보면 아우 구스티누스의 견해를 받아들인 데 급진파들은 의로운 이들의 의로운 이들만이 단체로서 교회를 보는 도나티스트의 견해를 전개했다. 도나티스트처럼 급진파들은 구성원에게 도덕적 완벽을 요구 했다. 교회와 세상은 빛과 어둠처럼 상반되었고 그들은 더 이상 자신이 루터와 츠빙글리가 정치적로 타협했다고 간주한 것에 할애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루터에게 있어서 부패한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마치 말린 후추 씨 사이에 쥐똥이 보이듯, 알곡 사이에 쭉정이가 보이듯“ 했다. 그것은 아우구스티누스가 시인하고 루터가 동의한 교회 현실 중 하나였다. 연관개혁은 교회를 설립하게 만들었으나, 급진 종교 개혁은 종파를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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