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강의 시간( pp 249-284)
제 3장 종교 개혁과 그 이후 (1500-1750)
서구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새 시대가 16세기에 열렸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종교개혁, 즉 서구 교회를 신앙체계, 도덕성 및 구조에 있어 더 성경적 토대로 돌리려는 운동이었다. 그 개혁으로 처음 유럽에서 한 무리의 개신 교회가 형성되었다. 초기 약 1525년까지는 종교개혁이 루터와 오늘날 독일 동북부에 위치한 뷔텐베르크 대학을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운동 또한 복잡한 일련의 변화를 겪은 후, 당시는 독립 도시 국가였던 제네바 시와 칼뱅과 주로 관련을 맺게 되었다. 종교개혁 운동은 복잡하고 각양각색이었으며, 그 명제는 교회 교리의 개혁을 훨씬 넘어섰다. 그 운동은 근본적인 사회적 정치적 또한 경제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었다. 종교개혁 자체는, 비록 칼뱅주의가 헝가리까지 동쪽 깊숙이 침투하긴 했지만, 특히 유럽의 중부와 북부에 집중된 서구적 현상이었다. 그러나 1600년 이후 점차 중요해진 다수민의 북미 이주로 인해 개혁 후 개신교 및 가톨릭 신학은 전역으로 수출되기에 이른다. 하버드 대학은 뉴잉글랜드 신학교육의 초기 중심지의 한 예이다. 예수 선교회도 인도, 중국 및 일본을 포함한 극동에서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했다. 기독교 신학은 점차 서구 근거지를 넘어 세계적 현상으로 확장하기 시작했다.
루터교 개혁
루터는 청의 교리에 특히 관심을 있었고 이는 그의 종교사상의 중심을 이루었다. 루터의 개혁은 처음에는 뷔텐베르크 대학교에서 신학교육을 개혁하는 데 주로 관심을 둔 학구적인 인물이었다. 뷔텐베르크는 비중이 크지 않은 대학교였고 루터와 그의 신학 부 동료들이 내놓은 개혁은 거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상당한 관심을 끌어 뷔텐베르크에서 소신을 알려 더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얻은 것은, 1517년 l0월31일 그의 유명한 95개조 공고 등의 루터의 개인적 활동이었다. 95개조는 로마의 성 베드로 대성당 재건축에 쓸 자금을 모으려고 면죄부를 파는 행위에 대한 항거였다. 사람들이 면죄부를 죄의 용서를 사는 신속하고 편리한 수단으로 믿었던 듯하다. 루터는 항거했다. 용서는 죄인과 하나님과의 변화된 관계의 문제이지 금전적 투기가 아니었다. 은총으로 용서받는다는 개념이 하나님의 시혜를 사들인다는 개념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루터의 학구적 개혁안은 교회와 사회개혁안으로 변했다. 루터의 활동무대는 더 이상 사색하는 대학세계가 아니었다. 이제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서구에서 새로운 사회적· 종교적 질서를 새로 개척하는 종교적 사회적 또는 정치적 개혁운동의 지도자로 간주되었다. 실제로 루터의 개혁은 츠빙글리 같은 개혁 동료들의 개혁안보다 훨씬 더 보수적이었다. 더욱 이 일부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덜 성공적이었다. 그 운동은 독일 영토에 요지부동으로 묶여 있었고 외국의 세력기반을 얻지 못했다.
칼뱅주의개혁
개혁 교회 예컨대 장로교회를 있게 하는 칼뱅주의 개혁은 스위스 연방내의 변화에 연유한다. 루터 교 개혁이 학구적 상황에 기원을 두고 있는 데 비해 개혁 교회는 더 성경적 틀에 따라 교회의 도덕과 예배를 개혁하려는 일련의 시도에 그 기원을 두었다. 루터는 칭의 교리가 교회적 종교적 개혁안의 중심이라고 확신했던 데 비해, 초기 개혁 사상가들은 어떤 구체적 교리는 물론이고 교리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그들의 개혁안은 제도적 사회적이고 또한 윤리적이어서 인문주의 운동에서 나온 개혁에 대한 요구와 여러모로 비슷했다. 개혁 교회의 강화는 1531년 츠빙글리가 전사한 후 그의 후계자 불렁거의 지도로 취리히 개혁이 안정될 때 시작해서 1550년대 제네바가 세력 근거지로 칼뱅이 주요 대변인으로 떠올랐을 때 끝났다고 대개 생각한다. 결국 제네바 시와 그 도시의 공화주의 정치체제와 종교 사상가들이 (처음에는 칼뱅이었다가 그의 사후 데오토레 베자) 개혁교회 내에서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 변화는 개혁교회 목사들이 훈련받은 제네바 아카데미가 1559년 설립되면서 더욱 확고해졌다. 16세기 후반 개혁신학이 칼뱅 자신의 사상 이외 다른 곳으로부터도 나왔다는 것이 점점 명백해지고 있다. 16 및 17세기 후반 개신교 사상을 “칼뱅주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이 본질적으로는 칼뱅의 사상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제는 대개 칼뱅의 사상이 그의 후계자들에 의해 미묘하게 바뀌었다고들 본다. 17세기 영국 역사에서 두드러지고 17세기와 그 이후 뉴잉글랜드의 종교적 ·정치적 견해에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청교도주의는 개혁 기독교의 구체적 형태이다.
급진적 개혁(재 침례교회)The Radical Reformation(Anabaptism)
"Anabaptist"는 문자 그대로 “재 침례자’를 의미하고, 가장 특정 있는 재 침례주의자의 관습, 즉 단지 개인적으로 신앙을 공공연히 천명하는 자들만 세례를 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가리킨다. 재 침례주의는 1520년대 츠빙글리 개혁이 있었던 취리히 근방에서 처음 일어난 듯하다. 그것은 츠빙글리가 자신의 개혁 원칙에 충실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콘라드 그레벨 같은 사람들의 집단이 중심이었다. 츠빙글리는 설교와 실천이 일치하지 않았다. 비록 츠빙글리가 ‘성경만으로(sola scriptura)’ 리는 원칙에 충실 한다고 공언했지만 그레벨은 그가-유아세례, 교회와 행정 관청과의 밀접한 관계 기독교인의 전투 참가 같은-성경이 허용 하거나 규정하지 않은 여러 관행을 그대로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개혁 기독교인은 성경이 명시적으로 가르친 것들만 믿고 행하게 될 처지였다. 츠빙글리는 이를 경계했고, 취리히 교회를 과거 기독교 전통의 역사적 뿌리와 그 연속성 단절시키려고 위협하는 불안한 변화로 여겼다. 재 침례교회 운동의 여러 분파 내에서 여러 개의 공통요소를 식별할 수 있다. 즉 외부 권위에 대한 일반적 불신, 성인 신자 침례를 옹호하고 유아 세례 배척, 재산 공통소유, 평화주의와 무저항의 강조 등이다.
가톨릭 종교개혁(The Catholic Reformation)
이 말은 종종 트렌트 종교회의 개최이후 시기의 로마 가톨릭 안에서의 갱신을 가리키는데 쓰인다. 가톨릭 개혁의 제일 구성요소인 트렌트 종교회의는 혼동을 일으키는 여러 사안에 대한 가톨릭의 가르침을 해명했고 성직자의 처신, 교회 규율, 종교 교육 및 선교 활동에 관한 시급한 개혁을 시행했다. 교회 안에서의 개혁운동은 많은 유서 깊은 신앙교단들의 개혁과 예수회 같은 새 교단의 설립으로 상당한 자극 받았다. 이후 더 구체적으로 가톨릭 종교개혁의 신학적 측면을 성경과 믿음으로 의롭게 됨 및 성례에 대한 가르침과 관련지어 말하겠다. 가톨릭 종교개혁의 결과 인문주의자들이 요구했든 개신교인들이 요구했든 지간에 종교개혁의 요구를 촉발했던 교회권력의 남용 중 다수가 제거되었다.
주요 신학적 변화
신학의 근원(The Source of Theology)
종교개혁의 주류는 새로운 기독교 전통의 갱신과 교정에 관심이었다. 기독교 신학이 궁극적으로 성경에 근거한다고 주장하면서 루터와 칼뱅 같은 개혁자들은 기독교 신학의 제일 중요한 근원으로서 성경으로 돌아갈 필요 가 있다고 주장했다. “성경으로만(sola scriptura)" 이라는 구호가 개혁자들의 특징이 되었고, 이는 성경이 기독교 신학의 유일한 필요 충분 근거라는 그들의 기본신념을 나타냈다. 그러나 나중에 말하겠지만 이는 그들이 전통의 중요성을 부인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l. 성경에 근거한다고 입증할 수 없는 신념은 거부하거나, 누구에게도 구속력이 없다고 선언해야 했다. 일례로 마리아의 무흠수태 교리를 성경적 근거가 모자란다고 보고 배척했다.
2. 교회 안에서 성경의 공적 위상을 새롭게 강조했다. 주해 설교, 성경 주석 및 칼뱅의 “기독교 강요” 같은 성서 신학적 노작이 개혁자들의 특정이 되었다.
3. 은총교리(The Doctrine of Grace)
개혁 첫 시대는 마르틴 루터의 개인적 논제가 주류를 이루었다, 교회가 자신도 미처 모르는 체 펠라기우스 노선에 빠져들었다고 확신한 루터는 자기 말을 들으려는 누구에게나 ”나는 칭의 교리를 선언했다. “어떻게 내가 자비하신 하나님을 찾을 수 있을까요?"라는 질문과 “오직 믿음으로만(sola fide)‘’ 라는 구호가 서유럽 많은 곳에서 울렸고, 교회의 상당수 신자들이 그의 말을 듣게 만들었다. 칭의 교리는 루터교 개혁과 특히 관련이 깊다. 칼뱅은 이 교리를 계속 인정하면서 이후 개신교 신학에 더 중요해진 사조를 유발해, 예정 교리와 관련된 칭의 보다는 은총을 주장했다.
4. 성례 교리(The Doctrine of Sacraments)
1520년대가 되자 성례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은총의 외적 표시라는 견해가 개혁계에서 자리 잡았다. 이 신학분야는 곧 엄청난 논쟁의 주제가 되어 성례의 횟수와 성격에 관해 가톨릭 측과 개혁자들이 의견을 달리 하고, 루터와 츠빙글리는 그리스도가 성찬식 때 실제로 참여하는지 여부에 대해 격렬히 논쟁하게 되었다.
5. 교회 교리(The Doctrine of Church)
개혁 첫 세대가 은총 문제에 몰두했다면 둘째 세대는 교회문제에 관심을 돌렸다. 은총 교리로 가톨릭교 주류에게서 떨어져나간 개혁자들은 이 분리를 정당화하고 서구 도시에서 일어나는 새 복음적 교회의 기초를 제공할 정연한 교회 론을 펼치라는 압력을 점점 많이 받게 되었다. 루터가 은총 교리와 특히 관련되었던 데 비해, 교회에 관한 개신교의 견해를 진전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물은 마르틴 부처와 장 칼뱅이다.
개혁이후의 운동(Post-Reformation Movements)
신교와 가톨릭의 개혁 이후 협의 운동 속에서 신학적으로 강화되는 시기가 뒤따랐다. 개신교 안에서는 루터 교와 개혁 교회(즉 칼뱅주의자) 모두에게 “정통” 으로 알려진 시대가 열렸다. 이 시대는 교리적 규준과 정의를 강조하는 특징이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경건주의는 이 교리를 강조하는 데 적대적이었다. 정통교리를 강조하여 신자의 “산 믿음”에 대한 필요성을 흐리게 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트랜트 공의회 이후 가톨릭 전통을 지속시킬 것을 더욱 강조하며 개신교는 혁신적이고 따라서 이단적이라고 간주했다.
정통개신교/신교정통(Protestant Orthodoxy)
대단한 독창성의 시대 이후 정체기가 뒤따르는 것이 역사적 관례인 듯하다. 종교개혁도 예외는 아니다. 개혁 때의 통찰력을 유지하려는 열망 때문 인지 개혁 이후 시대에는 신학에 대한 강한 학술적 접근방법이 발달했다. 개혁자들의 통찰력은 법처럼 자리 잡고 기독교 신학을 체계적으로 연달아 발표하는 과정을 거치며 맥을 이어갔다. 칼뱅 사후, 사상을 체계적으로 조직하고 정연하게 추론하는 새로운 방법에 대한 관심이 힘을 얻었다. 개혁 신학자들은 루터 교와 가톨릭교에 대항해 자신의 생각을 지켜내야 함을 느꼈다. 칼뱅이 어느 정도 의심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이제는 우방으로 넙죽 받아들였다. 칼뱅주의가 내면적으로 일관되고 정연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게 점점 중요하게 되었다. 그 결과 많은 칼뱅주의 저술가들은 그의 방법에 관한 글에서 그들 신학을 더 견실한 합리적 기초 위에 세울 수 있으리라 희망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존하게 되었다. 그 결과 산학에 대한 새로운 접근방법의 특정은 다음과 같이 넷으로 요약할 수 있다.
1. 인간 이성은 기독교 신학의 발견과 옹호에 큰 역할을 감당했다.
2. 기독교 신학은 이미 알고 있는 공리에 근거한 삼단논법에서 이끌어낸 논리적으로 정연하고 합리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체계로 묘사되었다. 즉 신학은 기본적이고 자명한 제일원리에서 시작하고 그 기초 위에서 그 교리를 계속 추론한다.
3. 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근간을 두는 것으로 이해했고, 특히 방법의 성격에 대한 그의 통찰력에 근간을 두었다. 그 후 개혁파 저술가들은 성경적 이라기보다는 철학적 신학자로서 더 나은 평가를 받았다.
4. 신학은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인 문제를 지향하게 되었다. 특히 하나님의 질과 인간성, 그리고 창조에 관한 하나님의 의지 및 무엇보다도 예정론에 관해 그러했다.
이와 같이 신학의 출발점은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이 아닌 일반 원리가 되었다. 칼뱅과 대조하면 차이가 분명하다. 칼뱅에게는 신학이 성경이 말하는 대로 예수그리스도 사건을 중심으로 하고 또 그 사건에서 나왔다. 그러나 후기 칼뱅주의에게는 이제까지 그리스도에게 두었던 중심 위치를 일반 원리가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것을 믿지만, 저들은 저것을 믿는다” 고 하는 것이다. 교리를 새로 강조한 특징을 지닌 1559-1622년에 이르는 기간을 “정통시대”라고 부른다. 개신교와 가톨릭 모두 자기들의 체계가 합리적이고 세련되었다고 입증하려고 노력한 결과, 양쪽 신학계에 새로운 형태의 학풍이 발달했다. 여러 면에서 루터 교와 칼뱅주의는 아주 흡사했다 그래서 그들 모두 복음적이라고 주장 했고 대체로 중세 가톨릭의 핵심교리를 배척하는데 동조했다.. 그러나 그들도 구별될 필요가 있었다. 대부분 교리에 있어 루터 교와 칼뱅 파는 폭넓게 일치했다. 1559-1662년 기간 중 칼뱅주의자들이 예정론을 강조한 것은 이교리가 루터 교 동료들과 뚜렷이 구분하는 것임을 부분적으로 보여준다.
로마 가톨릭(Roman Catholicism)
1545-63년까지 있은 트렌트 공의회는 종교개혁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결정적 대응이었다. 공회의의 업적은 이렇다. 첫째, 이 회의는 우선 종교개혁 출현에 적지 않은 원인을 제공했던 문제들을 해결하고 교회 내 부패와 남용을 없애는 대책을 세웠다. 둘째, 이 회의는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가톨릭 교설의 골간을 정했다. 종교개혁 결과 논쟁거리가 된 일련의 문제들 즉 성경과 전승, 의인교리, 성례의 성격과 역할을 규정한 것이다. 그 결과 가톨릭교는 개신교 측의 도전에 응할 준비를 갖추게 되었다. 16세기 마지막 십 년 동안 가톨릭교회 안에서 개신교에 대한 자신감을 가졌다. 가톨릭 전통의 연속성에 대한 새로운 자신감으로 가톨릭의 가르침 항상 계속된다는 점을 더 강조하게 되었다. 이를 야기한 가장 유명한 저술가는 자크 베니뉴 보쉬에였는데, 그의 “개신교회 변형의 역사: Histoire res variations des eglises protestantes”가 가톨릭과 개신교 사이의 토론에서 가장 종요한 무기가 되었다. 보쉬에에게 있어서 교회의 가르침은 시대가 지나도 동일한 상태로 있었다. 개신교가 혁신을 도입하거나 또는 일부 중심요소를 부인하여 이 가르침에서 떠났기 때문에 개신교는 정통으로 간주될 권리를 몰수당했다. 사도들은 일정한 진리를 후계자들에게 보존 ·전수했고 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이를 전달해야 했다. 교회의 가르침은 항상 같다. 그 복음은 이전의 복음과 결코 다르지 않다. 그러므로 어느 때 그 누구나, 그 신앙이 어제의 신앙에 속하지 않는 것을 내포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언제나 정통과 다른 가르침, 곧 이단이다. 그릇된 가르침 또는 논쟁을 식별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것은 나타날 때마다 단지 그것이 전에 없던 것이기 때문에 즉시 식별된다. “언제나 같다(semper eadem)" 라는 구호는 개신교에 대한 가톨릭 논쟁의 중요 요소가 되었다. 보쉬에에게 개신교는 별 무리 없이 혁신으로 비쳤다. 그래서 이단이었다. 이 가톨릭 신학 황금기에 저명해진 신학자 가운데 아마 로베르토 벨라르미네가 가장 중요 인물이리라.
청교도주의(Puritanism)
영어 통용권의 가장 중요한 신학 형태들 중 하나가 16세기 후반 영국에 나타났다. 청교도주의는 신앙의 경험적이고 목회적 측면에 특히 중점을 둔 개신교 정통의 한 형태로 이해하는 것이 무난할 것이다. 주요 신학자인 윌리엄 퍼킨스, 윌리엄 에엄스 및 존 오웬의 저술이 베자에게 큰 영향을 받았고 특히 그리스도의 죽음의 범위와 섭리의 선택에 대한 하나님 주권에 관한 그들의 가르침에 있어 그러했다. 청교도 목회 전통은 대개 리차드 박스 터의 사역과 글에서 정점에 달했다고 본다. 그의 가장 유명한 목회 신학 작품은 여전히 ”개신교 목사 Reformed Pastor“(1656)로서 이 책은 청교도주의가 17세기 초 영국에서 주요 신학적 정치적 세력이기는 했으나, 가장 중요한 발전은 신세계에서 일어났다. 찰스 1세의 종교탄압 정책으로 많은 청교도들이 영국을 떠나 북미에 정착했다. 그 결과 17세기에 청교도주의가 북미 기독교계에서 주요한 위상을 점하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청교도 신학자는 조나단 에드워즈였다. 그는 합리적 세계관이 제기한 새로운 의문들을 기꺼이 하나님 주권을 강조하는 청교도 사상과 연결시켰다. 영적 지도자로서 그는 특히 18세기 “대 각성 시대(이 시대에 그는 중요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의 여파 속에서 크나 큰 요구에 직면했으며, 그의 신학 특히 그의 윤리에서 실제적으로 나타났다. 청교도주의는 몇 가지 면에서, 특히 기독인의 경험에 관해서 우리가 살펴볼 경건주의와 유사성을 보여준다.
경건주의 (Pietism)
정통세력이 개신교 주류에서 점점 신장되면서 그 결점도 뚜렷이 나타났다. 한창때 정통세력은 기독교 진리에 대한 주장을 합리적으로 옹호하는 일과 교리적 정확성에 관심을 두었다. 그러나 빈번하게 이런 경향은 신학을 일상생활 문제에 관련지으려는 관심보다는 미묘한 논리적 정비를 위한 학문적 탐닉으로 변모했다. “경건주의”라는 말은 라틴어 “pietas"“경건" 또는 “돈독함”으로 번역 가능)에서 왔고, 당초에 기독교인의 일상생활에 관한 기독교 교리의 중요성을 강조하려고 이 운동의 반대 측이 사용한 경멸조의 말이었다. 경건운동은 필립 야콥 슈페너가 “경건한 소원”(1675)을 출간한 데서 시작되었다고 대개 본다, 이 저술에서 30년 전쟁(1618-1648) 후유 증 가운데 있는 독일 루터교회의 상황을 슬퍼하며 당시 교회의 재활 계획안을 펼쳤다. 이 가운데 특히 성경 공부를 강조하게 되었다. 이 제안은 학문적 신학자들에게 조롱을 받았지만 독일 교계에서는 영향력 있다고 판명되었다. 이는 전쟁 중 겪은 충격적 사회상 기운데 정통세력의 빈약한 면모에 점점 환멸을 느끼고 견딜 수 없게 된 점을 반영했다. 경건주의에서는 교리 개혁과 함께해야한다. 경건주의는 여러 방향으로 발전했다. 특히 영국과 독일에서 그러했다. 이 운동의 여러 대표자들 가운데 두 명이 특기 할만하다.
1. 니콜라우스 루드비히 그라프 폰 진젠도르프는 “헤든후터 (Herrnhuter)"로 흔히 알려진 경건주의자 공동체를 세웠다. 당시 그가 삭막한 합리주의와 척박한 정통이라 안주한 대상들에게 소외되어 그는 그리스도와 신자간의 친밀한 개인적 관계에 토대를 둔 “마음의 종교"가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기독교인 삶에서 ”감정“(이성 또는 교리적 정통성에 상대적으로)의 역할에 새롭게 치중하여 이후 독일 종교사상에서 낭만주의의 기초를 제공한 것으로 간주 된다" 진젠도르프의 개인 고유의 신앙에 대한 강조는 살아있는 신앙이란 구호에서 나타난다. 그는 이것을 개신교 정통의 무기력한 신조에 대한 동의와 매립시켰다. 이런 사상은 한편으로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전개되었고, 다른 한편으로 영국에 도입한 존 웨슬리에 의해 전개 되었다.
2. 존 웨슬리는 영국 교회 내에서 감리교 운동을 시작하여 그 후 그 나름대로 한 교파로서 감리교가 탄생하게 했다. 자신이 “우리가 구원받는 믿음이 모자라다고”고 확신했던 그는 ‘살아있는 신양’ 에 대한 욕구와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짐”을 느낀 1738년 5월 올더스게이트 거리에서의 모임에서 얻은 경험을 통해 기독교인의 삶에서 경험의 역할을 발견했다. 그는 당시 영국 이신론의 침체성과 예리하게 대비된 기독교 신앙의 경험적 측면을 강조하여 영국에서 중요한 종교적 부활이 있게 했다. 그들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경건주의 여러 분파는 기독교 신앙과 일반 신자의 경험세계를 상호 연결하는 업적을 이루었다. 이 운동은 일방적인 정통 교리의 강조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인간 내면의 깊은 신앙을 옹호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1. 종교 개혁에 있어 성경과 전통
17세기 월리엄 찰랑워드는 “재차 말하기를 성경, 성경만이 개신교인의 종교이다” 칼뱅은 교회와 사회 모두의 제도와 규칙이 성경에 근거해야한다고 주장. “나는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하고 성경에서 나온 인간의 제도만을 인정 한다” 쯔빙글리는 “우리 종교의 토대는 말씀, 하나님의 성경 이다” 라고 했다.
1) 정경인 성경
개혁가들과 중세 신학의 차이는 성경이 부여 받은 위상보다는 성경을 정의하고 해석하는 방식과 관련이 있다. 성경을 규준으로 삼을 때 항상 중심이 되는 것은 성경의 경계를 정하는 것이다. 즉 정경이란 무엇인가? “정경” (헬라어로 규칙, 또는 규준의 뜻)은 중세 신학자들에게는 “(라틴어판 성경)에 실린 작품들” 이었다. 그러나 개혁가들은 의문을 제기했다. 모든 신약 작품들이 정경적 이라고 생각(루터는 넷을 의심)했지만 구약작품의 정경성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했다. 히브리어 성경 중 구약 내용을 불가타판 같은 라틴어 및 헬라어판 비교하면 후자에게는 전자에 없는 작품이 여러 있었다. 제롬을 따라 개혁자들은 정경에 속한 것으로 볼 구약 내용을 (히브리 성경)에 원래 실린 것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렇게 구약과 외경은 구분 되었다. 전자는 히브리어 성경에 나온 작품으로 이루어지고 후자는 헬라어 및 라틴성경에는 나오나 히브리 성경에는 나오지 않는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중세 신학자들은 1546년 트렌트 공의회가 뒤따른 대로 구약을 헬라어와 라틴어 성경에 실린 구약 작품들로 정의하여 구약과 외경의 구분을 아예 제거했다. 여기에서 개신교와 가톨릭과의 성경의 실체 의미에 대한 구분이 근본적으로 일어났다.
2) 성경의 권위
개혁자들은 하나님 말씀과 관련지어 성경 권위의 기초를 세웠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칼뱅은 성경의 권위는 쓴 사람이 “성령의 비서들”이라는 사실에 근거했다. 하인리히 불링거는 성경은 그자체로 절대적이고 자주적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스러운 성경은 그 자체로 또한 저절로 충분한 지위와 신빙성을 갖고 있다” 가톨릭은 (교회)가 성경의 정경을 규정했고 현 성경은 정경적 권위를 지닌 것으로 확정했다는 점에서 교회가 성경에 우선한다고 주장한다. “성경만으로(scriptura sola)”은 원칙의 중요성을 적시한다. 첫째, 개혁자들은 교황, 공의회, 및 신학자들의 권위가 성경의 권위보다 아래에 있다고 주장한다. 칼뱅은 “오직 우리 하나님 말씀만이 우리 판단 범위를 넘어서있고 또한 교부들과 공의회들은 말씀의 척도에 부합하는 한도 내에서만 권위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공의회들과 교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지위와 영예를 우리는 여전히 인정한다.”
둘째, 개혁가들은 교회 안에서의 권위가 공직자의 지위로부터가 아니라 그들이 봉사하는 하나님 말씀으로부터 온다고 주장한다. 전통적 가톨릭 신앙은 공직자의 권위의 근거를 그 직책에서 찾는 경향이 있다, 개혁가들은 직분의 권위의 기초를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한지 여부에서 찾았다. 칼뱅은 “우리와 교황주의자들의 차이점은 그들은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주재하지 않으면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 될 수 없다고 믿는 점이다. 반면에 우리는 교회가 진리를 보존하고 교회의 손길로 다른 이에게 진리를 전해지는 것은 교회 자신이 경건하게 하나님 말씀에 복종하기 때문이다.”
가톨릭들이 (제도적 또는 역사적 연속성)의 중요성을 역설한 반면 개혁가들은 (교리의 연속성)은 똑같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개혁가들은 자기들이 초기 교회 주교들과 같은 믿음을(중세 교회의 왜곡된 복음이 아닌) 가르침으로 필연적 연속성이 있다고 보았다.
개혁 반대자들은 어거스틴의 말을 원용한다.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감동 받지 않았더라면 나는 복음을 받지 않았으리라” 정경이 있다는 자체가 성경에 대해 교회가 권위를 가진다는 점을 가리키지 않는가? “성경”이 무엇인지 규정한 것은 (교회)였고 이 사실은 교회가 성경의 권위를 갖고 성경에서 독립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래서 1519년 유명한 라이프치히 논쟁에서 루터의 맞수 요한 엑크는 “성경은 교회의 권위가 없이는 완전히 믿을 만하지 않다” 고 주장.
3) 전통의 역할
개혁가들의 “성경만으로”라는 원칙은 기독교 교리 형성 상 전통을 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개혁가들은 정통을 아주 긍정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중세 말경에 “(전통)”의 개념이 성경의 권위와 해석에 있어 중요성을 띠게 되었다. 하이크 A. 오버만은 중세 말에 두 가지 판이한 전통에 대한 개념이 퍼져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이를 ‘(제일정통)“ "(제이정통)”이라 부를 수 있다. 초기 교회 여러 논쟁들에 대응하여 특히 영지주의 위협에 직면해 성경의 특정 구절을 이해하는 “정통적” 방법들이 나타났다. 리용의 이레내우스 같은 2세기 교부 신학자들은 성경의 여러 본문을 해석하는 공인된 방법이라는 개념을 고안 했는데 그는 그것을 사도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주장했다. 성경은 마구 해석 할 수 가 없었다. 기독교회의 역사적 연속성이라는 맥락에서 해석해야했다. 그 해석의 척도는 역사적으로 고정 되었고 부여 되었다. 오번만은 이 전통의 이해를 “제일전통” 이라 부른다. 여기서 “정통”은 단지 “신앙공동체 내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전통적 방법)”을 뜻한다.
그러나 14-15세기에 전통의 대한 좀 다른 이해가 나타났다. 이제 “전통”은 ‘성경에 덧붙여’ 별개의 근원에 속한 계시로 이해되었다. 여러 비결 사항들에 대해 성경은 침묵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 번째 계시)라는 섭리로서 이 모자라는 것을 보충하게 했다고 주장했다. 소급하여 사도들에 까지 글로 쓰이지 않은 전통. 이 전통은 교회 내에서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해졌다. 오버만은 이러한 전통이해를 “제이전통”이라 부른다.
요약하면 “제일전통”은 교리의 (유일근원 이론)이다. 즉 교리는 성경에 근거하고 “전통”은 "성경 해석의 전통적 방법“을 가리킨다. ”제이전통“은 교리의 (이중근원 이론)이다. 즉 교리는 두 가지 판이한 근거인 성경과 글로 쓰이지 않는 전통에 근거한다. 그래서 성경에서 찾을 수 없는 믿음은 이 이중 근거 이론에 기초하여 글로 쓰이지 않은 전통을 원용해 근거를 밝힐 수 있다. 개혁가들이 비판대상으로 삼은 것은 주로 이 교리의 (이중 근원 이론)이다.
16세기에 전통을 완전히 거부하는 대안을 급진 개혁의 대표자들이 줄기차게 옹호했다. 토마스 뭔쯔, 카스트르 슈벵크펠트 같은 급진 자들은 개인은 제각기 성령의 인도에 따라 성경을 해석할 권리를 갖고 있었다. 이리하여 (개인주의)로 가는 길이 열려서 개인의 사적 판단이 교회의 전통적 판단위에 올라가게 되었다. 그래서 급진 개혁가들은 유아세례 관행이 비성경적이라고 배척했다. 삼위일체론 및 그리스도의 신성 교리도 성경적 토대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배척했다.
“정통 0” 이라 부를 대상은 전통을 배척하고 사실상 성경 해석에 있어 개인 또는 회중의 사적 판단을 기독교회의 전체적인 정통적 판단보다 위에 둔다. 16세기에 존재한 성경과 전통 사이의 관계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이해는 다음과 같다.
전통 0: 급진 종교 개혁
전통 1: (연관 종교 개혁)
전통 2: 트렌트 공의회
개혁가들이 성경의 증거만을 택해 전통을 배제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개혁가들의 관심은 성경의 증인에 인간이 보태거나 왜곡한 것을 제거하는데 있었다. “전통 1”의 개념에 구현된 “성경의 전통적 해석" 이라는 생각은 연관개혁가들에게 이 정통적 해석이 정당화 될 수 있다면 완벽히 수용 될 수 있었다. 연관 개혁가들은 신학적으로 (보수적)이었다. 이 전통적 성경해석이 옳다고 개혁가들은 확신하여 교회 전통적 교리 대부분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삼위일체 교리 등을 그대로 받아 들였다. 유아세례도 많은 정통적 관행도 성경과 모순이 없다고 믿어 그대로 지켰다. 연관 개혁가들은 (개인주의)의 위협을 뼈저리게 의식했고 교회의 (전통적 성격 해석)을 강조하여 이 위협을 피하려했다. 교리적 비판은 가톨릭 신학과 관행이 성경을 위배했거나 성경에 모순 된다고 보이는 부분에 집중 되었다. 이 변화의 대부분을 중세에 일어났음으로 개혁가들은 1200-1500 년 사이의 기간을 저들이 개혁할 ”쇠퇴기“ 또는 ”부패기“라고 불렀다. 개혁가들은 전반적으로 믿음만한 성경해석자로 초기 교부들에 의존한 일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혁가들은 특별히 (어거스틴)을 높이 평가한 것도 교부들을 성경적 신학의 해석자로 여겼기 때문이다. 개혁가들은 교부들이 성경에만 근거하여 신학을 펼치고 있다고 보았다. 개혁가들은 “교부의 증언”을 대체로 믿을만한 것으로
보았다. 그 증언이 삼위일체와 그리스도의 신성 같은 교리와 유아 세례 같은 관행을 담고 있어서 개혁가들은 이 내용들을 진정으로 성경적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 성경적 해석 “전통 1”에 대한 존중으로 연관 개혁이 교리상 보수적 경향을 보이게 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해진다.
4) 가톨릭의 입장
1546년 트렌트 공의회는 “(정통 2)”를 확인하여 가톨릭은 기독교 신앙이 성경과 글로 쓰이지 않은 전통이라는 두 근원을 통해 모든 세대에 전달된다고 선언했다. 이 성경외적 전통은 성경과 같은 권위를 지닌 것으로 대접해야한다.
(1) 성경을 계시의 유일한 근원으로 여길 수 없다; (전통)은 필수적인 보충인데 개신교는 이를 무책임하게 부인했다. “모든 구원의 진리와 행동 규칙은 글로 쓰인 책과 쓰이진 않는 전통에 실려 있으며 이는 그리스도 자신이나 사도들 입으로부터 받은 것이다.”
(2) 트렌트는 개신교의 정경목록이 부족하다고 규정. 권위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 저술들의 목록 전체를 공표했다. 여기에는 개신교 저술가들이 배척했던 모든 외경서 전부를 포함했다.
(3) 성경의 라틴어판(불가타)이 믿음만한 권위 있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 수세기 동안 사용되고 있는 오래된 불가타판이 교회의 승인을 받았고 공적인 강의 논쟁 설교 또는 해석에서 참됨으로 옹호해야 하며 어떤 경우든 누구도 그것을 감히 배척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했다.
(4) 트렌트 공의회는 교회가 성경을 해석할 권위를 가지고 있는데 이는 개신교 해석자들 사이에 만연한 개별주의에 대항한 것이다. “무분별한 영들을 제지하고자 이 공의회는 어는 누구도 기독교회에 관한 신앙과 도덕에 있어(자신의 생각대로 성경을 왜곡하여) 자신의 판단에 따라 감히 성모께서.....하신 뜻에 대항해 성경을 해석 할 수 없음을 공표한다.”
독서 보고서는 강의안을 요약하여 제출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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