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고전 15:3-6
2. 본문 요약: 예수님의 부활은 완벽한 검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이다.
3. 본문 주제: 예수님의 부활
4. 본문 테마: 예수님의 부활의 확실성
5. 명제: 예수님의 부활은 완벽한 검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이다.(선언적 명제)
6. 목적: 부활은 완벽한 검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임을 증거하기 위해서
7. 질문 제기: 부활에 대한 근거와 증거는 무엇입니까?
8. 전환 문장: 예수님의 부활은 완벽한 검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이다. 부활에 대한 근가와 주장은 무엇입니까?
9. 대지
10. 제목: 부활이 던지는 도전
현대 역사가들 가운데는 기적이란 애당초 일어날 수가 없다는 철학적인 전제 아래 부활을 대단히 문제가 많은 주장으로 취급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부활을 믿지 않으면 기독교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설명하기가 무척 어려워집니다. N. T. 라이트는“ 예수님이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셨다면, 그분이 말씀하신 것을 다 받아들여야 합니다.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지 않았다면 그분이 무슨 말을 했든 신경 쓸 게 뭐 있겠습니까? 모든 걸 가름할 핵심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좋아하느냐 마느냐가 아니라 그분이 과연 죽음에서 부활했느냐의 여부입니다. ”부활 소식을 처음 들은 이들이 느낀 감정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이제 스스로 원하는 대로 살 수 없다는 뜻이라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로마의 칼날이든 암이든 그밖에 무엇이든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다는 그 사실이 모든 것을 바꿔 놓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지 않는 이들은 대부분 기독교가 시작된 배경에 대해 이런 시나리오를 내놓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세상에 대한 과학적인 지식이 없어서 마술적이거나 초자연적인 얘기에 금방 넘어갔습니다.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믿었기에 예수님이 살아났다는 소문에도 쉽게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숨을 거두자 제자들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했습니다. 그분을 정말 메시아로 여긴 터라 영으로 살아 계셔서 여전히 그들과 함께하며 앞길을 인도한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을지 모릅니다. 더러는 예수님이 무언가 말씀하는 환상까지 보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영적으로 살아 있다는 의식이 수십 년 넘게 지속되면서 차츰 몸으로 부활했다는 이야기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서 네 권에 실린 부활 이야기들은 그런 믿음을 든든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들입니다. 대안으로 제시된 설명의 첫 번째 오류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에 기록된 부활 이야기가 사건이 벌어진 이후 오랜 시간에 걸쳐 구성되었다고 보는 데 있습니다. 부활 이야기 두 가지 주요한 요소인 빈무덤과 증인들은 모두 꾸며 낸 이야기라는 주장입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빈 무덤과 증인들에 대한 설명이 처음 등장하는 문서는 복음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고 15-20년쯤 지난 뒤 기록되었다고 역사가들이 입을 모으는 바울서신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 3-6절은 더없이 흥미로운 본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빈 무덤과 부활이 “ 사흘 만에 "있었던 일이라고 소개할 뿐만 아니라, 상징이나 비유가 아니라 역사적인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대목입니다. 증인들까지 열거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몇몇 개인들과 소그룹들에 나타나시는 데 그치지 않고 500명이나 되는 군중에게 동시에 모습을 드러내기도 하셨습니다. 대다수는 바울 사도가 이 글을 쓸 당시까지 여전히 살아 있어서 확실한 증거가 필요하면 얼마든지 자문을 구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바울서신은 교회에 보내는 편지였으므로 공문서임에 틀림없습니다. 큰 소리로 낭독하도록 쓰인 글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누구든 예수님이 죽은 뒤에 사람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이 의심스러우면 당장이라도 아직 살아 있는 증인들을 찾아가서 그들이 직접 본 얘기를 들어 보라고 권면합니다. 증인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이처럼 과감하게 도전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해 들은 증언을 충실하게 되풀이하고 있노라고 주장한다는 점 또한 부활 이야기가 가진 주요한 특성으로 꼽을 수 있습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부터 비판적인 학자들은 초기 크리스천들이 인기 있는 민담을 전달하는 과정을 거쳤을 테고, 어린아이들이 흔히 하는 '말 전하기 게임'의 부활 이야기가 확산되는 과정에서 조금씩 변해갔을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최근에 나온 인류학 연구 결과들은 고대문화에서도 지어낸 이야기와 역사적인 설명을 명확하게 구분했습을 보여 줍니다. 역사적인 설명들은 변조를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주장도 바로 그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전달하는 부활 소식들은 실제로 예수님을 보았던 이들의 입에서 나온 그대로라는 것입니다. N. T. 라이트는 기독교 메시지를 전했던 초기의 전도자들은 부활이야기에서 여성들을 빼라는 엄청난 압박에 시달렸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전후 사정에 관한 기록들이 너무도 잘 알려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활을 처음 목격한 증인들에 관한 이야기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고 또 퍼져 나가면서 예수님의 삶에 얽힌 그 어떤 이야기보다 훨씬 더 가슴을 뜨겁게 하고 삶을 변화시켰습니다. 또한 라이트의 말처럼 빈 무덤과 개인적으로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들이 한데 어우러질 때 역사적인 확실성이 한결 더 깊어집니다. 텅 빈 무덤만 있고 목격담이 전혀 없다면 아무도 부활이란 결론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누군가 시신을 훔쳐 갔다고 보기 십상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을 봤다는 목격담만 있고 무덤이 비지 않았다면 그 역시 설득력을 갖기 어렵습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이를 보았다는 식의 설명은 어렵잖게 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요소가 모두 사실인 경우에만 예수님이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입니다. 바울서신은 처음부터 크리스천들이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을 선포했음을 보여 줍니다. 무덤이 틀림없이 비어 있었다는 뜻입니다. 의심을 품은 이들은 무덤으로 달려가 부패한 예수의 시신을 금방 꺼내 보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빈 무덤이 없었더라면 바울 역시 공개문서에서 수많은 증인들이 살아 있노라고 장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흐르면서 부활에 관한 이야기가 조작되었으리라는 추측은 가당치 않습니다. 무덤은 비어 있었고, 허다한 증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했다는 주장은 하늘이 두 쪽 나도 변함없을 엄연한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완벽한 검증을 거친 역사적 사실입니다. 부활에 대한 근거와 증거 주장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증거는 무덤이 비어 있었으며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수백 명에 이른다는 대단히 강력한 증거가 있습니다. 라이트의 말처럼, 이 정도면 역사적으로 확실하다고 봐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러는 틀림없이 이런 반응을 보일 것입니다. " 그렇다 해도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사실이 입증된 건 아니죠. 제자들은 분명히 그리스도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다고 믿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거예요. 그래서 누군가가 부활이 정말 일어난 것처럼 보이게 할 심산으로 예수님의 시신을 훔쳐올 수도 있잖아요. 어쩌면 몇몇 사람들이 좋은 뜻으로 거기에 맞장구를 쳤을지도 모르죠 "초자연적인 현상을 쉽게 믿었던 고대인들은 육신 그대로 부활했다는 소식을 선뜻 믿겠지만 현대인들은 당연히 회의적으로 받아들이리라는 것입니다. 얼토당토 않은 생각입니다. 당대의 지배적인 세계관으로는 신체적인 부활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N. T. 라이트는 동서를 가리지 않고 1세기 지중해 세계의 비유대교 사상들을 두루 연구해 당시 사람들의 보편적인 세계관으로는 육신의 부활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밝혀냈습니다. 어째서일까? 그리스-로마 사상 체계는 마음과 영혼은 선한 반면, 육신과 물질계는 연약하고 부패했으며 불결하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육신의 세계는 늘 엉망진창이므로 몸에서 해방되는 걸 구원으로 여겼습니다. 이런 세계관을 가진 이들에게 부활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눈곱만큼도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몸에서 자유로워진 영혼은 전혀 과거로 돌아가고 싶어 하지 않을 터였습니다. 환생을 믿는 이들마저 육신을 입은 삶으로 돌아간다는 건 영혼이 아직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몸에서 영원히 벗어나는데 있었습니다. 일단 심령이 몸에서 벗어났다면, 몸을 입고 사는 삶이란 기이하고 생각하고 싶지도 않으며, 이뤄질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소식은 유대인들에게도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리스인들과 달리, 유대인들은 물질적이고 육신적인 세계를 선하게 여겼습니다. 죽음은 물질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사건이 아니라 비극이었습니다. 1세기 유대인에게 " 아무개가 죽었다가 살아났대! "라고 말하면 이런 반응이 돌아올 것입니다. “ 제정신이야? 그게 말이 돼? 질병과 죽음이 끝났다고? 세상에 참다운 정의가 세워졌단 말이지? 늑대와 어린 양이 나란히 눕는다는 얘기야? 어처구니가 없군! "그리스인들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에게도 개인의 부활은 상상할 수 없는 관념이었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부활을 의심하는 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환영을 보았으리라는 가설을 내놓았습니다. 다시 말해 그리스도가 나타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고 상상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 제자들로서는 주님의 부활을 얼마든지 상상할 수 있었으며 그들의 세계관 속에서는 얼마든지 선택 가능한 방법이라고 추정합니다. 하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몰래 빼돌린 뒤 남들한테는 그리스도가 살아 있다고 이야기했다는 식의 음모론을 제기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여기에는 제자들이 다른 유대인들을 바라보면서 그들도 특정한 개인이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다는 믿음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줄 알았다는 가정이 깔려 있습니다. 모두 터무니없는 얘기입니다. 비록 이유는 다르지만, 당시 사람들도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육신의 부활을 불가능한 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유독 그리스도의 제자들만 십자가에 달린 주님의 죽음이 실패가 아니라 승리라는 결론을 내렸던 걸까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예수님을 보았다는 것 말고는 설명할 도리가 없습니다. 부활에 대한 근거와 증거 주장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증거 주장은 예수님이 세상을 떠난 뒤, 크리스천 공동체는 갑자기 듣도 보도 못했던 완전히 새로운 믿음을 받아들였습니다. 초기 크리스천들은 부활 중심의 현실 인식을 가졌습니다. 장차 다가올 부활이 예수님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리스도는 변화된 몸을 가져서 벽을 통과해 지나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음식을 먹기도 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의 부활을 보장하며 장차 얻게 될 새로운 생명을 오늘을 사는 크리스천의 마음에 불어넣습니다. N. T. 라이트가 지적하듯, 이러한 신앙은 그때까지 세상에 없던 아주 독특한 신앙이었습니다. 크리스천의 부활 의식은 예수님이 숨을 거두자마자 완전한 형태로 세상에 툭 튀어나왔습니다.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믿음이 논쟁이나 토론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스스로 본 바를 다른 이들에게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무도 이런 주장에 맞설 타당한 대안을 내놓지 못했습니다. 이후의 교회사는 설명하기가 한층 더 어렵습니다. 어떻게 1세기 유대인 한 무리가 인간을 신으로 섬기게 되었을까요? 동양 종교들은 신을 세상 만물에 스며든 비인격적인 힘이라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어떤 인간이 다른 이들보다 더 신성을 지닌다는 관념을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서방 종교들에서는 다양한 신들이 자주 인간의 형상을 입고 활동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므로 누군가는 제우스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는 헤르메스일 수도 있는 식입니다. 하지만 유대인들은 유일하고 초월적이며 인격적인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특정한 인간을 경배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완전히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말 그대로 하룻밤 사이에 수백 명을 헤아리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예배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신으로 여기고 빌립보서 2장에 적은 찬송은 십자가 사건이 벌어진 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쓰인 것으로 보는 게 일반적입니다. 어떤 어마어마한 사건이 있었기에 유대인들의 반발을 이처럼 정면으로 돌파해 냈던 것일까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습니다. 명심할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 나로서는 목이 잘려 나갔던 증인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다 "라는 파스칼의 말처럼 사실상 모든 사도들과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기독교는 왜 그토록 순식간에, 그처럼 대단한 기세로 등장한 것일까요? 메시아를 추종하는 당시의 그 어떤 집단도 지도자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결론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어째서 유독 이 무리만 그런 주장을 펴는 걸까요? 어떤 유대인 그룹도 인간을 하나님으로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크리스천들을 그렇게 하도록 이끈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신성을 가진 인간이나 개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목격한 수백 명의 증인들이 수십 년을 더 세상에 살면서 한결같이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다가 마침내는 그 믿음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겠습니까? 예수의 부활을 제쳐 두고 교회의 탄생을 설명하려고 아무리 애써 보아도 1세기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미 알려진 정보들에 비쳐 보는 순간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철학적인 편견을 가지고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을 애써 외면하지만 않는다면, 예수님의 부활만큼 증거가 명확한 기적도 없음을 깨달을 것이다. 이처럼 까다로운 역사적인 질문에 답하려 애쓰고 마침내 찾아낸 답을 좇는 대신, 기적이 일어날 리 없다는 막연한 거부 뒤에 숨어 버립니다. N. T. 라이트는 이를 통렬하게 지적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크리스천들을 그렇게 하도록 이끈 것일까요? 유대인들은 신성을 가진 인간이나 개인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부활을 목격한 수백 명의 증인들이 수십 년을 더 세상에 살면서 한결같이 그 사실을 공개적으로 증언하다가 마 침내는 그 믿음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은 사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마지막 증거는 예수의 부활을 제쳐 두고 교회의 탄생을 설명하려고 아무리 애써 보아도 1세기 역사와 문화에 대해 이미 알려진 정보들에 비쳐 보는 순간 여지없이 물거품이 되고 말 것입니다. 부활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은 그 증거가 제시하는 도전을 받아들여, 세계관 곧 가능한 일이 무언지 바라보는 시각을 바꾸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들도 현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가 부활했다는 주장을 수용하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목격자들의 설명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변화된 삶 등 증거가 워낙 확실해 차마 부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는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면 얘기가 다릅니다. 세상의 필요를 위해 스스로를 쏟아부을 끝없는 소망과 이유가 있다는 뜻입니다. N. T. 라이트는 어느 설교에서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부활의 메시지는 바로 이 세상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눈앞에 펼쳐진 이 세계의 불의와 고통은 마침내 사랑이 이긴다는 복음으로 다뤄야합니다. 부활절이 의미하는 바가 오로지 영으로만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나셨다는 데 있다면, 그건 나만의 문제가 됩니다. 새로운 차원의 개인 영성 생활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진정으로 죽음에서 다시 일어나셨다면, 기독교 신앙은 온 세상을 위한 복음, 말 그대로 진정 마음을 뜨겁게 하는 소식이 될 것입니다. 불의와 폭력, 타락이 고질화 된 세상에서 부활절이 갖는 의미는 모든 악이 판치는 꼴을 하나님이 차마 견딜 수 없으며, 크리스천은 주님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총동원해서 악을 이기신 예수님의 승리를 완성할 계획을 세우고 분투해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부활절을 제외하면 기독교 신앙은 물질세계에 내재된 문제에 무지하다는 칼 마르크스의 비난을 받아도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부활절을 없애 버리고 나면 기독교는 소원 성취의 종교라는 프로이드의 말이 지극히 당연해질 것입니다. 부활절이 없다면 기독교 신앙은 겁쟁이들한테나 필요하다는 니체에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주장들은 헛소리에 불과 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셨고 장차 재림하실 것이고 이 땅에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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