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성경적 설교 작성법

저 위대한 날

wordlove 2023. 8. 6. 15:21

1. 본문:요일 4:16-17

2. 본문 요약: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한다. 이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는 것은 심판 날에 담대함을 얻게 하려 함이다.

3. 주제: 사랑 안에 거하는 삶

4. 테마: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

5. 명제: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온다.

가능성의 명제

6. 목적: 사랑에 거하는 삶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소개하여 주님의 재림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7. 질문제기: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8. 전환 문장: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온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9. 대지

10. 제목: 저 위대한 날

 

형제 사랑이라는 문제에 관심과 배려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를 요한이 우리에게 제시합니다. 여기서 세 가지 주장들을 제시합니다. 이 주장들은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는 일에 더욱 큰 열심을 내도록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 세 가지 주장들을 다음과 같이 한 구절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 안에 거함으로 말미암는 결과들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이는 모든 주장 가운데 가장 힘 있는 내용일 것입니다. 모든 일을 할 때는 언제나 그 영원한 결과들에 비추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는 구원의 확신을 가져온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저는 사랑에 거하는 삶의 결과들이 무엇인지를 소개하여 주님의 재림을 담대하게 맞이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 이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첫 번째 결과는, 사랑 안에 거하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최종적 증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결코 사랑 안에 거할 수 없으며 서로 사랑할 수도 없습니다. 증오와 악의에 의해 지배되는 자연인에게 그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의 본성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심으로 말미암은 크고 놀라운 평안을 보여 줍니다. 우리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그분이 우리 안에 거하시면 분명히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리는 이런 사랑의 삶을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 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내가 사랑 안에 거하고 하나님 안에 거하며 하나님이 내 안에 거하신다고 말해 보았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정통신앙을 내세운다 해도, 나의 신앙고백이 아무리 올바르다 해도 내가 사랑의 삶을 살고 있지 않다면 내 안에는 어딘가에 거짓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지적으로 믿고 동의하는 것과 내 영혼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중요한 결론에 이릅니다. 이미 우리는 이성으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이 구절과 표현에 대해 고찰한 바 있습니다. 신자와 그리스도의 신비한 연합에 관한 모든 문제, 곧 신자가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이 신자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우리의 이해 범위를 넘어선 것이며, 모든 시대의 위대한 지성인들도 파악하지 못한 사항입니다. 그것은 분석하거나 해부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그토록 부단히 가르치는 그 무엇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물질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생명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신적 본질이 물질적 의미에서 내 안에 들어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하나님이 이적적인 방식을 통해 자신의 거룩한 그 무엇을 내 안에 일깨우십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작용을 통해 내가 그분의 거룩한 성품을 이해할 수 있게 하시며 삶과 그 모든 상황을 보되 그분 자신처럼 볼 수 있게 하십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자'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이 그 사람의 집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집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더불어 시간을 보내기를 원하며, 자신의 삶을 모든 시간을 그분과 함께 보내고자 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인생관 전체는 하나님께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되돌립니다. 내가 육신의 거처인 집으로 돌아가듯이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마음과 정신을 하나님께로 돌이킨다고 요한은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거해야 하며 하나님은 우리 안에 거하셔야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임재와 영향력이 우리의 의식 속에 들어옴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그분이 삶에 들어와 우리를 움직이고 인도하심을 자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 안에 거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하심을 자각합니다. 여러분은 그분의 임재와 영향력과 권능을 의식하며 자기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자각합니다. 그리하여 자신을 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내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무엇이 내가 그렇게 하도록 만들었는가? 나를 그렇게 하도록 맞는 분이 바로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 외에는 나로서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다. 그분이 관심을 유발하셨다. 나는 감동과 동요를 느꼈으며 하나님이 거기 계셨다." 요한이 말하는 바가 바로 그것입니다. 내가 형제를 사랑하며, 내가 이런 사랑의 삶을 살고 있으면, 나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은 내 안에 거하시며 새 삶은 그런 식으로 하나님의 삶 가운데로 이끌려 들어갑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두 번째 결과는,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입증해 준다는 것입니다. 17절 내용이 바로 그러합니다. "이로써 사랑이 우리와 더불어 온전해졌다.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다는 사실에 대한 완벽한 증거가 여기에 있다가 더 나은 번역입니다. 그것이 무슨 뜻입니까? 구원과 하나님이 자기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모든 일에서 하나님의 궁극적 목적은 우리가 그런 사람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요, 하나님 사랑의 목적을 온전히 실행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결국, 그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신 데서 그 사랑이 나타났다. “그리고 모든 속죄 교리가 거기서 생겼습니다. 그분이 그리스도를 우리 죄를 위한 화목제로 드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대답이 여기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 안에 거할 수 있게 되는 것,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할 수 있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궁극적 목표이며 그분의 목표와 목적을 온전히 이루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용서함을 받아 천국에 갈 수 있게 하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위험이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단지 첫 시작일 뿐입니다. 그 모두를 온전하게 하신 궁극적 목적은 여러분과 나로 그 자녀가 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우리를 속량 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그분이 이렇게 하심으로써 하늘에서 그분의 그러하심과 같이 여러분과 나도 세상에서 그러할 수 있게 만드셨습니다. 성화는 소극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항상 적극적 관점에서 고려되어야 합니다. 성화를 단순히 특정한 죄악을 범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그것보다 더 비극적이고도 비성경적인 것은 없습니다. 그들은 특정한 죄악들을 범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우리는 성화 되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성화를 시험하는 성경적 방식은 "과연 내가 그리스도를 닮았는가?" 하고 묻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한가?”라고 자문할 수 있습니까? 다시 말해 성화의 시금석은 우리의 겸손입니다. 우리가 성화를 특정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만 생각한다면 물론 우리는 기쁨과 자기만족을 느낄 것입니다. 하지만 성화를 그분을 닮는 것으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무가치함과 자기 마음의 어두움을 자각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이 절망적으로 부족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과 자신 사이에 너무도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알기 때문에 겸손하게 행할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조악함과 나쁜 기질 성급함을 자각하고 자신에게 사랑을 비롯해 다른 모든 것이 모자랐음을 자각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그 마음속에 궁극적으로 지니셨던 목표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은 특정한 죄악들로부터 구원받는 문제가 아니라 더욱더 그분을 닮아가는 문제입니다. 형제 사랑에 관심을 두지 않으며 내가 사랑 안에 거하는지 아닌지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은 구원의 목적 전체를 곡해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우롱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내 삶에서 가장 큰 관심사가 아니라면 나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초보자에 불과합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러하니라 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그들은 영원 가운데 계신 하나님께 시야를 돌리며 구원의 위대한 길과 계획을 제시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사람이 추구해야 할 바가 무엇입니까? 그분은 한민족 특별한 민족, 곧 자신의 소유인 천국 백성을 만들고 계십니다. 우리는 단지 마지막에 이르러 하늘로 들어가거나 단지 죄 사함을 받고 거기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성품 곧 그리스도 자신의 삶을 개발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그분을 닮아야 합니다. 사랑 안에 거하는 삶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마지막인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17"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진 것은 우리로 심판 날에 담대함을 가지게 하려 함이니 여기에는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장 위대하고 강력한 메시지 중의 하나가 담겨 있습니다. 심판의 교리가 바로 그것입니다. 이 주제는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가르치는 말씀입니다. 심판의 날이란 우리가 죽을 때 우리에게 닥치는 일에 관한 상징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죽음이 곧 심판입니다. 일단 우리가 죽으면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죽음 자체가 아닙니다. 죽음은 더 어찌할 수 없는 처지와 장소로 이끌 뿐입니다. 성경에는 두 번째 기회에 대한 언급이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이며, 우리의 운명은 이생의 삶에서 결정됩니다. 심판의 날이란 단지 우리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며 자신이 시간 속에서 뿌린 것을 영원 속에서 거둘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 방식으로 말한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과 온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가시적으로 보좌에 앉으시는 것과 같은 실제적 심판의 날이란 없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심판의 날에 관한 성경적 가르침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시적 사건이요 공개적 사건이며 최종적 사건입니다. 그것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 무엇이며 모든 인류와 심지어 천사들까지도 목격하게 될 그 무엇입니다. 그것은 법적입니다. 보좌에 앉으신 재판관으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성경의 묘사가 그러합니다. 심판의 날, 곧 하나님의 의와 거룩 성이 나타나는 날에 관한 내용은 성경 전체에서 가르치고 있는 가장 크고 위대하며 특이한 교리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공개적 선고가 내려질 날입니다. 성경에 의하면 이는 우리 모두에게 다가오는 날입니다. 그것은 신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발견되는 가르침이며, 다른 무엇보다도 우리의 복되신 주님이자 구주 자신의 입술을 통해 가장 뚜렷이 언급된 사항입니다. 이와 관련해 말할 수 있는 다른 사람들은 무엇입니까?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 자신이 재판관이 되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5:27은 하나님이 "인자됨으로 말미암아 심판하는 권한을 주셨느니라 “고“ 했습니다. 또한, 마태복음 25:31 에는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라는 언급이 나오며 심판에 관한 내용이 이어집니다. 그러므로 시간의 끝과 역사의 마지막에 온 인류를 심판하실 재판관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독생자 나사렛 예수이십니다. 심판받아야 할 자는 누구입니까? 여기서 주어진 대답은 이런 듯합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타락한 천사들, 곧 원래의 신분에서 떨어진 천사들 즉 악한 영들이 심판받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유다서와 고전 6:3"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에서 발견할 것입니다. 그래서 타락한 천사들은 저 위대한 날에 심판받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천사들에 대한 심판으로 국한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모든 인류 개개인도 심판받을 것입니다. 고후 5:10 "우리가 다 불경건한 자와 불신자뿐만 아니라 신자 역시,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나는 신자들과 불신자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측면에서 차이가 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신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심판을 통과했지만, 심판 날에 그 보좌 앞에 서야 합니다. 차이와 구별이 있고 징벌뿐 아니라 상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모두 그분의 심판 보좌 앞에 서야 할 것입니다. 고후 5:11 우리는 주의 두려우심을 알므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고 바울은 말합니다. 이 땅에 살았던 모든 사람과 우리는 모두 그분 앞에 서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의 때는 죽은 자의 부활 이후에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다시 살아날 것이며 모두 그리스도의 심판 보좌 앞에 설 것입니다. 심판의 기준은 무엇입니까? 성경에 의하면 이방인들은 자신이 지닌 빛 바울은 로마서 2장에서 이를 가리켜 양심이라고 말합니다. 양심에 의해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에 의해 주어진 율법에 따라서라기보다 자신의 마음속에 새겨진 율법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자신의 성경이라고 주장하는 구약성경의 계시 때문에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주어진 율법에 따라 심판받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믿는다고 주장하는 복음에 의해 심판받을 것입니다. 성경은 보상의 등급뿐만 아니라 심판의 등급도 있을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주님은 누가복음 12장에서 많이 맞을 자도 있고 적게 맞을 자도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큰 신비입니다. 우리가 몸으로 행한 바에 따라 보상뿐만 아니라 징벌에서도 차이가 날 것입니다. 요한이 우리에게 알리고자 한 것은, 만일 우리가 이제 담대하게 그것에 직면할 수 있기를 원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 위대한 순간에 담대하게 서서 부끄러워하지 않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형제 사랑하는 일에 더욱 열심을 내야 합니다. 주께서 그러하심과 같이 우리도 이 세상에서 그리하기때문입니다. 여기 이 땅에 살아가면서 행한 모든 행위가 중요합니다. 요한은 본 서신 2장에서 이미 이 교리를 가르친 바 있습니다. 그는 2:28 자녀들아 이제 그의 안에 거하라 이는 주께서 나타내신 바 되면 그가 강림하실 때에 우리로 담대함을 얻어 그 앞에서 부끄럽지 않게 하려 함이라" 여러분은, 나를 사랑하시되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주님이 여러분 안에 오셔서 나를 주님처럼 사랑의 삶을 살도록 여러분 자신을 주님께 기꺼이 맡기고 있습니까? 이 질문 앞에 겸손하게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주님을 부끄럽지 않게 담대하게 맞이 할 수 있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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