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에 대한 이론/성경적 설교 작성법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과의 관계

wordlove 2023. 10. 22. 14:58

본문: 요일 4:19-5:1

본문 요약

본문 주제: 형제 사랑

테마: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과의 관계

명제: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하나로 나타나야 한다. 명령적 명제

목적: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형제 사랑으로 연결됨을 증거 하기 위한 목적으로

질문 제기: 형제 사랑에 대한 결론은 무엇입니까?

전환 문장: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하나로 나타나야 한다. 형제 사랑에 대한 결론은 무엇입니까?

대지

10. 제목: 새 가족/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과의 관계

 

오늘 읽은 네 구절들을 함께 살펴 보고자 하는 이유는 요한 사도가 형제 사랑이라는 중요한 주제에 관해 결론을 내리는 듯하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는 요한이 요일 4:7절 부터 상세히 다루어 온 것입니다. 그는 네 가지 주장을 제시해 왔는데, 그것은 네 구절들에서 각각 나타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하나로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은 반드시 형제 사랑으로 연결됨을 증거 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말씀을 전하기를 원합니다. 형제 사랑에 대한 결론은 무엇입니까?

 

첫 번째 결론은 19절에 나오는 내용이다.

19"우리가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입니다. 이것은 복음 전체를 다시 설명하고 요약해 주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말씀 중 하나입니다. 10절에서 그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시는 일을 떠나서는 우리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요한은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라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면 기독교와 같은 것도 전혀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안에 있는 그 무엇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5:10"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 사람은 죄 속에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 가르침입니다. 그는 죽은 상태요 타락해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자신의 영원한 사랑에 의해서만 그 마음이 움직이십니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분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는 것이 기독교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최우선적 선결 요건입니다. 요한 사도가 진정으로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죄악 된 모습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결과 우리 안에 사랑을 불러일으키셨다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데 따른 결과는 우리도 하나님을 사랑해야 하고 또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이로써 사랑이 우리에게 온전히 이루어졌다"고 요한은 말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의 목표입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가 사함을 받아 지옥에서 구원되고 죄에 대한 징벌로부터 구출될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새 인종, 새 가족을 만드는 일에 착수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만들어져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야 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자신의 삶에서 다시 드러내야 합니다. 요한은 우리 안에 바로 그런 사랑이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음으로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론은 우리 역시 사랑하는 피조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지상에 계실 때 친히 사랑하신 것과 같이 지금도 하늘 보좌에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과 같이 우리도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사도의 첫 번째 사랑에 대한 결론입니다. 우리의 신앙에 대한 고백을 판가름해 주는 궁극적 시금석은 우리 속에 이런 사랑을 지니고 있는지의 여부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선행이나 장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열심히 아닙니다. 육신적 열심과 완고한 마음으로 그렇게 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궁극적 시금석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께 닮아가는지를 판가름하는 궁극적 시금석은 삶과 우리의 모든 행위에서 이 사랑을 나타내는가 하는 것입니다. 형제 사랑에 대한 결론은 무엇입니까?

 

두 번째 결론은 20절에 나옵니다.

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없느니라 첫 번째 결론이 복음의 특성에 근거한 것이었지만, 두 번째는 상식에 기초한 주장이라 묘사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적으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어떤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자기 형제와 대화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기보다는 미워합니다. 요한은 그런 사람에 대한 유일한 묘사가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20"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그것은 전적으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구절을 이해하는데 사람들은 두 가지 어려움에 직면합니다. 첫째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는 것보다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 더 쉽다는 생각을 본능적으로 갖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형제는 죄를 범합니다. 그는 완전하지 않으며, 그에게는 우리가 싫어하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완전하시며 죄가 없으십니다. 그분은 아무런 결함도 없으며, 그분의 성품과 본질 속에는 어떤 식으로든 이의를 제기할 만한 것이 전혀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단지 인간적 생각에서 형제를 사랑하는 일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분명 더 쉽다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둘째는 성경에 기초한 것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 : 22:37-30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내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하나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 다음에 이웃을 사랑하라는 순서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요한이 그 순서를 뒤바꾸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우리가 형제 사랑하는 일로부터 시작하여 그 결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여기서 요한이 현대 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을 지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동료인 사람을 사랑하는 일에 관해서는 알고 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면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음에 분명하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주장입니다. 하지만 요한은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는 거짓말하는 자라고 했습니다. 주님이 첫 번째와 두 번째 계명이라고 부르신 것은 결코 분리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적절한 설명일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이 둘을 함께 결부시키셨으며, 이 사실에 대한 좋은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계명이 마음과 정신과 영혼과 힘을 다하여 주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그러면 하나님이 내게 요청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 첫 번째는 바로 형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사랑의 속성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거나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요한은 본질적으로 실천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습니다. 요한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퍼졌던 이단들과 거짓 교훈들에 대처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항상 직면하는 가장 큰 위험들 중 하나는 거짓된 유형의 신비주의로 묘사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가 자신의 시간과 관심을 자기 영혼을 함양시키는 일에 바치는 것보다 더 쉬운 것은 없습니다. 외적으로는 자신의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계발하고자 노력할 수 있지만 실제적 습관과 행실 행동에서는 나쁜 기질을 드러내며 또한 이기적일 수 있습니다. 요한이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바로 그러한 위험과 나쁜 성향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란 항상 실천적인 그 무엇임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음 절에서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분의 계명들을 지킴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언급했습니다. 14:21"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그는 혼자 있을 때 황홀경에 빠지거나 놀라운 감정 상태를 자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주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사랑이란 계명들을 지킴을 통해 그 자체를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과 이생에서 이룰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성취입니다. 따라서 요한의 주장은 전적으로 옳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더 쉽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표현은 그들이 거짓말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랑에 관해 아무것도 알고 있지 않습니다. 형제의 현 모습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를 사랑하셨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형제를 보고 그 사람은 나처럼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받아 왔다. 나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보시듯이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보시듯이 그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함으로써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하나님 사랑과 형제 사랑은 분리할 수도 없습니다. 이것이 두 번째 사랑에 대한 결론입니다. 형제 사랑에 대한 결론은 무엇입니까?

 

세 번째 결론은 21절에서 발견합니다.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두 가지가 불가피하게 함께 간다는 점을 말해 왔습니다. 우리가 그것을 좋아하든 좋아하지 않든 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그렇게 명하셨습니다. 여러분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미워하고 하나님의 처벌을 받은 데서 그것을 발견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신 계명들 속에서 그런 가르침을 분명히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 이는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함께 갑니다. 그분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하는 것은 우리가 자신의 즉각적 본능에 의해 지배되지 않아야 함을 의미합니다. 오히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새로운 인생관과 시각을 갖습니다. 나는 사람들을 보되 그들의 현 모습을 보지 않습니다. 나는 하나님 말씀의 조명과 가르침 안에서 그들을 봅니다. 이제는 하나님의 시각으로 그들을 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우리에게 사랑하라는 명령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본질적으로 옳다는 사실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그것은 형제에 대한 나의 감정이 어떠하든지 간에 내가 그를 형제로 대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나는 마치 그가 사랑스러운 품성을 지닌 듯이 그를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행하신 바를 그에게 행해야 합니다. 나는 그의 죄를 보아서는 안 되며, 그 이면에 있는 마음과 영혼을 보아야 합니다.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형제를 사랑하라고 명하시며 우리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다른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세 번째 사랑에 대한 결론입니다.

 

마지막 결론은 5:1절에 나와 있습니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자를 사랑하느니라 ““ 요한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사람이며, 그들은 거듭났으며, 하나님께로부터 났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영혼 속에서 역사하셨으며, 성령이 새 성품, 새사람을 그들 안에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에 의해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사람은 이제 하나님의 자녀이며 따라서 그들은 형제입니다. 그들은 같은 식구이며 형제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여러 가지 측면에서 못마땅하게 여기는 교회의 다른 형제들을 존중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좋아하라'가 아니라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그럴만한 이유들이 있지만 우리는 그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을 보고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의 자녀이며 천국과 영원한 축복의 상속자들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키야 합니다. 내가 여전히 싫어하는 요소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형제를 사랑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나의 관계가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하는 순간 난제는 사라지며 다른 무엇보다도 나는 하나님과의 교제가 다시 회복됨을 발견하고 그분과 더불어 온전한 친교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자신의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쓴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요일 1:3"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람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그렇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과 교제를 온전히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이는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전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보이는 형제에서부터 시작하십시오. 여러분의 실패와 죄악을 있는 그대로 자백하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속의 미움을 제거하여 자신에게서 뽑아내고 대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가득 채워 달라고 그분께 간구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 성품 안에서 형제를 사랑하고 있음을 발견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하나님과의 관계와 친교가 회복된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서 나오는 밝은 빛을 받을 것이며 여러분의 모든 삶은 그분의 신성한 사랑으로 가득해질 것입니다. 이것은 실천적 문제입니다. 사랑은 감상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자신을 살펴보세요. 또한 하나님과의 교제와 친교와 예수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구원의 기쁨을 충만하게 경험하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모든 것을 자신에게서 제거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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