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고전 16:13-14
2. 명제: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명령적 명제
3. 제목: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갈등: 마지막 권면
우리는 지금까지 일련의 설교를 통해 교회를 향한 바울의 권면 즉 명령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우리가 살펴볼 14절은 이 위대한 명령의 마지막 단계에 해당합니다. 각각의 권면들은 우연히 제기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깨어 있으라"라고 말한 다음에 "믿음에 굳게 서라"라고 말했으며, "남자답게 행하라"라고 한 다음에 이 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잘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본성상 게으르고 둔감하여 깨어 있지 못하고 잠들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우리에게 깨어 있으라고 요청합니다. "믿음에 굳게 서라"는 권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우리가 과거의 체험에만 머무를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은혜와 믿음에 자라 굳게 서야 합니다. 또한 "남자답게 강하라"는 권면과 관련해서도 우리는 한극단에서 다른 극단으로 옮겨 갈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않든지, 혹은 지나치고 그릇된 열심에 빠지든지 하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런 위험들을 경계하기 위해 마지막 명령으로써 전체적인 권면으로 마무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
2. 갈등 심화: 사랑에 관한 전반적인 진술
이 말씀을 대할 때, 특히 '사랑' '사랑'이라는 단어와 관련하여 전반적인 차원에서 생각해야 할 필요성을 느낍니다. 첫째로, 사도가 '온정주의'가 아니라 '사랑으로' 행하라고 말했다는 것을 주목하십시오. 고대 세계는 사랑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단지 감상주의라고 간주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정의하기 위해 고린도전서 13장을 썼습니다. 여러분은 그 장에서 부정적인 표현을 많이 볼 것입니다. 그는 사랑이란 어떤 것이 아닌지를 말함으로써 그 장을 시작합니다. 사람들은 끊임없이 사랑을 약하고 맥 빠진 어떤 것과 동일시하려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에게 사랑은 무엇이며, 어떤 것이 사랑이 아닌지를 길게 말해야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오시기까지 사람들은 사랑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오늘날 선교사들이 이방인들에게 이 단어에 대해 오해하지 않도록 설명하는 일은 여전히 힘들다고 합니다. 그러하기에 오늘날 우리가 이 '사랑'이라는 단어의 진정한 성격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고도 중요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분명히 보여 주듯이, 사랑은 적극적이고도 강력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신문과 통속소설과 영화와 광고 등에서 큰 영향을 받고 있으며, 우리의 사고도 거의 무의식적으로 그런 매체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뜻하는 개념도 저급한 영향을 받게 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사랑이란 약하고 축 늘어지고 감상적인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제시하는 개념과 얼마나 다른지요! 둘째로, 우리가 여기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성경은 놀라운 방식으로 정반대로 보이는 것들을 혼합하고 조화시킨다는 것입니다. "남자답게 행하라"라는 권면 후에 곧바로 "사랑으로 행하라"라는 권면이 뒤따라 오는 것은 놀랍습니다. 기독교 복음 외에는 어떤 것도 이런 말을 함께 사용하지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1장 7절에서도 그와 같은 사례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한편으로는 '능력'을 말하면서 동시에 '사랑'을 언급하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세상은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생각하는 능력은 전적으로 사랑에 반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독재주의와 현대의 수많은 분쟁을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그런 힘을 생각하는 동안에는 사랑에 대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고대 세계가 힘에 대해 생각하던 방식이었습니다. 그것은 굳세고 거칠고 잔혹한 어떤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사랑의 개념과 결코 조화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에 대한 신약성경 전체의 개념은 적극적이고도 강하며 남자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정반대 되는 것들의 놀라운 조화와 통합을 봅니다. 사랑이라는 개념이 모든 덕목들을 포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권면을 듣습니다. "왜 우리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해야 할까요?" "그 대답은 아주 명백합니다. 바울은 첫 번째 대답을 이렇게 제시합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이 행하는 모든 일은 쓸모가 없으며, 오히려 해로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고전 13:1-3절"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고전 13:313:3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세상이 들어 본 것 중에 가장 감동적인 설교라고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런 쓸모나 가치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내가 예언의 은사를 가지고 모든 지식과 신비를 이해하고 산을 옮길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그러므로 그것이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해야 하는 또 다른 일반적인 이유는 사랑이 교회 생활의 최상의 본질이며, 쓸모 있는 교회가 되기 위한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와 오늘날의 교회 사이에는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고린도교회가 점점 무능해진 것은 그들이 여러 분파로 나뉘어 분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분열의 결과로 교회의 사기와 영적인 활기가 저하되었으며, 부도덕하고 방탕한 고린도 성읍에 대한 영향력도 갈수록 약화되어 갔습니다. 사도가 이 서신을 쓴 것은 그런 그들을 바로 세우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는 교회가 바로 서지 않으면 고린도에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교회 자체가 바로 서기 전에 세상에서 전도부터 하는 것은 힘의 낭비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진실입니다. 교회 생활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원리는 사랑의 원리입니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의 신비로운 몸의 지체라고 주장하는 우리가 서로 바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만, 우리는 세상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기능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사랑으로 행하는 것은 조화로운 교회 생활을 위해서도, 또한 교회의 유용성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원리입니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제시한 또 다른 일반적인 이유는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누리는 최고의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 중에서 최고의 은혜가 사랑의 은혜라는 것에는 논쟁의 여지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며, 또한 그리스도는 사랑의 화신이시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분 안에서 세상은 완전한 사랑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 권고받을 때, 우리는 그분처럼 되라는 요청을 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을 닮고, 그분이 사셨던 것처럼 살고, 그분이 행하셨던 것처럼 모든 일을 행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최고의 정점입니다. 사도는 지혜와 지식과 방언과 예언에 대해서도 말합니다. 그는 이런 은사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그 은사들은 모두 중요하며 필요합니다. 또한 믿음과 소망도 빠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도는 어느 때가 올 것이며, 그때에는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분을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볼 것이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알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이 새롭게 된 것은 여러분이 그분처럼 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3. 전환: 왜 사랑해야 합니까?
이제 본문을 특별한 의미에서 적용해 봅시다. 바울 사도는 "깨어 있으라" "믿음에 굳게 서라", "남자답게 강하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는" 오늘 아침의 본문이 없다면, 앞의 다른 명령들은 매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목회자로서 사도가 보여 준 지혜는 단순히 누군가에게 깨어 있으라, 믿음에 굳게 서서 강하라고 말하는 것은, 가장 위험한 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정통적인 사람들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이 투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입니다. 또한 그것은 진리에 대해 아주 관심이 많고 교회의 활동에 열성적인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이며, 주변 세계의 죄와 불의 때문에 크게 근심하는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위험입니다. 이런 범주에 속하는 사람들에게 바로 이 말씀이 필요합니다.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먼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영적인 싸움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자신과 원수에 대해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깨어 있더라도 사랑의 정신으로 깨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권면은 위험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사랑의 정신으로 깨어 있지 않으면, 그는 곧 자기 자신과 원수에 대해서 경계할 뿐 아니라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그것은 곧 의심과 불신의 분위기로 이어지며, 스스로 영적인 정탐꾼이 되는 결과를 낳게 합니다.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식하면서도, 사랑의 정신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린다면,, 끊임없이 남을 판단하는 상태에 빠지게 됩니다. 사도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6-7절“사랑은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모든 것을 바랍니다" 훌륭한 정통 그리스도인들이 깨어 있고자 하는 열망 때문에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비판하는 잘못을 범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깨어 경계하라고 배웠기에, 설교자의 말에 집중하면서 어떤 실수나 오류를 찾아낼 태세를 갖추어, 그들은 스스로 임명한 영적인 탐정이 됩니다.. 그런 태도는 곧 남을 흠잡으려는 태도로 이어지게 됩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의 실수를 찾아내는 데에서 쾌감을 누리는 단계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미심쩍은 눈초리로 흠을 찾아내려는 태도를 넘어서, 때때로 그런 것을 찾아내었을 때 정말로 즐거워하는 단계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이단이라고 간주하는 것을 폭로하기를 즐깁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사도가 사랑에 대해서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과는 정반대 되는 태도입니다. 고전 13:6절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팻(Moffat)은 이 구절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들이 잘못을 범했을 때 결코 기뻐하지 않습니다." 너무나 경계하고 살피느라고 온통 흠잡으려는 것에만 몰두하여서, 다른 사람이 잘못했을 때 기뻐하기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잘못을 들추어내는 경계의 정신이 사랑의 정신에 의해 통제받지 않는 것입니다. 토마스 찰스 에드워드는 자신의 주석에서 똑같은 말을 했습니다. "사랑에는 악의가 없습니다." 깨어 경계하면서 악의를 품지 않기란 얼마나 어려운지요! 이어서 믿음에 굳게 서라.” 성경에 확고한 기반을 두지 않은 가르침과 종파를 사람들이 쉽게 추종하는 것만큼 애처로운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랑으로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유익보다 오히려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성경을 유일한 진리로 보지 않고, 세계의 모든 종교와 사상에는 나름대로 진리의 일면이 있으므로 그중에서 좋은 것을 취사선택하고 절충하여 그것을 진리로 간주하려는 종교적 태도입니다. 이런 태도는 구약에서 여호와 신앙과 바알 신앙을 섞어 버린 종교혼합주의로 나타났으며, 오늘날의 종교다원주의 역시 같은 맥락의 잘못입니다. 고전 13:4절"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그러나 스스로 정통이라 공언하면서 자기 자랑과 교만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에 굳게 서는 문제에 있어서, 만일 우리가 사랑의 정신으로 채워져 있지 않으면, 믿음의 본질과 믿음에 관한 우리 자신의 특정한 해석을 구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오류에 빠질 위험이 많습니다. 저는 종종 사람들이 믿음의 본질에 관한 부분과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는 부분들을 구분하지 않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당신이 ''전천년 설을 신봉하지 않는다면 세계 근본주의 협회의 회원이 될 수 없습니다. 혹시 당신이 '후천년주의자라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만일 당신이 '무천년주의자'라면 당신은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여러분은 믿음의 본질과 특정 문제에 대한 해석과 의견상의 차이를 구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실제로 볼 수 있습니다. 성도들이 언제 휴거 되느냐에 대해서도 의견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문제들은 그 성격상 확실하게 무엇이 옳다고 단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물론 우리 주님의 재림은 확실합니다. 그런데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는 문제들로 인해 학파가 나뉩니다. 누가 옳은지를 누가 결정합니까? 전천년 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옳습니까, 아니면 후천년 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옳습니까? 아니면 무천년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옳습니까? 저는 모든 진영에서 유명한 학자들의 이름을 언급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모두 뛰어난 신학자들입니다. 진정 이런 문제들에 있어서는 합법적인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어거스틴의 이 격언을 새기도록 합시다. "본질에 있어서는 하나가 돼라.. 본질이 아닌 것에 있어서는 자유하라. 모든 일에 있어서 사랑으로 행하라." 믿음에 굳게 서십시오. 그러나 사랑의 정신으로 행하십시오. 다음으로 오늘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권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자답게 강하라." 사도는 이 서신에서 여러 번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짓밟아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습니다. 믿음이 강하다는 것은 고린도 성도 중에 지식이 있는 자가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를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고전 8:13"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 ““ 그것이 사랑과 힘이 결합된 것이며, 사랑과 힘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고전 13: 7절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여러분은 또한 고린도전서 6장에서 믿는 사람들끼리의 분쟁으로 인해 세상 법정에 가는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기억할 것입니다. 거기에서도 바울은 같은 말을 합니다. 7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장성하여 믿음이 강한 사람이라면, 교회를 위해서 사랑의 정신으로 차라리 손해를 보는 편을 택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은 오늘날 이 시대를 향한 바울의 명령입니다. 우리는 깨어 있으라는 말씀을 듣고, 믿음에 굳게 서라는 말씀을 들으며, 남자답게 강하라는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모든 일을 행하는 동기가 다른 사람들을 돕고 얻기 위한 것 즉 전도하기 위한 다리를 놓는 것이며, 하나님과 우리를 구속하신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임을 기억합시다.
4. 대단원: 너무 고차원적이라고 생각된다면
만일 여러분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행하는 말씀이 너무 고차원적이고도 어려운 임무라고 느낀다면, 그리스도와 그분이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을 생각하십시오. 그분은 하나님이셨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이 땅에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으며, 죄인들의 무지한 손에 넘기어져 고난을 받고 나의 죄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그 모든 것을 참으셨습니다. 어려운 문제들에 봉착할 때에 그분을 생각하십시오. 그분이 행하신 일을 생각하십시오. 그분이 여러분에게 임무를 부여하실 때에는 반드시 그 임무를 수행할 능력도 주신다는 것을 항상 기억하십시오. 그분은 그분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분은 사랑 안에서 깨어 있으셨습니다. 그분은 사랑 안에서 믿음에 굳게 서 계셨습니다. 그분은 사랑 안에서 남자답게 행하셨습니다. 그분은 골고다의 십자가에 오르기까지 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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